뽀빠이의 시금치가 잘못 알려진 데는, 1870년 독일의 과학자가 소수점 하나를 잘못 찍어 생겨난 웃음거리다. 실제 함량보다 10배나 부풀려진 것은 1930년대 다른 과학자에 의해 바로 잡혔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시금치=철분의 왕이란 등식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또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E.C 세가가 1929년에 만든 만화캐릭터 뽀빠이가 등장하면서 시금치에 대한 오해를 증폭시켰다.
1980년대 유명 만화영화였던 뽀빠이는 명대사와 함께 시금치를 섭취하고, 악당 블루토를 날려버리는 만화영화의 시금치 파위를 통해 잘 먹지 않는 어린이들에게 야채를 먹어야 한다는 교육적 의미까지 더해졌다. 또 20세기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거나 먹어봤을 뽀빠이 과자류가 출시됐고, 또 뽀빠이란 별명을 가진 방송 MC까지 등장했다.
녹색 채소가 귀한 겨울철의 채소인 시금치는 단백질과 여러 가지 비타민과 광물질을 함유하지만, 다섯 살 미만의 어린이가 많이 먹으면 건강을 해칠 수 있다. 18세기 청나라 건륭황제는 순두부 시금치 찌개를 맛있게 먹었지만, 칼슘 부족 현상을 겪었다. 요리할 때 끓는 물에 살짝 데치고 나면, 시금치의 수산(蓚酸)이 거의 다 빠져나가므로 좋은 방법이 된다.
시금치는 파, 파릉, 파릉채, 파사초라 했다. 7세기 초, 당나라 때 현장법사의《대당서역기》에 호란(지금의 허톈)에서 나는 시금치를 '파'로 처음 기록됐다. 647년 당나라 태종 때 "이파라국(지금의 네팔)에서 파릉채가 진상되었다"고, 961년에 편찬된《당회요》에 전한다.
9세기 유우석의《유빈객가화록》에는 "파릉은 서쪽 나라에서 자라는 것인데, 어떤 승려가 그 씨앗을 가지고 왔다. 이것은 파릉국에서 자라는 식물이다는 말이 와전되어 파릉이 된 것이다"는 내용이 북송 때 장우석 등의《가우본초》와 명나라 때 이시진의《본초강목》에 전하면서 알려졌다.
시금치의 명칭은 명나라 때 난무약의《전남본초》에서 뿌리가 붉다고 하여 홍근채,《품회정요》에는 적근채라 했다. 명나라 때《본초강목》에는 파릉채와 또 파사초라 적고, 서남아시아의 고대 이란(波斯) 등으로부터 전래하여 붙인 이름이다. 또 민간에서는 쥐의 입 모양을 닮았다고 서근채라 했다. 특히 1742년 완성된《흠정수시통고》에서는 "짙은 청록색 이파리와 붉은 뿌리를 가진 시금치를 아름다운 앵무새에 비교하여 앵무채"라고, 또 시금치를 홍취녹앵가 또는 황고채라 불렀다. 이것은 "청나라 건륭제가 어느 농가에서 할머니로부터 받은 점심 반찬이 '금과 백옥을 상감한 빨간 부리에 짙은 녹색 용모를 한 앵무새라고 칭합니다'고 한 대답에서 유래했다.
서남아시아와 아르메니아 등지가 원산지인 시금치는 조선 초기에 중국 명나라를 통해 전래하였다. 1445년 세종 때 편찬된《의방유취》에는 금나라의《유문사친》을 인용하여 시금치를 약재로 분류하고, 파릉채라 처음 기록됐다. 조선 전기의 서거정은 시금치를 파릉이라, 가을철에 좋은 음식으로 노래했다.
조선 사역원의 중국어 교재인《노걸대》와 최세진의《훈몽자회》에는 로 등장한다. 허준의《동의보감》에는 파릉과 시근채(是根菜)로 기술했다. 조선 후기의 김창협은《노가재집》에 남긴 시, <파릉>은 일명 시근채(時根菜)라며, 유우석의《가화록》을 인용하였다. 영조 때의 이갑은《문견잡기》에서 중국의 시금치ㆍ상추 등은 모두 우리와 같다고 했다.
이란 등 고대 페르시아에서 동방 무역로를 따라 전해진 시금치는 조선《세종실록》에까지 등장하듯이 약재료와 선물로 귀하게 여긴 식물이다. 비록 20세기 뽀빠이의 전설로 끝난 해프닝의 주인공, 시금치는 마음속에 자리하는 추억의 에너자이저 음식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