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이 집단행동 중이다. 정부의 강한 압박에 의사들은 자신의 논리로 '대한민국 의료 정상화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서겠다.'는 명분으로 파업 중이다. 과거 여러 번 의사와 정부 간 힘겨루기가 되었지만, 환자를 방패로 의사는 늘 이겼다. 그래서 이번 일에도 별로 큰 걱정 없이 이길 것이라는 진단을 하며 의사 파업을 진행 중이다. 전공 수련 의사들이 중심된 파업이어서 사회에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전공의는 의사 자격을 획득한 일반의사가 전문의사 자격을 위해 종합병원에서 인턴 1년과 레지던트 4년의 수련을 거쳐야 한다. 수련을 마치고 총 26개 진료과목 중 자격시험에 합격한 의사가 합격한 과목의 전공의가 된다. 1+4년의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 시험에 합격해야 전문의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규모 수술이 가능한 종합병원, 대학병원에서 전문의사 수련받는다. 파업 동참 전공의, 수련의가 7천~8천 명이나 되는 규모가 의료현장을 이탈했으니 종합병원에서 수술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다. 이런 점이 의사들이 자신의 요구대로 정부에 압박하는 방법이었고 이미 수술 날짜를 받은 환자는 취소되거나 일정을 뒤로 밀리는 상황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환자가 아프다며 의사는 정부가 빨리 양보해야 의료현장으로 전공의가 돌아간다는 논리로 정부를 압박했다. 환자가 안 아프려면 정부가 의사의 요구를 들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해괴한 논리이다. 의사 정원을 확대하는 것이 의료의 질을 저하하고 국민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논리이며 수능 문제 몇 개 더 틀린 학생들이 의사가 된다면 의사의 질적 수준이 떨어지게 되며 결국 국민의 건강을 해친다는 의사의 논리는 지나가는 사람도 설득 못하는 의사의 이익을 위한 변명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린다. '법륜스님 행복학교'에서 2018년에 올린 콘텐츠 캡처본이 회자 됐다.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게 의사지, 돈 벌기 위해서 의사가 되면 어떡하냐"며 꾸짖은 내용이 나온다. 법륜스님은 "돈 벌기 위해 의사가 되니까 없는 병도 있다고 하고, 작은 병도 큰 병이라 하고, 수술 안 해도 되는 걸 해야 된다 하고, 이래서 과잉 진료가 되고 문제가 되는 것"이라며 "지금 공부 제일 잘하는 순서대로 성형외과로 지원한다는데 이게 무슨 의사에요? 미용사지"라고 일침을 가했다는 내용이다. 모두 돈에 미쳐서 세상이 돌아가니까 혼란스러운 것이다. 대중은 의사 파업은 돈을 위한 것으로 바라보는 중이다. 몇몇 의사는 장난으로 그들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과잉진료로 의사파업을 무시하는 일반인들을 혼내자는 이야기도 나왔고 이해하기 어려운 특수, 특권의식을 나타내는 이야기를 올리며 의사들끼리 환호도 했다. 그 중심에 돈에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의미가 있다. 아이를 돌보는 선생님, 주유를 하는 사람, 음식을 배달해주고 음식을 만들어주는 사람 모두 자신하는 일에 대한 신뢰 계약을 갖는다. 믿고 맡기는 사람들과의 신뢰가 지불하는 비용에 일정부분 포함되어있다. 사람 목숨을 담보로 자격을 획득한 집단이 이렇게 이기심으로 자신 권리를 주장한다면, 다른 모든 집단도 이기심으로 자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사는 군대와 같은 명령과 수행이 체계적이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다른 장르와 달리 실수에 대해서 의사에게는 책임을 묻기도 어렵게 되어있으며 범죄를 저질러도 직업회복이 여느 직업보다 수월하며 고수익이 보장된 직업이다. 자본주의의 경제력은 의사 집단을 묶는 큰 힘이다. 전공수련의들은 분명 위의 상급 의사들의 지시 없이 쉽게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예상처럼 벌써 의대 교수들과 학생들이 그들 미래 경제를 지키기 위해 똘똘 뭉치고 있다. 의대에 갔던 청년들은 오랜 시간 비인간적으로 수능 공부에 매달렸던 결실을 잃지 않을 것이다. 피해 본 환자를 위해서 금융치료나 법 치료를 처방으로 누군가 조언해 주었으면 한다.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나 이 독에 대한 사람의 치사량을 계산하면 4㎏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를 독살할 수 있는 막강한 독이라고 한다. 보툴리누스균에서 추출된 생물학적 독성 단백질 보툴리눔 독소이다. 이는 현재 인류가 발견하거나 개발한 가장 강한 독으로 평가한다. 청산가리 독, 복어 독인 테트로도톡신, 러시아발 뉴스에 등장하던 홍차 암살에 쓰던 폴로늄과 비교 자체가 의미 없을 만큼 비교 불가능한 강한 독이며 1㎖면 수천 명이 독살될 수 있다고 한다. 인류는 늘 이렇게 극적인 연구에 열광한다. 그리고 개발된 위험물질도 새로운 사용법을 찾는 것에 노력했다. 새로운 사용 방법은 독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들고 다니던 스마트폰 이전에 플립 핸드폰이 주로 사용되던 시대에도 있었다. 불과 30년 전에는 벽돌보다도 큰 핸드폰도 있고 집에서 무선전화기가 있는 집은 굳이 골목까지 나가서 집 전화를 받는 사용에 대한 새로운 촌극도 볼 수 있었다. 무선전화기의 효과를 어떻게든 알리고 싶어서 굳이 대문 밖에서 통화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집에 전화가 오면 형제들끼리 서로 전화를 받으려 뛰어가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기대하지 않았던 운동의 효과까지도 있었다. 사용 방법이 그래도 전화를 받는 것에 맞춰져 있는 방법이지만 또 다른 신박한 사용의 법도 있다. 특이한 사용의 방법은, 자신이 가진 경험과 새로운 기계의 융합에서 시작된다. 경험치가 적은 젊은이들은 쓰임에 대해 수용적 과학 물품을 사용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사용법을 안내서대로 잘 사용한다. 그러나 각자의 경험이 이미 고착된 기성세대는 아무리 발전적 첨단제품도 자신대로 해석하고 사용한다. 내 추억의 기억 중, 플립형 핸드폰 중에서 신기한 제품이 등장했다. 플립을 열거나 버튼을 누르면 핸드폰 사이에 숨겨진 안테나가 밖으로 쑥 올라오는 그런 기종이었고 밋밋한 핸드폰에 우주적 안테나가 스스로 나오는 자동 기능이 신기했다. 물론 지나치게 안테나를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다 고장 나는 일도 있었으나 자동 기능은 신기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젊었기에 이 안테나는 당연히 전파를 잡고 통화 품질을 높여주는 기능을 할 것으로 생각하고 안테나 역할 외에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기성세대는 자신 경험을 이용하여 다른 용도를 찾아냈다. 그렇게 찾은 용도가 자동안테나 귀후비개의 용도로 사용하는 어른들을 보았고 적지 않은 신기함을 경험했다. 자신 소개를 위해 제공하는 명함을 주면서 이쑤시개로 사용하지 말라는 소리도 했는데 당시에는 이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50이 넘어가니 명함의 빳빳한 종이가 치아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이에 남은 달콤했던 음식의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듯 새롭게 사용한다는 것은 사용자 경험이 수반되어야 빛을 발한다. 사람은 당연히 태어나서 죽는다. 이런 당연한 것을 진리라고 한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이런 진리는 성장기를 지나 노년기로 가면 피부, 장기 등 모든 곳에 문제점을 일으키며 노화된다. 이런 당연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새로운 용도로 찾은 것이 독이다. 아주 많은 곳에서 너무도 당연한 시술 정도로 여기며 단돈 몇만 원이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보툴리눔 독소이다. 처음 이야기했던 극소수의 점막에 흡수된 보툴리눔 독소가 성인 남성을 죽이는 데 필요한 질량은 단 1ng/㎏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린 이 독소의 사용 더 희석하여 보톡스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미용의, 더 젊은 미모를 위해 주입한다. 사용의 방법을 달리하면 살인의 독이 인류의 희망을 줄 수 있는 산업도 된다.
