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리움

2020.01.14 16:56:55

김정원

수필가

차 한잔 마시려다 찬장 한쪽 쟁반에 널어둔 홍시와 눈이 마주쳤다. 한 개를 집어 식탁 위에 올려두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이 말랑하고 붉은 형체는 막연한 그리움의 모양을 하고 있다. 한 손에 부듯하게 담길 만큼 탐스럽지만, 꼭 쥐어 마음을 전하기엔 너무 여린 말랑함이 애틋하고, 낯선 곳에서 마주한 저녁노을을 닮은 끝 모를 주황빛이 아련하기만 하다.

늦은 봄, 바람이라도 불면, 여리고도 노란 꽃들을 후두두 떨구던 감나무가 집 뒤에 있었다. 꿀단지 모양의 감꽃이 장독뚜껑에 오소소 모였다. 올망졸망한 나팔 같기도 하고 왕관 같기도 한 감꽃을 옷 앞자락에 담아 와 하나하나 세어가며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었다. 주렁주렁 걸고 다니다 아무렇지 않게 버려진 감꽃 목걸이는 마루 위 한구석에서 누렇게 변해가거나 봉당 위 공깃돌 옆에서 아무렇게나 시들어갔다.

낮에 어르신들을 방문했다. 한 어르신 댁에서 터질 것 같은 홍시 하나를 얼떨결에 받아 들고 '홍시는 과일이라 말하기 힘든 그 무엇이 아닐까?' 생각했다. 숨어 잠자던 추억을 소환하는 체면 술사의 '레드~썬!"일지도, 혹은 눈앞에서 흔들리는 시계일지도 모른다.

이웃 동네 어르신들을 마을회관에서 뵙고, 감기에 걸려 회관에 나오지 못한 한 할머니 댁에 들렀다. 할머니 방 전기장판 위에는 이부자리가 그대로 있고, 베개 옆에는 약봉지가 두둑하다. 양말을 신고 있어도 찬 기운이 올라오는 방바닥이 면구스럽다고 할머니는 자꾸 이불속에 발을 넣으라고 하신다. 전기장판으로 올라앉다가 언뜻 차에 두었던 그 홍시가 생각났다.

늘 입안이 쓰다고 하던 할머니는 봉긋한 홍시 한 알을 버겁게 받아 들었다. 흔들리는 파리한 손가락으로 얇디얇은 홍시 껍질을 천천히 벗겨내며 한 개를 다 드셨다. 그제야 배가 부르다 하셨다. 그날도 입맛이 없다고 굶으셨을 게 뻔하니, 그 홍시가 그 할머니의 첫 끼가 되었으리라.

할머니는 혼자 사신다. 스무 살 전후로 낳았다는 두 명의 딸들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쫓겨난 후 줄곧 혼자 살았다 한다. 두 딸이 눈에 밟혀 몇 번인가 찾아 먼발치에서 숨어 보고만 왔단다. 그사이 남편은 부인도 생기고, 아들도 생겨, 돌아갈 곳이 영영 없어져 버렸다고 했다. 열매를 떨군 나무는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과 그로 인한 어떠한 꽃도 피우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언제인가 힘들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겨울의 감나무는 꽃과 열매와 잎새마저 모두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바람을 견디고 있다. 겨울이 지나 어김없이 봄이 찾아온다 해도 한번 떨어져 버린 꽃은 나무를 기억하지 못한다. 빈 가지로 흔들리는 나무만이 핏기없는 손으로 투명한 껍질 속에 가두어 둔 세월을 수없이 더듬을 뿐이다.

지금 내가 사는 집 앞마당에는 백 년이 넘었다는 감나무가 있다. 백 년을 사느라 기력이 다했는지 벌써 몇 해째 감이 달리지 않고 있다. 해거리라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거름을 주어야 한다고도 한다. 그래도 봄이 되면 여전히 작은 잎을 내민다. 어느새 넓어진 이파리들의 초록이 진해질 무렵 하얀 감꽃을 피워 올린다. 색깔도 향기도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히 지내다가 마당에 우수수 떨어진 누런 감꽃을 보고 그제야 가을의 홍시를 떠올리게 된다.

굳이 열매가 달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봄이면 연둣빛 생기를 얻을 것이고, 여름 무더위에 마당을 가득 덮는 그늘에 감사한다. 그리고 가을이면 단풍으로 두 번째 꽃을 보게 된다. 그것이면 족하다. 가을바람에 떨어진 잎을 쓸며 가을의 서정을 느낄 것이고, 유달리 불이 붙지 않는 감잎 낙엽을 태우며 연기 속에 사라져 가는 가을을 그리워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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