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소풍길 - 상당산성

성곽의 이끼 속에서 살아 숨쉬는 역사의 숨결을 느끼다

2011.01.13 18:32:44

뽀드득, 뽀드득. 북풍한설이 밀려오는 새해 아침, 눈발 가득한 산성은 고립무원 천의무봉이다.

한 해의 시작, 해 뜨는 상당산성을 걷는다. 눈발이 날리고 시린 바람은 맹렬하게 내 살결을 후빈다. 맑은 햇살을 보며 신묘년辛卯年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오른 첫 길이다. 추운데 괜한 고생한다며 발걸음을 머뭇거리던 아이들은 성곽을 오르자마자 탁 트인 대자연의 미려함과 숨죽이고 있는 도시의 전경과 차오르는 맑은 햇살과 오종종 예쁜 다람쥐와 파닥거리는 산새들에 마음 빼앗겼는지 성곽길을 따라 까불까불 거린다. 아이들의 춤사위와 산성의 자연의 숨결이 만났으니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아름답다.

꽁꽁 얼어붙은 산성호수에 주인 잃은 배 한 척(왼쪽)과 얼음골 아저씨의 전용 지게

남문에서 시작된 발걸음은 성곽 길을 따라 오르다 시내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올 즈음에서 숨고르기를 한다. 고단하고 애틋하고 막막한 삶의 터전인데 오늘따라 그 모습이 왠지 짠하다. 도시를 등지고 숲속으로 발길을 옮기자마자 토끼 한 마리가 귀를 쫑긋 세우고 맑은 눈으로 우리 가족을 쳐다본다. 아이들은 토끼해에 토끼를 만났으니 횡재라며 호들갑이다. 토끼는 옛이야기나 동요, 민화, 동시 등에 자주 등장하는데 착하고 선한 동물이자 용맹과 지혜로움으로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는 영특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옛사람들은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계수나무 아래에서 불로장생의 약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의 모습을 그렸다. 토끼처럼 천년만년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계에서 아무 근심걱정 없이 살아보자는 이상세계理想世界를 꿈꾸지 않았던가.

지난해 여름에도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오른 적이 있다. 던적스럽고 구차하고 진땀나는 도심을 탈출하기에는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산성의 여름은 태양도 붉고 햇살도 붉고 초록의 잎새에 숨어 있는 열매도 붉다. 하여, 여름은 정열의 계절이요, 합창의 시간이요,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춤추는 축제의 장이다. 봄꽃이 만발하던 그 곳에 초록의 잎들이 무성하더니 장마와 햇살과 바람과 구름이 한바탕 광란의 춤사위를 펼친 후 숲속은 푸른 먹물을 보는 것처럼 진하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이요, 천의무봉天衣無縫이다.

ⓒ그림 강호생(화가)
산길 들길 골목길 할 것 없이 발 닿는 곳마다, 눈길 마주치는 곳마다 붉은 열매가 가득하다. 푸른 숲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아, 낙원이 따로 없다. 시원한 계곡물의 낙수소리, 햇살과 바람 부서지는 소리, 그 소리에 더욱 빛나는 크고 작은 잎새들과 산새 들새들의 날렵한 몸짓은 얼마다 기운차던가. 붉은 열매는 그 속에 숨어서 빛났다. 달고 떫은맛의 보리수, 통통하고 수줍어 붉게 웃는 달차근한 맛의 산딸기, 작고 몽글한 붉은 열매가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려있는 복분자와 통통하게 익어가는 머루, 그리고 햇살에 그을려 붓질한 것처럼 검게 익은 까마종…. 딸아이는 그것들을 보면서 "어머, 색깔이 오고 있어, 색깔이…"라며 예쁜 비명을 질렀다. 내가 어렸을 때는 친구들과 함께 산속으로, 계곡으로 휘리릭 달려가서 톡 따먹곤 했는데 그 생명, 그 햇살이 무럭무럭 자라서 지천명을 향해 달리고 있으니 세월은 무상하고 내 마음은 정처 없다.