"그림자가 거꾸로 되는 것은 빛이 한 점에서 교차하고 그림자가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점에 있다. (景到 在午有端與影長 說在端)" "그림자는 빛이 사람을 비출 때 생기는데 화살을 쐈을 때와 같이 직진한다. 아래로부터 나온 빛은 사람을 향해 높아지고 위로부터 나온 빛은 사람을 향해 낮아진다. 발이 아래의 빛을 가리므로 발의 그림자는 위에 생기고 머리는 위의 빛을 가리므로 머리의 그림자는 아래에 생긴다. 원근이 있어도 빛이 모이는 점이 있어 그 때문에 거꾸로 선 상이 안쪽에 생긴다." 묵자는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를 이토록 완벽하게 설명해놓았다. 어두운 인조 암실을 만들어 하나의 구멍을 뚫은 뒤 암실 밖에 한 사람이 구멍을 향해 선다면 암실 벽에 거꾸로 된 사람의 상이 생긴다는 현상을 이렇게 서술한 것이다. 빛이 작은 구멍을 통과할 때는 화살처럼 직진하고 한 점에 모여진 빛이 교차하여 암실 벽면에는 반대로 맺히는 것을 정리했다. 묵자는 기원전 470~391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유명한 사상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겸애라는 사상으로 유명하다. 공자가 가족과 부모에 차이를 두며 사랑을 나눈 것과 반대로 모든 관계를 따지지 않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품으려는, 더 넓은 의미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폭넓은 사랑 못지않게 여러 과학적 자연현상을 정리하는 것에도 힘을 썼다. 묵자가 이토록 자연의 원리를 규명하려는 것은 자연현상이 일정한 특이한 경우에 생기는 것이지만 같은 환경에서 공평하게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고 이것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신호라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의 원리는 사람 간의 관계에 의한 해석의 어려움과 당면한 여러 관점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키는 근본이 될 것이라 했다.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것은 어떤 절대적인 현상을 통해 설명이 이루어질 때 더 효과적 신뢰를 줄 것이다. 이처럼 빛을 기록하고 연구하는 것은 절대적 신의 신호로 여겨지기도 했다. 서양에서 최초의 여성 수학자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히파티아(370~415)는 그의 아버지 테온에게 수학과 철학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30세가 넘어서 수학과 철학을 가르치는 플라톤학파의 책임자까지도 되었다고 하며 이런 학문의 배경으로 알렉산드라에서 가장 똑똑한 여성이라는 칭호까지 들을 만큼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철학과 과학적 배경에서도 이런 빛에 대한 분석과 자연현상에 대해 정리를 했으며 이를 통해 신비주의자들에게 이단의 철학을 가르친다는 비판을 들었다. 히파티아는 축적된 지식을 전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식을 형성하고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식별력도 가르쳐 주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그녀는 종교에 대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였으며, 새로운 진리를 배척하는 완고한 신앙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 삶을 종교가 지배하지 못하도록 가르쳤다. "무릇 모든 형식적이고 독단적인 종교는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어서 자존심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할 만큼 자신이 가진 지식과 철학에 확고한 관점이 있었다. 그녀 역시 빛에 대해 연구했는데 촛불이 작은 구멍을 통화할 때 촛불의 중심과 일직선으로 화면에 거꾸로 상이 맺히는 현상에 관해 연구하고 기록했다. 묵자나 히파티아는 우화나 신화에 의심하고 자연현상을 세밀히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연구가 살아있는 진리를 위해 결코 반박할 수 없는 결과를 제시할 수 있다 했다. 어느 정치인이나 정치 후보자들은 언론에서 파도 파도 훈훈한 미담만 나온다고 하는데 과연 사실인지는 의식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2천 년 이전의 선지자에게 배워본다.
