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순
<이유있는 바리스타> 저자, 서원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망동으로 촉발된 일본불매운동의 시국 속에서 '커피'를 생각한다. '더 이상 늦추어선 안 된다'는 다급함이 치밀었다. 고순도 불화수소 등 기술집약적인 핵심소재를 손에 쥐고 심통을 부리는 아베가 괘씸하지 않을 수 없겠다. 분을 삭이지 못하는 분들이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며 정곡을 찌르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반일캠페인이 어디 한 두 번 있던 일인가"라며 곧 사그라질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던 사람들도 "이번은 좀 다른데!"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 한 대형마트에 갔다가 가슴이 뭉클했다. 일본 자본이 들어간 매장들을 피해 그 곳을 찾아간 사람들로 계산대가 밀려 길게 줄이 늘어섰지만 어느 누구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펼치던 선열들의 얼굴이 스쳤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비장하게 만든 것일까· '애국심' '또는 '정의감'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것은 '반성'이다. 글로벌 의식이라는 미명 아래 거부감 없이 사 주던 일본산 제품들에 대한 '깊은 반성'이다. 일본제품을 한국을 괴롭히는 '무기'로 악용한 아베는 '길들여진다는 것의 위험함'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태평양전쟁을 벌이며 발악을 하던 1943년,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를 발표하고 이렇게 적었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눈물을 흘릴 일이 생긴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76년이 지난 작금의 아베 사건을 경고하는 구절일 줄 누가 알았을까· 분노 속에서도 냉철한 이성과 절제된 애국심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역사는 겨레에게 차분하게 대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겨눈 안중근 의사의 총끝처럼, 인력거에 올라타는 이완용의 폐부를 향한 이재명 의사의 칼끝처럼 일절 떨림과 흥분이 없어야 한다.
커피 분야에서 'NO아베 운동'은 일본에 길들여진 부분을 찾아내 바로잡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전범기업 미쓰비시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커피 생두 유통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세계 최대라는 말이 나온다. 브라질의 이파네마 지역에서만 매년 9200톤을 커피를 사들여 세계에 뿌리고 있다. 자료를 추적하면, 미쓰비시 상사를 통해 국내로 들어오는 커피 생두의 양과 거래처를 알 수 있다. 국내의 한 생두업체는 한 때 '미쓰비시 커피'임을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일본은 미국, 독일에 이어 세계 3위의 커피 수입대국이다. 커피 소비량도 세계 3위인데, 시장규모가 우리보다 2배 가량 많은 14조원을 넘는다. 핵심은 일본인들이 수입해 자기들이 마시는 커피가 아니라 각국으로 공급하는 커피생두의 물량을 상당량 일본이 담당한다. 가격이 비싼 스페셜티급 커피는 일본이 쥐락펴락하고 있음을 미국도 인정하는 바이다. 이 때문에 꽤 오랫동안 미쓰비시 상사가 대주는 커피 생두는 품질이 좋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신선한 커피는 일본이나 미국, 유럽으로 공급하고 한국에는 묵은 커피만을 값싸게 땡처리한다는 원망도 적지 않다.
혹시 "일본이 커피 산지를 장악할 동안 한국은 무엇을 했느냐"고 핀잔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겨레의 가슴을 후벼 파는 짓이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과 함께 조선인의 해외이민을 금지시켰다. 그 사이 하와이섬을 독차지한 일본은 현재 하와이커피를 좌우하는 큰 손으로 성장했다. 브라질 커피농장의 상당수에 일본 자금이 침투해 있고, 일본인 농장주가 많은 이유도 1920년대와 1930년대 브라질 커피농장으로 이민 보내는 인력을 일본이 독점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조선인이 브라질을 간다고 하면 '빠가야로'라는 호통과 함께 철퇴가 내려지는 일제 강점기였다.
그 동안 일본이 우리보다 앞선 분야를 두고 엉뚱하게 '민족성'을 거론하며 자괴감을 주는 평가를 하는 것은 '식민잔재'이다. 일제 강점기에 겨레가 받은 고통과 일본이 취한 엄청난 부당이익과 불로소득을 생각하지 않고, 역사를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신(新) 친일'이다.
커피 코너에 서서 커피봉투에 적힌 정보를 샅샅이 뒤졌다. 예상한대로 미쓰비시란 단어가 버젓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제품에는 아베로 상징되는 '은밀한 손'이 감지됐다. 일본의 공포영화가 주는 특이한 느낌이 '스멀스멀'이다. 일본의 커피도 우리 생활 깊숙하게 스멀스멀 들어와 어느 날 갑자기 '아베의 무기'가 되지는 않을까 몸서리가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