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필과 함께하는 겨울연가 - 길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2019.12.19 15:53:54

이영광은 독특한 시적 형식이나 방법보다 인간의 내적 고뇌와 몸부림에 끌리고 삶의 진실에 열정적으로 가 닿으려 애쓰는 시인이다. 이런 번민과 고뇌의 과정에서 남겨지는 눈길 위의 거친 발자국들, 그게 그의 시편들이다. 이영광의 시는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된 몸의 시학을 통해 세계를 직시하고 사색하고 통찰한다. 생사(生死)의 순환, 물과 불의 병존을 통해 상반되는 것들이 뒤엉켜 공존하는 일체(一體)의 세계를 담아내려 한다. 그의 시 밑바닥에는 붕괴된 옛날 집터처럼 언젠가 부서져 없어질 것들에 대한 연민과 회한의 감정이 깔려 있다. 이런 폐허의 정서는 주로 유년기의 궁핍한 생활과 죽음 체험에서 발생하고 이것이 소외와 우울을 유발한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죽음의 테마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 삶과 죽음의 상관성 문제는 그의 시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유년의 성장과정에서 목격한 죽음들, 가족사와 연계된 육친의 죽음들, 자연 생명체의 죽음들 등 그는 죽음을 통해 삶을 사유하고 고뇌한다. 그가 반복적으로 죽음을 사유하는 까닭은 죽음의 기억을 통해 삶의 의미, 삶의 근원을 응시하려 하기 때문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두려움을 누르고,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죽음들도 정시할 수 있게 되고, 죽음을 현재의 시간에서 살아낼 수 있다. 죽음이 중요한 건 이렇게 삶 속에 들어왔을 때가 맞는 것 같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암을 몸에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다른 앎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일상의 무수한 죽음들을 담담하게 수용한다. 가족들의 죽음을 기록할 때조차도 그는 주관적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죽음을 허무와 절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보지 않고 자연의 순환적 현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의 그늘 속에서 삶의 비애를 목격하면서도 그것을 반어적 언어로 직조해낸다.

길 - 이영광(1965~ )

순댓국집 앞 대로에는

죽은 개 한 마리가 엎드려

천천히, 한 일주일 째

건너가고 있다

바퀴에 깔릴 때마다

한 번씩 새로 죽으면서

조금씩 몸을 펴가면서

두 블록쯤 앞은 지난여름에

사람이 치여 죽은 곳이다

그는 엉망으로 취해

중앙 분리선 위를,

그러니까 생의 한가운데를

갈지자로 걸어갔다

그가, 쓰러졌던 자리에

벗어놓고 간 하얀 사람을

여름내 바퀴들이 짓이기고 지나갔다

횡단보도 반토막만한

개의 길

두 블록이 될까 말까한

사람의 길

아무도 없는 밤이면 슬며시 일어나

다시 걸어가는 길

죽음에 대한 천착은 시집 『그늘과 사귀다』(2007)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죽음을 통해 시인은 시대의 비밀과 존재의 어둠을 누설한다. 절망과 희망, 밤과 낮의 경계(境界)에서 시인은 죽음을 반추하고 사색한다. 세상의 수많은 아픔과 죽음, 아름다과 슬픔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는 시집 『아픈 천국』(2010)도 세상에 내놓는다. 이 시집에서도 죽음에 대한 천착이 계속 나타나는데 이전의 죽음과는 다소 달라진다. 이전의 시집들이 개인적인 차원의 죽음을 다루었다면, 이 시집에서는 세상 곳곳에 넘치는 수많은 죽음의 기미들을 감지해 유령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죽음의 범위가 넓게 확장되고 사유 또한 깊어진다.

위의 시 「길」에도 시인의 죽음에 대한 관찰과 사유가 묻어 있다. 순댓국집 앞 대로에서 로드 킬 당한 개와 두 블록쯤 떨어진 곳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 이 둘이 남겨놓은 죽음의 흔적 위로 무수히 자동차 바퀴들이 지나가고 지나간다. 시인은 그 광경을 무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죽음에 이르는 길을 사색한다. 아무도 없는 밤, 사람의 눈을 피해 슬며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다시 길은 가는 죽은 자의 모습은 삶이 낳는 환영(幻影)이다. 이처럼 시인은 개나 사람의 죽음을 유령이미지로 처리하여 우리의 일상사 곳곳에 퍼져 있는 죽음의 의미를 되묻는다. 죽음의 현장을 통해 죽음을 낳는 폭력적 현실, 비애의 현실을 종용히 폭로한다. 이 유령들은 죽은 자의 그림자이면서 우리 주변의 소외된 자들의 아픈 초상이기도 하다. 늦은 밤에 폐지를 줍는 노인, 취객들에게 시달리는 대리운전기사, 절망에 사로잡혀 폭탄주를 마시는 사람, 실직의 몸이 되어 빈 방에서 홀로 기침하는 사람 등 이 모두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아픈 유령들이다.

/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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