충북예술인권리장전은 권리장전이라는 명칭을 수정하여 2013년 11월 18일 '충북예술인권리선언'으로 발표되었다. 본 선언식은 충북문화예술포럼 주도로 충북문화원연합회, 충북예총, 충북민예총 4개 단체 대표들의 공동 선언식이었으며 이를 통해 지역 문화예술인 스스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몸소 실천 의지에 대한 선언이었다. '예술은 인간과 자연이 표현하는 진선미(眞善美)의 실체이며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인간에게 기쁨을 준다. 또한 예술은 예술가와 향유자 모두가 주체이고 주인인 인류의 제도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천부적으로 주어진 예술권(藝術權)을 누리면서 언제나 예술적 행복(藝術的 幸福)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로 시작되는 권리선언은 총 10가지의 충북 사회와 사회구성원의 의무 그리고 문화와 예술을 표현하고 활동하는 데에 따른 예술가들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정리되어있다. 2022년 9월 25일 시행된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보다 10년 가까이 앞서 발표된 충북 지역 문화예술인 협력의 결과이다. 법에는 제3조(예술인의 지위와 권리), 제4조(예술인의 역할), 제5조(국가기관 등의 책무) 등과 함께 예술의 자유 침해 금지, 지원사업의 차별 금지라는 항목이 추가되어 과거 정권의 상황에 맞추어 차등 지원의 방법으로 예술계 길들이기라는 방법을 법적으로 차단하고 그런 시도를 한 사람에 대해서 법적 책임을 묻는 법령이다. 미투 운동 등으로 그간 관행처럼 된 부조리를 해결하고 이런 미투운동이 중심적으로 언론에 알려져 법의 다른 부분들이 소외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표현의 자유와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가 법령으로 명시되었다. 제3조(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에서 5항 '예술인은 국가기관 등의 예술 정책에 관한 정보를 받고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있는데 그간 예술계는 누군가가 설계해놓으면 그 설계를 해결하는 활동가로 요구된 것 같다. 특히 도시 재생과 같은 정부나 지자체 사업이 시행되면 예술은 사업의 속을 채우는 용역 하도급 업체와 같은 일을 하기 일쑤였는데 이젠 법률로 보다 보장된 자신의 역할 요구가 가능해진 것이다. '예술인권리보장법'과 '충북예술인권리선언'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국가 법령에는 예술인의 권리를 국가나 사회가 존중해주고 보호해준다는 의미로 정리되어있으나 '충북예술인권리선언'에는 예술가 스스로 예술창조를 할 때 유사 작품을 표절하거나 예술환경의 건전한 생태를 위해 노력하는 의무를 진다고 했다. 지원받은 예술지원 재정의 투명한 집행의 의무를 지며 스스로 예술적 차별하지 않도록 문화 다양성 기조를 유지 해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의지해서도 안 되고 스스로 자발적인 지역문화 예술환경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예술인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충북도의 예술권리선언이 국가 법령보다 의미 있는 것은 주체가 예술가 스스로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권리를 보장받으면 의무도 생긴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지역예술가 스스로 권리를 받기 위해 우리는 이런 예술가가 되겠다는 선언은 법보다 우선인 관습을 스스로 만든 것에 의미가 있다. 지역의 문화원, 예총, 민예총과 같은 4개의 문화예술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함께 했다는 그것만으로도 지역 문화예술의 힘을 보여준 것이다. 음이 낮다고 문제가 되거나 높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낮고 높다는 음은 주변의 다른 음과 함께 어울릴 수가 있는지가 중요한 요소로, 관계를 통한 자신 음높이를 말해주며 중요한 점은 서로 어울리는 음으로 조화가 이루어지는 가다. 10년 전에 만들어진 예술인권리선언에 어떤 화음을 갖게 할지가 이제 지역예술가들과 단체의 숙제이다.
한국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6년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통치를 당했다. 일제강점기로 불리는 한민족의 수난 시기였다. 몇몇은 이때 많은 기회를 얻어 오히려 이때를 그리워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의 지배를 받으며 기회를 얻는다고 한들, 일제 통치 속 부귀를 누렸다고 일본인 만큼 대우받지 못했다. 경제 풍족한 머슴이라고 머슴이 아닐 수는 없다. 황국신민화 정책은 일제가 세운 새로운 목표로 시작되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하나라 주장하며 한민족의 문화를 일본문화로 바꾸려 했다.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제7대 조선총독으로 있었던 미나미 지로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에서 1939년 인사말을 남겼다. "내선일체는 반도 통치의 최고 지도 목표이다. 내가 항상 역설하는 것은 내선일체는 서로 손을 잡는다든가, 형태가 융합한다든가 하는 그런 미적지근한 것이 아니다. 손을 잡은 것은 떨어지면 또한 별개가 된다. 물과 기름도 무리하게 혼합하면 융합된 형태로 되지만 그것으로도 안 된다. 형태도, 마음도, 피도, 육체도 모두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이러한 노력을 받들어 기구를 재편한 단체가 국민총력조선연맹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에 결성된 비정부 기구이자 관제 단체이며 1940년 10월에 발족되어 1945년 7월 10일 해산되었다. 주된 활동은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에 역점을 두었다. 황국신민화의 이름을 줄여 만든 것이 국민학교이다. 황국=일왕의나라, 신민=새로운 국민이란 뜻인 황국신민은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꿔가며 철저하게 조선의 문화와 거리를 두었다. 이렇게 거리를 두려는 목적은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독립의 의지를 꺾는 것과 동시에 전쟁으로 필요한 인력, 물자 등을 수월하게 유지하려는 방법이었다. 조선을 일본화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 신사를 두고 참배를 강요했다. 이와 함께 일왕이 거처하는 도쿄를 향해 아침마다 절을 하도록 했다. 교육을 통해 이름에서부터 교육, 정신 등 모든 언어와 행동 양식을 일본화 하려고 했다. 정신의 자발적 복종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당시에 일본이 패망 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기에 많은 조선인은 자발적 세뇌가 되어갔다. 한학을 공부하는 서당의 교육방식이 학교에서 학습을 한 사람과는 분명히 달랐고 사회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조선의 교육 방식으로는 해결이 안 되었다. 현대교육에 독립운동가들이 힘을 쓴 것은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자구적 노력의 행동이었다. 교육과 다르게 정신의 식민지화도 일제는 중요시 생각했다. 그렇기에 일제는 1군에 1개의 신사를 두게 하였고 1면에도 1신사를 짓기 위한 계획을 하였다. 작은 단위의 면에 신사를 짓지 못할 때 학교를 중심으로 신사참배와 궁성요배를 강요했다. 언제 왔는지 모르는 봄처럼 갑자기 조선에 해방이 왔다. 해방 후에는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지역에서는 신축된 신사를 자발적으로 해체하였다. 충청북도 괴산군 사리면 방축리에도 신사가 있었는데 해방 후 사리면 청년들이 현 사리우체국 뒤편에 있던 신사를 불 태웠다고 한다. 해방 후 한국전쟁으로 정신없던 시절이 지나고 1956년 지역주민들과 함께 신사의 석물들을 면사무소로 옮겨놓고 다른 용도로 석물들을 사용했다. 신사에서 참배자가 손을 닦거나 입을 가시기 위해서 물을 받아두는 테미즈야(てみずや)로 추정되는 석물을 면사무소 분수대로 재사용하고 있다. 이런 것 처럼 1945년 광복이 후 대다수의 신사는 해체되고 파괴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억눌림의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일제에 충실하게 머슴으로 살던 지역 유지들이 주위의 눈치와 자신 생존의 방법으로 더 극렬하게 일제에 대한 부정의 모습을 보였지도 모를 일이다. 일제의 신사가 있던 터에는 지역민의 정신을 앞세운 반대 석조물을 계양했다. 보훈 공원과 애국선열추모비로 신사의 기억을 없앴으며 이렇게 조성된 공원의 명칭을 삼일공원, 충열공원 등으로도 불렀다.