산성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약수터에서 오르는 길, 옹기박물관에서 시작하는 길, 양궁장을 등지고 떠나는 길, 상리에서 출발하는 길 등 앞 선 사람들이 흔적을 만든 곳이라면 그 어느 곳도 마다않고 오르고 또 오른다. 꽃피고 녹음 우거지고 단풍들고 흰 눈 쌓여 칼날 같은 바람 부는 그날도 어김없이 산성길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산성길을 걷는 게 아니라 비루하고 던적스럽고 누추하기 짝이 없는 물욕의 세상을 피해 자연의 길을 자박자박 밟고 있는 것이다. 계곡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뭇잎 햇살 부서지는 소리에 내 마음 기대고, 흰구름 뭉게구름 비구름을 벗삼고, 산성 아래에 펼쳐져 있는 도시까지 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모두 내 것이다.

춥다고 움츠려들지 말자. 봄이 되면 산성은 꽃천지가 될 것이다.

산성의 사계 중 여름은 깊고 느리다. 산벚나무, 소나무, 참나무처럼 곧고 높은 나무와 단풍나무, 산초나무, 붉가시나무, 아카시아나무처럼 작은 나무들이 깊고 푸른 숲을 만들었고 그 속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평화롭게 파닥파닥 거리니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구순할 뿐이다. 그토록 뜨겁던 태양도 수목의 비린내를 맡으면서 얌전하고 온순한 햇살이 되고, 늙은 숲 어린 숲, 날짐승 들짐승 할 것 없이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있으니 발 닿는 곳마다, 눈길 마주치는 곳마다 새로움과 신선함으로 가득하다.

눈썰매 타는 아이나 썰매를 끄는 어른 모두 동심에 빠져있다.

반면에 겨울은 차고 가볍다. 솔잎향과 나목과 나목 사이를 스르륵 빠져 나온 찬바람에 코끝이 시리지만 온 몸이 맑고 향기롭다. 눈발 날리고 햇살 가득한 한 낮의 오후에는 바람도 숨죽인다.

그렇다. 숲의 또 다른 이름은 새로움이요 신선함이다. 그래서 숲 속의 모든 생명들에게 귀 기울이면 '수글 수글~' 혹은 '숙울 숙울~' 소리만 있을 뿐이다. 맑고 깨끗한 숲속의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이며 새소리 바람소리인 것인데 이 동네 사람들은 숲을 '수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산성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성곽의 오래된 이끼 속에 숨어있는 역사의 숨결 때문이 아닐까. 일찍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에 상처입고 정여립의 난, 이괄의 난, 이인좌의 난 등 각종 변란의 중심에서 한 발짝 물러서지 않았던 저 지존을 보라. 한성으로 연결되는 길목이기 때문에 선비들이 이곳에서 잠시 여정을 풀기도 했을 것이고 주막에서 걸쭉한 막걸리 맛에 시름을 덜기도 했으리라. 팔도의 소식이 궁금한 사람들과 파발마도 이곳에서 여흥을 즐기지 않았을까.

역사의 숲, 생명의 숲을 자분자분 걸어보자

산성은 지금 곡절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어느 시대에서도 큰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시리고 아픈 삶의 이야기를 가슴속 깊이 묻어두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산성에 오르면 자연의 신비로움과 역사의 깊은 맛에 마음까지 숙연해 진다. "야~호~"하고 큰 소리로 외쳐보라. 메아리가 없다. 묵묵부답이다. 습하고 어두운 이끼 속으로, 솔잎 속으로 힘없이 밀려들어가고 만다. 아, 한 많은 사연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래서 산성은 신비스럽고 매력이 넘치는 것이다.

나는 산성의 사계를 닮고 싶다. 깊고 푸르며 아름다운 삶, 나만의 분명한 색깔을 갖고 있으면서도 인내하고 베풀 줄 아는 미덕, 드넓은 세상을 향해 끝없이 도전하는 열정을 갖고 싶다. 일찍 파는 꽃은 남의 눈에 쉽게 보일 수 있어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다. 늦게 피더라도 야무진 열매로 남고 싶다. 세상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지금 산성에는 시린 바람 속에서도 햇살 부서지는 소리 가득하다. 산성으로 달려가 아침햇살을 한 움큼 입안에 넣고 싶다. 새로운 희망, 새로운 에너지로 등목이라도 하고 싶다.

//글=변광섭·그림=강호생·사진=홍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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