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필과 함께하는 겨울연가 - 새 달력을 걸며

2019.12.19 15:54:06

가을걷이를 끝낸 들판을 달리다 보면 고추를 매단 채 먼 밭에 외로이 서 있는 마른 고춧대 모습이 눈에 띈다. 봄볕에 촉을 띄우고 여름내 푸르러 마침내 열매를 맺은 식물 에게도 주어진 시간의 길이가 있을 텐데, 주인은 여태 뭐 하느라 저대로 버려두는 걸까· 아니면 새들의 먹잇감으로 남겨두는 걸까, 저물어 가는 한 해의 끝자락에 빈 밭을 홀로 지키는 고추밭 풍경이 적막하고 쓸쓸하기만 하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새로운 희망을 선사하듯 달력을 주고받으며 서로 복을 빌어 주고 훈훈한 온정을 나누던 우리만의 정겨운 세모풍습이 추억처럼 떠오른다. 두루마기 사이로 새하얀 달력을 허리에 끼고 신작로 길을 걸어오시던 아버지의 겨울이 저만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홀로 사시는 노인세대가 운집한 마을에서 약국을 하다 보니 부모님 생각에 12월이 되면 그간 이용해 주신 고마움의 표시로 달력을 선물하고 있다. 아직 이르다 싶은데 입동이 되자 어느새 신년도 달력을 찾는 노인들이 꽤 있었다. 벌써 달력을 찾다니 어떤 연유에서일까, 유한한 인생에 얼마 남지 않은 연로한 삶이 초조하게 하나, 아니면 달력 구하기 어렵던 시절을 살아온 가난의 굴레 탓인가. 마지막 보루처럼 달력에 집착하는 노인의 왜소한 모습에 마음이 시려온다. 하는 수 없이 주문해둔 달력을 보내 달라고 출판사로 연락을 하니 단걸음에 새 달력이 도착했다. 수백 개 쌓아놓은 달력 더미에서 멀어져간 종이 냄새와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가 풍긴다. 먼 기억의 모퉁이를 지나, 때 묻은 추억의 숫자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속절없이 가버린 세월은 아쉬움만 쌓인다.

내가 처음 달력을 본 건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정**국회의원의 얼굴 사진과 삼백예순 닷새가 깨알처럼 적혀있던 한 장짜리 달력에는 농사 절기와 주자 십회훈(朱子十悔訓)이 쓰여 있었다.

'불효부모사후회, 불친가족소후회, 소불근학노후회 안불사난패후회….' 안방 아랫목 벽에 벽보처럼 붙어서 아무런 말도하지 않고 인생을 교훈하던 달력의 묵시와 방 귀퉁이 세워놓은 나무 둥지에 조랑조랑 매달린 메주들…. 그리고 때늦은 후회는 소용이 없다하시며 어린 나에게 주자의 명언을 또박또박 읽어 주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 유년의 방에 아스라이 스치고 지나간다.

문명의 물결이 우리 곁으로 흘러 들어오면서 우리 집 달력도 진화하기 시작했다. 칙칙하고 어둡던 농가에 산수화와 명작그림 달력들이 도배지처럼 걸리자 액자를 걸어 놓은 듯 방 안 분위기가 밝아져 보였다. 마침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속살을 드러낸 요염한 여배우 달력이 시내버스 안 운전대 옆에도 손바닥 만 하게 걸리면서 문화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호황을 누리는 기업마다 홍보용 광고 달력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더니 문명은 어느 틈엔가 전자우편 전자책 전자 신문을 출현시키며 달력의 수요는 점점 미미해져 간다. 로그인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신세대의 자주적인 사고 방식은 삶의 질을 향상 시켜준 이면에 우리만의 감성과 미풍을 앗아가는 현실이 때로 서글퍼진다. 나는 성현들의 잠언이 담긴 달력을 넘기며 한 구절 읊조려 보기도하고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추억을 더듬어가며 동그라미 그려진 기념일을 기릴 수 있는 종이 달력이 좋다.

하루 한 장씩 떼어내는 일일 달력, 식탁위에 걸어놓은 3개월짜리 긴 달력, 책상에 얹어 놓은 탁상 달력…. 내 평생에 지나온 세월의 흔적마다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달력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한 장 남겨진 달력 앞에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한해를 돌아보니 잃어버린 것에 대한 슬픔과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 앞선다. 유수와 같은 세월에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을 뒤로하며 새 달력을 펼치고 영원히 간직해야할 나만의 시간에 다시 동그라미를 그린다. 석양을 향해 가는 나의 뒷모습에 달력 너머 희망의 노래가 그림자처럼 비추인다.

박영희

효동문학상 작품공모 대상

푸른솔문학 신인상

푸른솔문인협회 회원

에덴약국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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