지도하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산자 김정호 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다. 어떤 신화를 만들기 위해 한반도를 빠짐없이 다니며 지도를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많다. 교통이 지금과 다르므로 많은 시간과 수고로 모든 길과 지역을 다니기는 불가능했다는 것이 이유이다. 1804년 황해도 토산에서 태어난 김정호는 지도에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다양한 지도 제작에 참여했다는 기록을 본다면 김정호는 몰락한 양반이라 부르는 잔반(殘班)이나 중인 계급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양반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부유하지 못하거나 성균관 진사가 되지 못하는 양반을 잔반이라 불렀는데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선비를 숭상하고 장사하는 일을 아래로 여겨 양반은 농사는커녕 장사조차도 맘 놓고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양반은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그래도 양반이 남 체면을 덜 타고 집안에서 노동하며 돈벌이할 수 있는 일이 자리 짜기였다. 영조 때 선비 김낙행은 일은 안 하고 글공부하는데 별다른 성과를 못 만들어 내자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히게 된다. 아내가 일하라며 자리 짜는 법을 가르쳐주자 할 수 없이 자리를 짜게 되는데 차츰 자리 짜는 일에 재미가 생겨 평생 자리 짜는 일을 하겠다는 선언까지 하게 되었고, '직적설'이라는 자리 짜는 다섯 가지 이로움에 대해 글로 정리하기까지 했다. 1. 자리 짜기는 노동하기에 공짜 밥을 먹지 않는다. 2. 집 밖으로 공연히 나들이하는 일이 줄어든다. 3. 무더운 여름날 졸음을 잊을 수 있다. 4. 공연한 근심거리에 마음 쓰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5. 잘 짠 자리는 늙으신 어머니께 올릴 수 있고, 좀 거친 것은 아내나 아이가 쓸 수 있고, 또 어린 계집종에게 주어 흙바닥에서 자는 것을 면해 준다. 그리고 남는 것이 있으면 살림살이가 딱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는가. 양반도 결국 사람이라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이 중요했고 그런 문제는 실용주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김정희는 지리를 통해 실용주의적인 접근을 한 사람이었다. 1834년 이전부터 동여편고(東輿便攷) 2책을 편찬하고 청구도(靑邱圖) 2책을 편찬했고 동여도지(東輿圖志) 22책을 편찬했다. 그중 대동여지도는 김정희 역작이었다. 대동여지도에 기록된 모든 곳을 직접 다니긴 어려웠다면 참고를 한 것이 있을 것인데, 이는 당시 해당 지역의 관찬 지도와 '가장지도'(家藏地圖)를 참고하였다고 생각된다. 가장지도는 지역 유력집안에서 소유의 임야나 농경지를 표시하는 지도로 유력집안의 재산을 나누는 근거이므로 산이나 강 등에 정확한 측량을 하려 노력했고 그런 노력의 지도가 김정호의 참고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김정희의 지도에는 여러 문헌을 연구하고 이를 집대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지도가 땅의 모양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지리와 역참, 봉수, 산성 등 다양한 기록도 남겼다. 지도유설(地圖類說) 김정호의 기록에 의하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국방상의 요충지를 잘 알아야 하고, 재물과 세금이 나오는 곳과 군사를 모을 수 있는 원천을 잘 알아야 하며, 여행과 왕래를 위해 지리를 잘 알아야 하므로 지도를 제작한다고 하였다. 또 세상이 어지러우면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사나운 무리를 제거하는 데 지도가 쓰이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지도가 소용된다고 하였다. 지도의 효능은 국가를 부흥하게 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기초 자료라는 것을 말해준다. 삶도 더 높은 곳에서 본다면 먼 미래까지 생각하게 할 것이다. 아웅다웅하며 눈앞의 현실에 울긋불긋한 것에 반성을 주는 것이 지도이다.
생명이 태어나면 유아기를 거쳐 성장의 시간을 보내다가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를 지나 사멸한다. 모든 생명은 대략 이런 과정으로 생애를 마친다. 생애주기에서 유아기 때는 미성숙의 단계이므로 많은 관심, 배려가 있어야 정상적 성장이 가능하다. 사람보다 생애주기가 짧은 개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다. 강아지가 태어나면 어렸을 때가 예쁘다고 대략 1달 정도 지나면 분양한다. 외국의 경우는 90일 정도 이후에 분양한다고 하는데 외국이면 한국을 빼고 전부가 외국이니 어떤 외국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동물 습성을 존중하는 외국에서는 3개월 정도 후에 분양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외국이라는 모호한 해석은 서쪽, 북쪽, 남쪽 혹은 동쪽 인지? 어느 방향의 외국인지 알기도 어렵다. 어찌 되었든 한 달도 안 되어 개를 분양하는 점의 문제점을 외국의 선진 사례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에는 올바른 분양이 아니라는 점에 방점이 있다. 개도 유아기에 어미 젖을 떼고 이유식을 먹으면서 어미의 행동을 모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성장의 과정에서 부모 교육을 통한 학습은 사회성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 개인들이 모여 이뤄진 사회에서는 보편적 행동에 대한 이해력이 필요하다. 교육은 주변 환경 자극에 대해 관찰할 수 있는 행동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분석하고 학습과 교육을 통해 사회에 맞는 방법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교육으로 개개인은 예측할 수 있는 행동을 하며 이는 곧 사회적 비용을 줄이며 사회 통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런 것을 굳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통제를 보편의 의미보다는 개개인 특수성을 중심으로 접근할 때 교육제도와 학습에 대한 문제점 차이가 나타난다. 