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몽이 돼 숲길을 걷는다. 추억이 돼 버린 지난 여름날의 미련들을 낙엽처럼 밟았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외로운 밤 적막 속에 마지막 잎마저 떨어진다면, 새도 더 이상 그 나무에서 노래하지 않을 것이다. 쌀쌀해 진 바람이 날카롭게 품을 파고 든다. "가을은 가슴을 찢는다."는 니체의 절규가 들리는 것 같다.
가을커피는 감각적이어야 한다. 덩그러니 앞에 놓인 커피가 어제보다 쓸쓸해 보인다. 그윽한 향과 따뜻한 온기는 여전하지만, 왠지 그 이상의 무엇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헤밍웨이와 토마스 엘리엇, 거트루드 스타인 등 수많은 문학가들은 어떻게 커피에서 '위안(慰安)'을 찾았을까? 이런 저런 마음 끝에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입안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이 어느 겨울날 어머니의 비로도(벨벳) 치마저고리에 볼을 비비던 나의 어린 모습을 영상으로 띄워준다.
아, 그렇다. 가을커피는 바디(Body)를 즐길 일이다.
바디는 와인의 향미를 표현하는데 쓰는 용어인데, 커피 맛을 평가하는데도 사용된다. 물을 머금고 있을 때와 우유를 머금고 있을 때 혀와 입안의 점막이 느끼는 무게감이 다르다. 커피를 머금었을 때 그 무게감이 우유 쪽에 가까울수록 "바디가 무겁다(Heavy)."고 표현한다.
"바디가 묵직하다."는 것은 커피에 들어 있는 성분이 많고 따라서 복합미가 좋을 것임을 암시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바디가 좋은 커피는 목을 타고 내려오며 피워내는 향(Nose)과 삼킨 뒤 길게 이어지는 뒷맛(Aftertaste)이 나쁠 리 없다.
바디가 무거워야 반드시 좋은 커피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바디로 품질을 가려내려면 산지와 품종, 가공법, 추출법이 모두 같아야 한다. 드립 추출을 하기 위해 진하게 볶지 않은 콜롬비아 킨디오 커피들은 바디가 가볍다. 이 때 바디는 혀를 짓누르지 않고 갇혀 있던 방에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듯 입안을 경쾌하고 활달하게 만들어 준다.
후각과 미각뿐 아니라 바디로 대표되는 촉감도 맛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에 생각이 깊어진다. 묵직함이 비슷하다면 무엇으로 우열을 가려야 할까? 답은 어렵지 않다. 커피를 마셔보면 우리의 관능은 좋고 나쁨을 본능적으로 구별해낸다. 커피의 바디감이 왜 좋은 지를 설명한 적이 없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을 뿐이다.
마치 실크 스카프가 볼을 스치는 듯한 커피를 만날 때면, 그래서 가을날 쓸쓸한 영혼을 조금이나마 위로 받았다면 그 커피를 이야기 해주는 것이 예의이다. 그것은 커피가 지닌 향미를 묘사해 줌으로써 가치를 인정해주는 일이다.
바디를 말할 때 질감(Texture)과 촉각(Tactile)로 나눠 묘사하면 더욱 구체적이다. 질감은 마우스필(Mouthfeel)이라고도 한다. 질감을 표현하고 싶다면 입을 마르게 하거나 떫게 만드는 지(Mouth drying), 혀에 작용하는 두터움(Thickness), 스테인리스 캔에 혀를 댓을 때 느껴지는 금속성(Metallic), 커피를 삼킨 뒤 느껴지는 기름기(Oily) 등의 정도가 어떤지를 가늠해 본다.
촉각은 주로 부정적인 요소가 드러날 때 언급된다. 거친 가루(Grit), 곡물 같은(Grainy), 입자감(Particle), 알갱이(Granule), 거친(Harsh) 등의 단어를 연상케 하는 맛이라면 가을이 주는 싸늘함이 되레 깊어질 뿐이다.
촉감이 좋은 커피가 우리의 관능을 위로하는 것은 단맛이 행복감을 주는 것과 같다. 부드러운 선율은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잼처럼 끈적일 정도의 점도를 연상케 하는 커피는 다른 결점까지 지배하며 우리의 미각을 달래준다.
이쯤 되면 떠오르는 단어가 감미(甘味)로움이다. 감미로움은 단맛 그 차체를 묘사하면서도 살결에 스치는 부드러움까지 표현해준다.
커피만으로 부족하다면 우유의 힘을 빌려도 좋겠다. 바야흐로, 따뜻한 카페라테가 더욱 사랑스러운 가을의 한복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