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세종] 일제 강점기 때 세종시 부강면(당시 충북 문의군 삼도면 부강리)에서 7년간 초·중학교를 다닌 뒤 일본에서 반제국주의 활동을 한 일본여성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26)가 우리나라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국가보훈처는 17일 "79회 순국선열의 날(17일)을 맞아 여성 32명을 포함한 총 128명의 독립유공자에게 건국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을 각각 추서(追敍·죽은 뒤에 훈장 따위를 주는 것)한다"고 밝혔다. 가네코는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우리나라 건국훈장(애국장)을 받는다. 지난해 6월 28일 개봉된 영화 '박열'로 널리 알려진 가네코의 생전 행적은 1931년 일본 춘추사(春秋社)에서 발간된 그녀의 옥중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에 잘 나타나 있다. ◇ 식민지 조선인들의 비참한 모습 수기에 묘사 수기에 따르면 가네코는 요코하마(橫濱)에서 태어났다. 경찰(형사) 출신인 아버지는 천황제를 신봉하는 권위주의자, 어머니는 하층 계급 출신이었다. 하지만 생활이 방탕했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따라서 가네코는 실제 부모가 있는데도 호적은 없는 무적자(無籍者)였다.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던 소녀는 1912년 할머니와 고모 부부가 살고 있던 조선 부강으로 갔다. 일본인만 다니던 6년 과정의 부강공립심상소학교(현 부강초등학교 전신) 4학년에 입학했으나, 할머니에게서 핍박을 많이 받아 자살까지 기도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그녀는 학교 성적도 우수했다. 부강초등학교에 남아 있는 그녀의 학적부를 보면 도화(圖畵·그림 그리기)와 재봉(裁縫) 등 일부 과목만 '을(乙)'이고 대부분 최고 등급인 '갑(甲)'이다. 1917년 3월에는 2년 과정의 부강공립고등소학교(현재 중학교 과정)를 졸업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일본인 소녀는 훗날 쓴 수기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정상(태산)에서는 부강 지역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헌병파견소(현 부강파출소)에서는 카키색 제복을 입은 헌병이 조선인을 마당으로 끌어 내 옷을 벗기고는 맨살이 드러난 엉덩이를 채찍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하나, 둘 헌병의 새된(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채찍을 맞고 있는 조선인의 울음섞인 소리도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다." ◇"부강초등학교에 가네코 기념비 세워야" 1919년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됐다. 22년에는 경북 문경 출신의 조선인 박열(朴烈·1902∼74)과 동거를 시작한 뒤 함께 아나키즘 단체(불령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왕(日王)을 암살하려 한 혐의로 26년 사형선고를 받은 가네코는 그 해 7월 23일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에서 끈으로 목을 매어 23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일본으로 가기 전 부강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도 직접 목격한 가네코는 훗날 박열과 함께 체포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조선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 중에서 일본인에 대한 반역적 정서만큼 제거하기 힘든 것은 없을 것입니다. 독립소요 광경을 목격한 다음 나 자신에서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서 용솟음쳤습니다." 부강 출신 향토사학자 이규상(58·전 청원군 부용면장)씨는 "가네코는 한국인도 되기 힘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만큼 모교인 부강초등학교에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선(38·주부·세종시 도담동)씨도 "정부가 독립유공자로 공인한 인물을 세종시나 세종교육청이 시민이나 학생들을 위한 홍보·교육 자료로 적극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종 / 최준호 기자 choijh5959@hanmail.net 170720 가네코후미코 부강생활-박열과 후 - 우리나라 건국훈장(애국장)을 받는 일본인 여성 독립운동자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26·왼쪽). 오른쪽은 일제 강점기 당시 그녀와 함께 일본에서 반제국주의 활동을 한 조선인 박열(朴烈·1902∼74). 