일반적인 피교육자는 일반적인 교육시스템으로 도덕과 관습을 이해시키기 가능하지만 모든 대상이 통제권에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특수교육 아동에 대한 교사와 학부모 간 문제가 되어 사회를 시끄럽게 한 주호민 웹툰 작가의 사건이 뉴스에서 연일 확대되고 있다. 교육에 대한 통제가 제도를 일방적으로 주입하여 기계 같은 사람을 만드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제도라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예측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기 위한 보편성을 주입하는 방법이다. 그렇기에 교사의 교육 방법이나 방식은 교사 개개인의 지침보다는 교육시스템의 지침을 중심으로 교사가 상황에 맞도록 해석하고 교육하는 것이다. 이런 교육의 신뢰 중심은 당연히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중심이다. 그러나 주변 관련 없는 사람의 의견이 가미되었을 때 교사와 학생의 상황은 왜곡되고 곡해된다. 교육은 교사와 학생 신뢰를 통해 학습되어야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다른 방법과 해석으로 전혀 교육과 무관한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웹툰 작가 주호민의 사건은 그렇게 자신 처지에서 하는 주장, 방송에 나오는 유명인들의 입장과 ‘키보드 워리어’라는 쓸데없는 관심에 열정적인 다수의 사람에 의해 사건이 확장되었다. 이 사건은 조용히 묻힐 수도 있었으나 그간 교육계에서 생겨난 교권 침해사건과 연계되어 더 큰 논쟁이 되었다. 서초초등학교 젊은 20대 교사의 자살로 악화한 교육자와 학부모, 학생 간의 대결적 관점으로 증폭된 상황에서 주호민 자녀의 사건은 다시 수많은 관심을 일으켰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누구의 잘못을 논할 이유도 없다. 다만 어미 개 역시도 강아지 육아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때 강아지가 올바른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미 개의 행동 모습이 발라야 한다. '수신제가(修身齊家)'가 교육계에 대한 요구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
나오시마란 섬이 있다. 과거 쓰레기 섬이라 불리며 주민들은 불편하게 살았고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찾지 않는 섬이었다. 그러나 이 섬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섬 중 하나가 되어있다. 단순히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며 눈앞에 점들이 떠다닌다는 유명 미술가의 작품 때문만은 아니며, 풍광이 아름답고 기후가 좋아서도 아니다. 유명해진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여러 요인이 모여 함께 만든 것이다. 나오시마는 인구 3천 명의 작은 섬이다. 면적은 8㎢로 여의도 정도 크기의 섬이다. 1917년 미쓰비시 중공업이 구리 제련소를 세우면서 발전했지만, 중금속 제련에서 발생 되는 각종 중금속 폐기물로 인해 섬의 환경은 파괴되었다. 중금속 오염은 철보다 무거운 중금속이 환경으로 배출되면서 생겨나는 오염이다. 중금속 오염의 대표적인 피해 사례로는 미나마타병과 이타이이타이병을 들 수 있다. 미나마타병은 공장에서 배출한 수은에 중독된 물고기를 먹은 사람의 몸에 축적되어 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병이 생기면 말초신경, 운동신경, 시신경 마비 등으로 나타나며 정상적 활동이 불가능하게 된다. 1900년대 초기에는 산업의 발전에만 관심이 있었지 환경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금속 제련의 유행이 지나고 산업의 변화로 더 이상 나오시마는 오염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환경 폐기물이 가득한 쓰레기 섬으로 남게 되었다. 도쿄에서 근무하던 후쿠다케 소이치로는 갑자기 군소도시인 오카야마시로 오게 된다. 아버지의 유산으로 가업을 승계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골 도시의 답답함에 불편했지만, 거기에서 대도시와 다른 인간적인 면을 보게 되고 이런 영감을 담아 회사명까지도 바꾸게 된다. 베네세로 약칭해서 부르는 이 회사명은 라틴어 Bene(잘)와 Esse(살다)에서 유래했다. 더 함께 다 같이 잘 살자라는 의미로, 기업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넘는 가치를 추구하고 이룬 가치를 많은 이들이 함께 나누기를 원했기 때문에 바꾼 것이다. 1980년대 이미 섬의 절반 가까이 매입하고 예술 박물관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1997년 나오시마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더 어려운 처지가 되었고 후쿠다케 회장은 안도 다다오 건축가와 함께 이 섬을 예술 섬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이때 만든 것이 이에프로젝트이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는 섬 곳곳에 빈집을 만들게 되었고 마을 곳곳에 있는 빈집은 마을 자체를 황폐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빈집 7군데를 유명작가들과 협력하여 미술관과 같은 집을 만들었다. 이곳을 관리하고 운영은 지역주민들이 하고 있으며 지역주민과 지역 미술관의 상생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나오시마 섬은 3천 명의 인구지만 연간 방문객은 50만 명이 된다고 한다. 1인당 3만 원의 소비로 계산하면 150억 정도의 매출이 생긴다고 하는데 이런 계산이 맞는다면 특별한 산업시설 없이도 예술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섬의 특유한 폐쇄성은 이곳에서 선박 운항 시간에 맞추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곳에서 사용되는 소비의 예상 수치만 보더라도 지역경제의 상당히 많은 이익이 될 것이다. 이런 이익은 결국 지역주민의 생활과 섬의 환경에 영향을 끼친다. 문화와 예술 활용을 높이기 위해서는 불편을 감수하는 방법을 길러야 한다. 인내와 불편에 크게 반응하는 오늘의 사람들을 보면 나오시마 섬과 같은 한국의 시도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안도 다다오 만큼 훌륭한 건축가가 없거나 좋은 기획자, 예술가가 없어서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불편하고 덜 화려해도 자세히 보는 여유와 본 것을 마음에 담고 곱씹어 사고하는 문화적 자산 없이는 뭐든지 실패한다. 기획자는 주민을 주민은 예술가를 고려하고 진행된 나오시마 예술 섬의 시도는 그래서 세계 7대 섬이 된 것이다.
