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抗日)과 극일(克日)

2019.07.09 14:47:12

[충북일보]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양키 고 홈(Yanqui go home)'이라는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은 물론, 90년대 초반까지 일종의 유행어였다.

무려 3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30년 전 유행어 흐름이 최근 바뀌고 있다. '양키 고 홈'과 이명박 정부 시절 유행했던 '뇌 송송 구멍 탁'이라는 구호는 사라졌고, 온라인을 통해 '항일(抗日)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는 확산되고 있다.

가깝고도 먼 일본

50대 이상 중장년층에게 일본은 '극혐'의 대상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과 드라마 '야인시대'에 열광했던 이유다. 일본은 제국주의(帝國主義)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과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가 대표적인 사례다.

요즈음 2040 세대는 다소 다르다. 일본 여행과 문화, 맛집 등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적지 않다. 1년 동안 서너 차례 일본 여행을 하기도 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일본과 미국,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을 평가하면서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댄다. 보수적 성향은 미국과 일본은 우방, 중국과 러시아는 협력하되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다. 북한은 여전히 적국으로 간주한다.

진보정권은 반대의 상황이다. 미국과 일본은 협력하되 경계의 대상인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보수정권에 비해 후한 점수를 준다. 북한에 대해서도 '한민족'이라는 단어로 경계심을 풀고 한없이 너그러운 태도를 견지한다.

식민지 통치를 경험한 우리에게 항일(抗日)의 개념을 극일(克日)로 바꾸려고 시도한 대통령이 있다.

처음은 1965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은 대일국교 정상화회담 결과에 대한 담화문을 통해 '한 나라가 운명을 개척하고 전진해 나가려면, 무엇보다도 국제정세와 세계조류에 적응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국제정세를 도외시하고 세계대세에 역행하는 국가판단이 우리에게 어떠한 불행을 가져 오고야 말았는가는 바로 이조말엽에 우리 민족이 치른 뼈저린 경험이 실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항일(抗日)은 겁을 먹은 사람들의 생각으로 치부했다. 그러면서 극일(克日)을 통해 일본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두환 정권도 항일의 역사를 극일(Over Japanese)로 바꿔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과거를 잊고 일본보다 나은 나라를 만들자는 목표라고 했다.

2019년 7월 아베의 충동에 대한민국이 흔들리고 있다. 전국적으로 반일을 넘어 항일로 되돌아 갈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과연 옳은 것일까. 우리의 역사를 1910년으로 다시 돌려야 하는 것일까.

아베는 반도체 관련 3가지 품목인 레지스트, 불화수소, 플리이미드 등에 대한 수출을 규제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장 삼성 등 대기업 반도체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가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이재용 삼성 회장이 일본으로 날아갔고, 정부는 뒤늦게 부품, 소재, 장비 산업 육성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일관계의 핵심으로 정치문제를 꼽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정책을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환장할 노릇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적폐로 영어(囹圄)의 몸이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일본과의 절충을 시도했다. 공식 확인된 것은 없지만, 모종의 거래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가 간의 약속

박 정부의 대일본 정책을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가 간의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같은 논리라면 한반도 최다 침략국인 중국에 대해서도 분노해야 한다. 한국전쟁의 주범 북한정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우리도 사죄해야 한다.

침략의 역사를 기억하되, 협력할 것은 협력해야 한다. 일제 안 쓰기 등의 소아적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글로벌 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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