사진 제공=이규상 씨 170720 가네코후미코 부강생활-부용봉과 - 가네코 후미코가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박열(왼쪽)과 함께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사진 제공=이규상 씨 170720 가네코후미코 학적부0 - 가네코 후미코의 부강공립심상소학교·부강공립고등소학교 시절 학적부. 현재 부강초등학교에 남아 있다. / 최준호 기자 170720 가네코후미코 -살던 곳0 - 가네코후미코가 자신의 옥중수기에서 묘사한 세종시 부강면 내 주요 지점. 원지도 출처=네이버 170720-1910년 부강 나루터-이규상 - 1910년 당시 부강 나루터 모습. 가네코 후미코는 1912년부터 19년까지 부강에 살았다. 사진 제공=이규상 씨 170720-1940년대 부강파출소-이규상 - 1940년대 부강파출소 모습. 1912년부터 19년까지 부강에 거주한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의 옥중수기에서 헌병파견소(현 부강파출소)에 끌려와 일본헌병에게 잔인하게 고문당하는 조선인의 비참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사진 제공=이규상 씨 170720 가네코후미코 -부강심상소학교 자 - 가네코 후미코가 다닌 부강공립심상소학교 터. 학교는 현 부강초등학교 건물과 출입구 사이에 있었다. / 최준호 기자 170720 가네코후미코 살던 집-이규상 설 - 가네코 후미코가 1912~19년 살았던 집(세종시 부강면 부강리 358 부강역 인근) 입구. 설명하는 사람은 부강 출신 향토사학자 이규상(58·전 청원군 부용면장)씨다. / 최준호 기자 한국 독립유공자 된 세종시 부강초 출신 일본여성 '가네코' 국가보훈처, 17일 순국선열의 날 맞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부강에서 일본인 만행 목격…일본 왕 암살 혐의로 사형선고 세종시민들 "세종시나 교육청이 홍보·교육 자료로 활용해야" [충북일보=세종]일제 강점기 때 세종시 부강면(당시 충북 문의군 삼도면 부강리)에서 7년간 초·중학교를 다닌 뒤 일본에서 반제국주의 활동을 한 일본여성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26)가 우리나라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국가보훈처는 17일 "79회 순국선열의 날(17일)을 맞아 여성 32명을 포함한 총 128명의 독립유공자에게 건국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을 각각 추서(追敍·죽은 뒤에 훈장 따위를 주는 것)한다"고 밝혔다. 가네코는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우리나라 건국훈장(애국장)을 받는다. 지난해 6월 28일 개봉된 영화 '박열'로 널리 알려진 가네코의 생전 행적은 1931년 일본 춘추사(春秋社)에서 발간된 그녀의 옥중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에 잘 나타나 있다. ◇ 식민지 조선인들의 비참한 모습 수기에 묘사 수기에 따르면 가네코는 요코하마(橫濱)에서 태어났다. 경찰(형사) 출신인 아버지는 천황제를 신봉하는 권위주의자, 어머니는 하층 계급 출신이었다. 하지만 생활이 방탕했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따라서 가네코는 실제 부모가 있는데도 호적은 없는 무적자(無籍者)였다.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던 소녀는 1912년 할머니와 고모 부부가 살고 있던 조선 부강으로 갔다. 일본인만 다니던 6년 과정의 부강공립심상소학교(현 부강초등학교 전신) 4학년에 입학했으나, 할머니에게서 핍박을 많이 받아 자살까지 기도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그녀는 학교 성적도 우수했다. 부강초등학교에 남아 있는 그녀의 학적부를 보면 도화(圖畵·그림 그리기)와 재봉(裁縫) 등 일부 과목만 '을(乙)'이고 대부분 최고 등급인 '갑(甲)'이다. 1917년 3월에는 2년 과정의 부강공립고등소학교(현재 중학교 과정)를 졸업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일본인 소녀는 훗날 쓴 수기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정상(태산)에서는 부강 지역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헌병파견소(현 부강파출소)에서는 카키색 제복을 입은 헌병이 조선인을 마당으로 끌어 내 옷을 벗기고는 맨살이 드러난 엉덩이를 채찍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하나, 둘 헌병의 새된(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채찍을 맞고 있는 조선인의 울음섞인 소리도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다." ◇"부강초등학교에 가네코 기념비 세워야" 1919년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됐다. 22년에는 경북 문경 출신의 조선인 박열(朴烈·1902∼74)과 동거를 시작한 뒤 함께 아나키즘 단체(불령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왕(日王)을 암살하려 한 혐의로 26년 사형선고를 받은 가네코는 그 해 7월 23일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에서 끈으로 목을 매어 23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일본으로 가기 전 부강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도 직접 목격한 가네코는 훗날 박열과 함께 체포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조선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 중에서 일본인에 대한 반역적 정서만큼 제거하기 힘든 것은 없을 것입니다. 