형(兄)은 먼저 태어난 가족관에 순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가계 존속의 의미로 나이에 따른 수직적 구조 조율 속에 우선순위를 나타내는 생물학적 우열을 칭하는 제도이다. 유교 사회에서 적출이라는 개념을 설립했다. 적출은 혼인의 관계에서 배출한 자녀를 뜻하는 것이다. 혼인의 출생자 중 적법한 상황에서 낳은 출생자를 뜻하기도 하지만 과거는 아들을 중심으로 적출을 논했다. 재산분배의 상황에서 아들 간 구분하여 재산을 나누기에 부담이 되니 아들에 의한 재산 양도에 대한 문제가 관습과 제도로 정리된 것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장자가 집을 계승하며 차남 이하는 혼인 후 부모와 동거하다 분가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노동 집약의 농사가 중심이었던 사회에서는 가족 구성원은 곧 노동 인력이었기에 가족 단위로 필요한 노동력을 서로 나누며 살아갔다. 분가는 우리말로 하면 작은집이라는 뜻이다. 큰아들은 부모를 봉양하기 때문에 장자직계가족제도(長子直系族制度)를 중심으로 상속제도를 운영했다. 부모를 장자가 모시는 것이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고 장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평등한 대우 속 차남 이하의 적출에게 부러움을 받았다. 여기에도 경제의 개념이 들어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대를 물려 집안을 유지해나가기 위한 각자 생존의 방식이 묻어있다. 여기에서 소외된 것은 여성의 역할이다. 단순히 장자나 아들을 생산하는 것뿐 여성들에게는 재산의 대물림에 대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다면 논의가 안 되겠지만 재산이 많아서 분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면 가족 구성원 간 곤란한 일이 발생한다. 단순히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모든 재산분배에 관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분배를 배제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남녀에 대한 같은 자식으로 법적 권리를 갖도록 현대 사회에서는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과거 어느 집안의 상속문서를 본 일이 있었다. 1500년대 조선의 문서였는데 그 문서에는 아들과 딸에 대한 고른 재산 배분을 명시했다. 양반 집의 고문서였지만 당시 일반적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도 장자에게만 재산을 분배한다는 원칙은 상황에 따라 달리 볼 수도 있었고 딸 에게도 고르게 분배한 것으로 보아 본인 의지대로 해도 사회 통념에 반 한다고 보기 어려웠던 것 같다. 평민에게는 별반 중요한 일이 될 수 없었겠지만, 왕과 같은 한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서 장자는 더 큰 책임과 권리를 가졌다. 정실(正室)에게서 난 자식이라는 뜻의 적통(嫡統)은 일부다처의 사회에서 집안 유지의 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조선에서 장자 승계는 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도덕 원칙이었다. 그런데도 26명의 태조 이후 왕에게 장자로 승계한 경우는 단 9명뿐이다. 의술이 발달 못해 유아의 사망이 많다고 해도 장자계승이 30% 정도밖에 안 되었다. 조선의 왕도 그러했는데 민간에서 아직도 적통 운운하는 것은 의미 없는 요식행위일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은 성리학의 국가였다. 주자는 성과 리가 같다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했다. 성(性)을 순수한 이인 본연지성과 이기가 섞인 기질지성의 두 가지로 보았다. 타고난 본성인 '리'가 만인이 따라야 할 보편적 도덕 원리인 본연지성을 형성하고, 다만 인간의 기질의 상이함에 따라 현실로 구현된 성인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사람마다 달라져 사람들의 개성, 열등함과 우수함이 나뉘게 된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인간끼리의 차이를 차별로 인정하고 이를 통한 제도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런 내용이 점점 굳어지어 신분제의 기틀로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차별하는 시대를 넘어 동물이나 식물에 대해서도 고통을 주면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먼저 태어난 경험을 존중하고 새로운 미래를 협력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적응 못하면 뒷방으로 넘어가야 한다.
과거의 일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을 역사 history라고 하는데, 본연의 뜻은 과거를 탐구하고 서술한다는 것을 뜻한다. 어원은 그리스어인 이스토리아(istoria)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라틴어 historia, 고대 그리스어 ·στορ·α (historia, "연구를 통한 학습"). 역사는 독일어의 게시히테(Geschichte)의 어원인 geschehen(일어나다) 처럼 과거에 일어난 사실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의 관점을 중심으로 기록되기 때문에 기록에 매몰되어 해석하다 보면 시간의 거리만큼 차이를 만든다. 과거 일어난 사건의 기록 역시도 기록자의 관점에 따라 확실하게 구분되기에 기록에만 의존하여 모든 것을 단정 지으면 사실과 다른 결론이 될 위험에 있다. 그렇다고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해석하여 역사를 오독하는 경우는 더 난처한 일이 된다. 예를 들어 '조선의 왕은 여러 여자를 부인으로 두었기에 난봉꾼이다.'라는 해석은 역사적 사실을 기준으로 했지만, 현대 해석으로 오독 하게 되는 경우다. 글과 같은 고급의 기록문화도 있으나 사물, 구전, 설화 등과 같은 민간이 중심이 되는 기록들도 존재한다. 민간에서의 기록은 역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나 당시 사람의 삶을 돌아보고 다수의 풍습을 생각해보는 귀중한 자료다. 올바른 역사를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글로 정리된 고급 기록뿐이 아니라 삶의 습관, 풍습의 기록도 함께 살펴봐야 더 과거를 잘 이해할 수 있다. 2012년 7월 중앙정부의 신행정수도 정책에 의한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되었다. 거대한 국가 시책 앞에 지역 작은 역사는 흡수되어 사라지기 쉽다. 과거 세종은 삼국시대에 백제 영역이었다. 세종 지역은 구지현(仇知縣)[전의면·전동면·소정면 일대], 두잉지현(豆仍只縣)[조치원읍·연동면·연서면·연기면 일대], 소비포현(所比浦縣)[금남면 일대] 등의 행정구역으로 존재하였다. 부강 옆의 연동면은 두잉지현에 속했다. 두잉지현은 백제 패망 후 부흥군이 격렬하게 저항운동을 펼친 지역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기 지역을 백제부흥군의 주요 거점이던 주류성으로 예상하였다(세종시, 세종의 역사 중). 과거도 그렇지만 오늘에도 교통의 요지는 군사, 교육, 상업 중심이 된다. 교통의 요지는 다양한 이야기가 모이는 곳이며 이야기가 퍼지는 곳이다. 자연히 사람의 왕래가 많으면 시장도 형성되고 경제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그렇기에 역은 중요하다. 역 주변에 학교가 생겨나는 것은 오래전부터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민족의 특성이 들어난다. 중국 심양에 갔더니 방문한 한국인들 기분 좋으라고 한 것 같았지만 나름 뿌듯한 한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침에 마당을 쓸고 있는 집은 한민족이고 마을에 학교를 설립하는 민족은 한민족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만큼 한국 문화는 교육이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연동에서도 내판리는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이다. 조선시대에도 이곳은 신원이라는 역원이 설치되었다고 하니 과거에도 교통의 요지였을 것이다. 내판역은 1924년 개설되었고 2008년 폐역이 되었다. 오랜 역이니 만큼 전설도 전해 내려온다. 내판역의 열차 홈으로 나가면 큰 수양버들이 있었다. 이 나무는 병자호란 시기에 내판까지 당도한 청나라 군사에 의해 마을의 의병과 아낙들을 죽여 내판역에 묻었고 이후 시체더미에서 버드나무가 자랐다. 나무는 자라서 꼭 머리를 푼 여인처럼 축 늘어져 내판역 안마당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병자호란 이후 내판에 과부가 많아서 지어진 이야기라고 한다. 지금은 나무를 베어버려 자취도 찾기 어렵지만 동네의 이야기는 이렇게 지역을 탐구하고 서술된 결정판이다. 기능을 상실하여 사라져가는 초라한 폐역을 보면서 기능을 다 했다고 부수고 더 멋진 최신의 유행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폐역 앞에서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등학교에서 지역의 역사를 함께 탐구하고 서술하면 작은 동네라도 문화적 역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동남지구 아파트 숲에서 월운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초라한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좁은 길이라 차량이 서로 양보해가며 다니는 길이지만 버스가 다니는 도로다. 현재는 상당경찰서와 동남지구 아파트가 들어온 뒤 새로 생겨난 넓은 도로에 밀려 더 작아진 듯 보이는 도로 가에 이 비석은 위태롭게 서 있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비석으로, 뭐라 쓰여있는지 알기 어려울 만큼 마모가 심하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비석의 유래는 옆에 기록되어 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효자양수척지비(孝子楊水尺之碑)라고 쓰여 있다. 양수척은 조선 시대 천민계층의 하나로 목축, 도살, 유기업 등을 하던 천민으로 후에 백정으로 불리기도 했다. 말타기에 능하고 유랑을 하면서 다니던 사람들로 일반 정착민들과 결혼도 잘 하지 않았다고 하니 지역 주민 사이에서 평판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언제 도적으로 변할지도 모르고 산으로 도망가면 잡을 길도 없어서 무섭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천민의 비석이 세워진 것은 당시 사회에 필요한 기념적 이야기가 있어서이다. 양수척, 사람 이름은 아니지만 사람 이름처럼 들리는 이 양수척은 천민의 계층이어서 당연히 배우지 못하고 본능대로 살고 이름도 없었다고 한다. 기록에는, 동네에 양수척 삼형제가 살았고 그들에게 효를 가르쳐준 사람은 남일면 효촌리에 살던 남계(南溪) 경연(慶延, 1522~)이었다. 서로 동시대를 살았으니 양수척 삼형제도 1500년 초중반의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로 생각된다. 양수척 삼형제는 운동동 비선 거리에서 두 아우와 살고 있었다. 주위에 평판이 좋지 않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으나 효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병에 들어 병시중해야 하는 처지가 되니, 각기 책임을 지기 싫어 결국 고려장으로 어머님을 보내려 하게 되었다. 인근 남일면에 살던 남계 경연 선생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삼형제를 불러 꾸짖고 가르쳤더니 이에 형제가 감명을 하여 그 후 노모를 잘 모셨다고 한다. 이렇게 건조한 내용으로 비석이 세워질 리는 없으니 신비한 전설도 가미가 되었다. 모친이 중병으로 사경을 헤매니 형제는 급히 청주성으로 가서 약을 지어 어머니께 돌아오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홍수로 물이 불어 월운천을 건너지 못하게 되어 이를 한탄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게 되었다. 그때 자연의 희한한 조화로 하천의 물이 갈라져 형제는 천을 건너 무사히 어머니의 병을 치료했다는 전설이다. 당시에 월운천이 얼마나 폭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는 쉽게 건널 만큼의 개울인데 실감 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전설을 믿고 천민 효자 형제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았다. 양수척 삼형제를 일깨운 효자 경연은 숙종이 비석까지 세워줄 만큼 효자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경연 효자비(慶延 孝子碑)는 효촌이라는 지명이 유래 될 만큼 남일면의 자랑이었는데 당시에도 그런 소문이 30리도 안 떨어진 운동동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조선의 통치는 중앙집권이기는 하나 교통의 발달이 덜 되어서 지역 자치로 운영이 되었고 그 운영의 기본은 국가에 충성하여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와 사명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이는, 가시적 의무와 사명이 바로 효였다. 그러므로 사대부의 효 이야기는 비석으로 잘 기록해 놓았다. 부모를 잘 봉양하는 효자, 효녀들의 이야기는 결국 국가에 충성하는 아버지 같은 왕을 잘 모시라는 것이다. 백성은 지역 사대부를 잘 모시라는, 보이지 않는 다단계적 세뇌였다. 사대부의 훌륭한 활동을 보면서 일반 백성보다 타고난 혈통, 품성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그 활동을 왕이 내려준 비석으로 인해 넘을 수 없는 백성의 한계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도 천민 양수척 삼형제의 이야기 비석은 새롭다. 인간에 대한 도리라는 새로운 관점을 줄 수 있는 비석으로 생각된다. 이는 양수척 삼형제의 효자비가 신분을 넘어 오히려 백성과 사대부를 계도 할 수도 있는 인간 삶의 방식을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겸손하게 만들어진 초라한 비석이지만 좋은 돌에 새긴 여느 비석보다도 소중한 우리 문화의 자산이다.
물은 언제나 출렁인다. 흐르는 물 아래 돌이나 기타 물길을 거스르는 것이 있다면 요동친다. 주위 물들이 합류하여 양이 많아지거나 협곡이 좁아지는 영향을 통해 물은 양을 조절하고자 수위가 올라가기도 튀기기도 하며 자신의 양을 상황에 맞춰나간다. 오랜 기간 물이 자리를 잡으면, 보다 유유히 흐른다. 더 이상 물길을 거스르지 않으므로 그 수량에 맞도록 흐르는 것이다. 이런 물의 성향을 보고 물을 건너기 위해 인류는 배를 만들었다. 나라마다 물의 흐름도 다르므로 우리나라는 우리 물의 흐름에 맞도록 배가 발전되었다. 조선의 배는 저판(제일 밑바닥의 나무판)을 아래에 평평하게 두는 판옥선의 형태였고 수평의 판은 승객이 배 위에서 이동하기 수월했음을 고려했다. 이런 목선은 물 위의 사람의 편안함을 고려했을 것이나 파도의 출렁이는 상황을 고려하거나 속도를 높이는 것에는 어려운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습관적으로 이전부터 그래왔으니 용도에 맞도록 크기 변화에만 신경 쓰며 배를 만들어 운용했다. 이양선(異樣船)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이상한 모양을 가진 배를 뜻한다. 판옥선과 같은 납작한 바닥을 가진 배가 아니라 서구식 함선이나 상선을 보고 그 크기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배를 보았던 우리 조상은 거대한 범선을 보면서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도 휩싸였을 것이다. 여름·가을 이래로 이양선이 경상·전라·황해·강원·함경 5도의 큰 바다에 출몰하는데,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 없었다. 어떤 배는 뭍에 올라 물을 길어 가기도 하고, 고래를 잡아먹기도 하였다.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이 많았다. -"헌종실록" 함경감사 조병준이 "저 사람들(러시아인)이 덕원부 용성진과 대흥부 대강진에 이르러 포를 쏘아 객사의 백성이 죽고 저들의 배가 때도 없이 오고 감을 낱낱이 들었는데, …… 객사의 백성이 탄환에 맞아 죽은 데 이르러서는 전례에 없었던 일이다"라고 하였다. -"철종실록" 격퇴할 능력이 없었던 조선의 관리들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와 일본이 서양 세력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 이는 더 큰 두려움으로 이양선을 보게 되었다. 노를 젓는 배에 익숙한 조선에서 연기를 품으려 움직이는 화륜선(火輪船) 증기기관 배는 미지의 세계에서 온 절대적 힘의 문명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것에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교차 되어 생긴다. 알고자 하는 것이 더 크다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일 것이지만, 두려운 마음이 더 크다면 회피하게 된다. 육지에서 숨을 쉬며 사는 인류는 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주변의 도구를 이용하여 숨을 쉬며 물을 건너는 것도 단순히 물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계절의 변화와 기상의 변화를 예측해야 하는 고도의 경험이 압축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두려움을 이기고 호기심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면 그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열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슬에 묶인 누렁이는 자신이 아프면 약을 주고 목마르지 않게 물과 밥을 주며 일 년 내내 잘 돌봐주는 주인을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며 살고 있다. 가끔 사슬을 풀어놓아도 도망가지 않는다. 누렁이에게 현실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복날이 되고 주인은 누렁이를 잡아먹었다. 주인에게 누렁이는 복날에 먹을 음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실을 경험에 비추어 완벽하게 맞추어 살다 보면 고기가 될 수 있다. 자신에 묶여있는 사슬을 스스로 풀고 나가지 않으면, 편히 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삶을 마감할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래서 늘 깨어있는 사고가 필요하다. 그 깨어있는 사고는 두려움 뒤에 있고 호기심은 열쇠가 될 것이다.