독립소요 광경을 목격한 다음 나 자신에서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서 용솟음쳤습니다." 부강 출신 향토사학자 이규상(58·전 청원군 부용면장)씨는 "가네코는 한국인도 되기 힘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만큼 모교인 부강초등학교에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선(38·주부·세종시 도담동)씨도 "정부가 독립유공자로 공인한 인물을 세종시나 세종교육청이 시민이나 학생들을 위한 홍보·교육 자료로 적극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종 / 최준호 기자 choijh5959@hanmail.net ---------- 첨부 8장
[충북일보=세종] 지난 6월 28일 개봉된 영화 '박열'에서 조선인 주인공 박열(朴烈·1902∼74)보다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26)에게서 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는 관람객이 많다. 물론 여배우(최희서 분)가 연기를 잘 했다. 하지만 식민지 남성을 사랑하다 23세에 생을 마감한,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일생이 관객들의 감성을 크게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네코 후미코가 일제 강점기에 7년간 세종시 부강역 인근(당시 충북 문의군 삼도면)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호적 없던 일본소녀, 9세 때 조선 부강으로 가네코 후미코는 1931년 일본 춘추사(春秋社)에서 발간된 옥중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에서 9~16세 때 자신이 살던 부강면 모습을 작가 못지않은 예리한 관찰력으로 묘사했다. 이에 따라 이 책은 현재 세종시 향토사 연구에서도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인 가운데 가네코 후미코를 열심히 연구한 대표적 인물은 부강 출신 향토사학자 이규상(57·전 청원군 부용면장)씨다. 2016년말 명예 퇴직한 이 씨는 '가네코 후미코의 부강 생활'이란 제목의 자료집(53쪽)도 만들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요코하마(橫濱)에서 태어났다. 경찰(형사) 출신인 아버지는 천황제를 신봉하는 권위주의자, 어머니는 하층 계급 출신이었다. 하지만 생활이 방탕했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가네코 후미코는 실제 부모는 있으나 호적은 없는 무적자(無籍者)였다.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던 소녀는 1912년 할머니와 고모 부부가 살고 있던 조선 땅 부강으로 갔다. 일본인만 다니던 6년 과정의 부강공립심상소학교(현 부강초등학교 전신) 4학년에 입학했다. 할머니에게서 핍박을 많이 받아 자살까지 기도했지만,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그녀는 학교 성적도 우수했다. 부강초등학교에 남아 있는 그녀의 학적부를 보면 도화(圖畵·그림 그리기)와 재봉(裁縫) 등 일부 과목만 '을(乙)'이고 대부분 최고 등급인 '갑(甲)'이다. 1917년 3월에는 2년 과정의 부강공립고등소학교(현재 중학교 과정)를 졸업했다. ◇일본인은 고지대,조선인은 저지대 거주 수기에 따르면 1904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생긴 부강역을 중심으로 '야마노테(山の手)'라고 불린 고지대에는 40여 가구의 일본인, '시타마치(下町)'라고 불린 저지대에는 조선인(400여 가구)이 주로 살았다. 가네코가 살던 집은 전망이 좋은 고지대(현 부강리 358)에 있었다. 일본인 소녀의 눈에 비친 식민지 조선인들의 비참한 모습은 이랬다. "정상(태산)에서는 부강 지역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헌병파견소(현 부강파출소)에서는 카키색 제복을 입은 헌병이 조선인을 마당으로 끌어 내 옷을 벗기고는 맨살이 드러난 엉덩이를 채찍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하나, 둘 헌병의 새된(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채찍을 맞고 있는 조선인의 울음섞인 소리도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다." 아름다운 경치는 이렇게 묘사했다. "(외지에서 부강에 처음 오는)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부용봉이다. 소형 후지산(富士山·일본 최고의 산·높이 3천776m) 두 개를 나란히 놓은 듯한 모습이다. 산자락을 돌아 동에서 서로 가을 햇살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는 백천(白川·금강)이 흰 비단을 휘감은 듯 천천히 흐르고 있다. 그 모래밭 위를 짐을 실은 당나귀가 께느른한(몹시 기운이 없는) 모습으로 지나간다. 산자락에는 나무 사이로 조선인 마을의 낮은 초가지붕이 띄엄띄엄 보인다. 남화(南宗畵)를 보는 듯한 풍경이다. 처음으로 내가 살아서 숨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무정부주의자→사형선고,→23세에 자살 1919년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 후미코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됐다. 22년 박열과 동거를 시작한 뒤 아나키즘 단체(불령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26년 일왕을 암살하려 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해 7월 23일,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에서 끈으로 목을 매어 23세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부강에서도 일어난 '3·1만세운동'도 목격한 가네코는 훗날 일본에서 박열과 함께 체포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조선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 중에서 일본인에 대한 반역적 정서만큼 제거하기 힘든 것은 없을 것입니다. 독립소요 광경을 목격한 다음 나 자신에서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서 용솟음쳤습니다." 이규상 전 부용면장은 "가네코를 주인공으로 다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어도 상당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부강초등학교에 가네코 기념비,부용면사무소에는 3·1만세운동비를 건립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세종 / 최준호기자 choijh5959@hanmail.net
[충북일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는 독립운동가 박열(朴烈, 1902~1974)의 연인으로, 조선을 사랑했던 일본 여성으로 근래들어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1910년대 청주군 부용면(현 세종시 부강면) 부강에서의 7년 생활이 그녀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그녀의 얼굴 사진은 잘못 알려져 온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인터넷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치면 뉴스는 물론 각종 백과사전에 △눈이 크고 △가운데 가르마를 했으며 △그리고 기모노를 입은 여성 얼굴이 검색되나 이 여성은 가네코 후미코가 아닌, 동성동명의 다른 일본 여성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일본 야마나시(山梨)현의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장인 사토 노부코(佐藤信子) 씨가 한국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를 통해 부강면 곽창록(82, 부강향토사 연구위원) 씨에게 관련 내용을 우편으로 보내오면서 확인됐다. 앞서 는 지난해 8월 광복절 특집기사(8월 12일자)로 가네코 후미코를 다룬 바 있고, 같은 해 10월 19일자에서는 그녀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가네코 타카시(金子敬·외가쪽 친조카) 씨의 부강지역 방문을 지면에 실었다. 이 가운데 10월 19일자 가 곽위원을 통해 일본 야마나시현으로 전해졌으나, 결과적으로 백과사진 사진을 그대로 실은 본보의 보도는 두차례 모두 '잘못 알려진 얼굴사진'을 내보낸 셈이 됐다. 사토 연구회장은 곽위원에게 보낸 글에서 가네코 후미코의 진짜 얼굴 자료는 △수감 직전 연인 박열의 품에 안겨 책을 읽는 모습의 사진 △자살 직전 그녀의 동지였던 모치츠카 가츠라가 그린 초상화 등 단 두 점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책읽는 모습의 사진은 △어떻게 중대 범죄자가 감옥 안에서 밀회를 즐길 수 있는가 △또 어떻게 사진을 찍었고, 그것은 왜 외부로 유출됐는가 등의 여론이 들끓으면서 당시 와카쓰키 내각이 총사퇴한 바 있다. 그럼에도 동성동명의 잘못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 얼굴 사진이 일본 국내는 물론 한국에서도 계속 전파된 것은 1977년 일본의 잡지와 단행본들이 동명이인을 잘못 실으면서부터라고 사토 회장은 밝혔다. 실제 가네코의 마지막 초상화와 잘못 알려진 사진을 비교해 보면 전자 인물은 눈이 작고 안경을 착용한데 비해 후자는 눈이 크고 하관이 빠른 모습을 하고 있는 등 뚜렷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박열과 함께 찍은 가네코의 사진은 책읽는 동작에 얼굴이 반쯤 가려서 있어 세부적인 비교는 어려운 편이다. 현재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는 '박열의사 기념관'이 건립돼 있고, 그 내부에는 가네코 후미코에 관한 자료도 비교적 풍부하게 전시돼 있다. 그러나 이곳에 전시된 △야마나시현 일일신문(2004년 7월 23일자) △가네코 후미코 심포지엄 자료(2004년) △나시노키사의 가네코 후미코 관련 저서(2006) 등 일본 자료 모두에도 잘못 알려진 사진이 실려 있다. 곽위원은 "잘못 알려진 사진이 뒤늦게나마 확인돼 다행"이라며 "인터넷과 백과사전에 잘못 실려 있는 사진을 바로 잡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 조혁연 객원대기자
[충북일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가네코 타카시(金子敬·1944년생) 씨가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도움으로 지난 16일 세종시 부강면을 찾았다.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여인으로 잘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는 1912~1919년까지 7년 동안 부강에 거주한 바 있다. 그녀는 1919년 일본으로 귀국한 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됐고, 여기에는 부강에서의 조선인 탄압과 3.1운동 목격 등도 큰 영향을 미쳤다. 타카시 씨는 후미코의 외가쪽 친조카로 현재 야마나시현 소구마치에서 후미코의 생가와 시비를 관리하고 있다. 타카시 씨는 먼저 세종시 부강초등학교(교장 민방식)를 방문해 곽창록 씨로부터 후미코가 다녔던 부강심상학교와 그녀의 학창시절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어 후미코의 자전 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원제: 何が私をかうさせたか)에 등장하는 부강파출소(당시 일본 헌병대 자리)를 방문, 일대를 둘러봤다. 후미코의 수기에는 조선인이 매질을 당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서술돼 있다. '그중에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헌병대 건물이었다. 카키색 제복을 입은 헌병이 마당으로 조선인을 끌어내 옷을 벗기고 알몸이 된 엉덩이를 채찍으로 때리고 있다. 하나, 둘, 헌병이 새된 목소리가 들린다. 맞고 있는 조선인의 울름소리도 들려오는 듯하다. 그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광경이 아니다.'- 제국주의 권력의 폭악성은 그녀가 무정부주의가가 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는 이어 후미코가 7년 동안 생활했던 부강면 부강리 358번지를 방문,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후미코는 이 집에 양녀로 왔지만 사실상 식모생활을 하며 할머니·고모 등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온갖 학대를 받은 바 있다. 타카시 씨는 집 내부도 둘러보고 싶어했지만 현재 강 아무개 씨의 개인의 소유로 돼 있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부강역에서 다시 한번 감회에 젖었다. 부강역 건널목 철길은 학대를 견디지 못한 후미코가 1차 자살을 시도했다가 열차시간을 잘 몰라 성공하지 못한 곳이다. 또 부강역은 그녀가 7년의 핍박을 끝내고 일본으로 재귀국을 하기 위해 승차를 했던 역으로, 그녀 자전 수기의 백미가 쓰여진 공간이기도 하다. '-아아, 기차여! 7년 전 너는 나를 속이고 데려왔다, 그리고 나를 오로지 혼자 고통과 시련 속에 남겨두고 가버렸다. 그 사이 너는 몇 백 번 몇 천 번 내 곁을 지나쳤는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곁눈으로 흘끗할 뿐 말없이 지나쳤구나. 하지만 이번이야말로 너는 나를 마중 와주었다. 너는 나를 잊지는 않았던 것이다. 자, 어디라도 데려 가다오! 어서 어서 어디라도. 그냥 빨리 이 땅에서 데려 가다오!'- /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는 독립운동가 박열(朴烈·1902∼1974)의 연인이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23살의 짧은 삶을 산 그녀는 △요코하마에서 사생아로 출생 △한국 부강(구 충북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시)에서의 생활(1912∼1919) △박열과의 만남과 동거(1922) △관동대지진 때 치안법 위반으로 체포(1923) △천황 암살혐의 추가(1924) △옥중 자서전 집필 시작(1925) △박열과 옥중 결혼(1926)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목을 메 자살(1926.7) △박열 고향인 경북 문경읍 팔령리에 유골 안장(1926, 11) 등의 생애 마디를 지니고 있다. 이 가운데 부강에서의 7년 생활은 그녀 특유의 반항적 기질, 조선인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아나키스트로서의 사상 무장 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사학계는 보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그녀의 옥중 수기인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원제: 何が私をかうさせたか)를 바탕으로 부강 7년 생활을 재조명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모두 버림받았던 무적자(無籍者) 후미코에게는 미리 입국해 부강에서 생활하고 있던 할머니와 고모부부가 있었다. 이 가운데 고모부부는 자식이 없었고, 따라서 그녀를 이와시타(岩下) 후미코라는 이름으로 입적시킨 후 일본에서 부강으로 데려왔다. 이와시타는 고모부의 성(姓)이다. 이때 옥중 수기에 의하면 부강은 경부선 철길을 중심으로 고지대에는 부유층이 주로 살면서 '야마노테'(山の手), 그외 들이 발달한 낮은 지대는 '시타마치'(下町)라고 불렸다. 후미코 고모의 집은 이중 야마노테에 위치했다. 이 땅은 경부선 보선공이었던 고모부 이와시타 게이자부로(岩下敬三郞)가 미리 사둔 땅이었다. 후미코는 1912년 일본인만 다니는 부강심상학교에 입학했고, 대부분 과목이 甲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다. 그러나 할머니와 고모는 '밥상에 젓가락을 잘못 놨다'는 등 갖가지 하찮은 이유로 후미코를 구박했다. 이름도 이와시타 후미코에서 가네코 후미코로 바뀌었고, 이는 이와시타 가문입적을 취소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이들이 후미코를 부강으로 데려온 것은 양육보다는 쌀씻기·램프닦기·변소청소 등 노동착취에 목적이 있었다. 이때 후미코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 것은 부강 퇴메(台山)에 올라 금강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멋있는 부용봉이 멀리 저쪽에 솟아 있다. 그 산자락을 돌아 동에서 서로 가을 햇살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는 백천(白川)이 흰 비단을 휘감은 듯 천천히 흐르고 있다. 그 모래밭 위를 짐을 실은 당나귀가 께느른한 모습으로 지나간다. 산자락에는 나무 사이로 조선인 마을의 낮은 초가지붕이 띄엄띄엄 보인다. 안개 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조용한 마을이다. 남화(남종화 지칭)에 보이는 듯한 경치이다.'- 후미코는 이후 할머니 친척의 젖먹이를 업으려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손찌검을 당했고 끼니도 굶어야 했다. 그녀는 집앞 부강 철길의 자살 시도가 실패하자 조약돌을 주머니에 가득 채우고 "아, 모두가 이별이다! 산도 나무도 돌도 꽃도 동물도 이 매미소리도 모두…"라는 혼잣말을 하며 금강으로 뛰어들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할머니나 고모의 박정함이나 냉혹함으로부터는 벗어날 수는 있겠지. 그래도, 그래도 세상에는 아직 사랑할 만한 게 무수히 있다"라는 생각을 하며 자살을 포기했다. 1919년 4월. 나이가 차가자 할머니는 후미코에게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겉으로는 '시집갈 나이가 됐다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걸혼 비용을 대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어째든 후미코는 기뻐했고, 옥중 수기의 백미로 꼽히는 부분을 쓰게 된다. 경부선 기차가 부강역에서 남으로 막 떠나려 하자 그녀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아아, 기차여! 7년 전 너는 나를 속이고 데려왔다, 그리고 나를 오로지 혼자 고통과 시련 속에 남겨두고 가버렸다. 그 사이 너는 몇백번 몇천번 내 곁을 지나쳤는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곁눈으로 흘끗할 뿐 말없이 지나쳤구나. 하지만 이번이야말로 너는 나를 마중 와주었다. 너는 나를 잊지는 않았던 것이다, 자 어디라도 데려가다오! 어서 어서 어디라도. 그냥 빨리 이 땅에서 데려가다오!'- 그녀가 부강을 떠나기 직전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이 있었다. 바로 1919년 부강의 횃불 만세운동이었다. 그녀는 박열과 함께 체포돼 재판받는 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조선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 중에서 일본인에 대한 반역적 정서만큼 제거하기 힘든 것은 없을 것입니다. 1919년에 있었던 조선의 독립소요 광경을 목격한 다음 나 자신에게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으며, 조선 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습니다."- 1926년 7월 23일, 그녀가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목메 자살을 하자 가족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고 따라서 형무소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이후 일본경찰은 법적 남편의 고향인 경북 문경의 가족들에게 유골을 인도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후미코의 유해는 후에 이장돼 문경읍 마성면 박열기념과 입구에서 영면하고 있다. 그러나 22년 동안 일본 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했던 박열은 6.25때 납북돼 북에 잠들어 있다. / 조혁연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