내가 원한 적이 없었던 '지구촌은 한 가족'이라는 주제는 이데올로기(집단 신념) 문화적 산물이다. 지구촌의 관점으로 모든 것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되면, 지역에서 누군가가 바라보는 것도 곧 세계라는 모호한 논리는 결국 비논리로 결론된다. 중앙에서 다수에 의한 시점 정리로 본다면, 지역 관점이 세계의 관점보다 멀 확률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폭력적 획일 시각의 이데올로기는, 도시를 떠나 점차 지역으로 확산, 전파되고 지역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유행과 같은 첨단이며 빠른 지구촌의 관점은 지역을 이해하려는 상황이 아닌 그냥 문화식민적 사고로써 지역이 따라야 하는 일로 대한다. 지역인은 각자 의견의 관점이 있고 그것이 꼭 세계적일 필요가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이런 유행을 따르지 않았을 때는 가차 없이 촌스러움으로 결정지어진다. 문화식민적 사고는, 국제적이라는 명분으로 잣대를 대고 지역에서 만들어 낸 결과를 세련과 촌스러움으로 나누는 방법으로 사용한다. 그렇기에 지역의 표현은 각자 지역에서 지역에 맞게 진화되더라도 결정을 지을 필요 없이 오랫동안 꾸준히 진행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이런 방법이 문화식민적 관점을 극복하는 시도가 되고 지역 정체성을 하나씩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보통 문화라고 하면 이것은 인간집단이 이루어낸 모든 것을 말한다.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폭넓은 것으로 물질과 정신까지도 포함한다. 인간이 이루어 낸 것이라는 것으로 본다면 자연과의 대립을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나뉠 수도 있다.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 바위를 문화유산이라고 하지 않고 자연유산으로 하는 것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자연유산에 문화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그 바위에 이름을 붙이고 반복된 행사를 통하면 가능해진다. 그 바위에 대고 기원을 했다는 행위와 민속신앙이 덧대 질 때 자연유산이었던 그 바위는 문화유산으로 변화된다. 인위적 가미가 있는 행위가 있어야 문화가 되는 것이다. 식민지배의 설움을 겪은 한국은 독립성을 빼앗기고 상급 민족의 지배를 통한 어려움을 경험했다. 일본을 상급 민족으로 인정할 수 없음은 아직도 우리 본심에 남아있다. 축구나 야구와 같은 경기를 보면 어느 나라와의 경기보다도 더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런 열등의 상급, 하급 민족이라는 인식이 아직도 내재 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그렇기에 반일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꽤 손쉬운 감정의 통일을 만들어 내는 일이기도 하다. 순식간 감정으로 금방 통일된다. 이만큼 식민지라는 감정은 개개인은 물론이고 다수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다. 문화와 식민화가 합쳐지게 되었을 경우 우리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일제식민지 시대를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 하기 위한 해석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조선을 수탈했던 일본의 만행을 수탈로 보지 않고 조선의 근대화로 만들어준 선량한 일로 해석한다.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의 대책 없는 비상식적 역사관점인 '조선은 일본의 침략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다'라는 발언 역시 일본에 의한 경제 중심의 사고로 문화를 해석한 것이었다. 식민시대의 경제적 성장이 불가능해진 왕조가 스스로 몰락했다고 보는 것이다. 일본영향의 근대화를 통해 일반 백성이 잘살게 되었고 자본주의로 변해 가는 과정 속 왕조의 힘이 몰락해서 망했다는 것인데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본 문화적 해석이다. 당시 한탕 잡은 친일파의 정당성은 그들의 행위도 매국이 아닌 근대화의 과정이었다며 스스로 대한민국 창출의 개국 공신이며 애국자로 주장하기도 했다. 문화는 누구에게 종속될 수도 없고 독자적으로 되기도 어렵다. 오랜 시간의 다양함이 모여 다양한 해석과 버무러져야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현재 국민가요라는 트롯트는 분명 일제의 잔재이고, 일본 민요가 섞인 엔카에서의 유래임에도 굳이 한국 민요와 섞였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광복 이후 일제 잔재 청산의 대상으로 왜색가요로 불렸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문화식민지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내가 식민지배를 받고자 할 때 생겨나는 현상이다.
최상위층에 있는 동물일수록 하위에 있는 동물을 섭취하며 생존한다. 동물의 몸속이나 정신을 알 길 없는 사람은, 동물의 행위를 보며 도덕 등과는 무관하게 생존을 위해 남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생존이라는 거대한 기본 틀에서, 죽고 죽이는 관계를 도덕과 연결 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동등한 종족인, 인류 간 서로를 죽고 죽이며 살아가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인류는 그것을 도덕과 관습으로 기록하며 함께 살아가는 방법으로 오랫동안 제시해왔다. 문자로 기록 할 때 선인(先人)의 기록을 남기는 것은, 후대 사람이 선인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나은 사회를 빠르게 만들도록 안내서를 준 것이다. 맹자가 이야기한, 양혜왕 상(梁惠王 上)편에 있는 내용이다. 孟子見梁惠王. 王曰 "( )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맹자견양혜왕. 왕왈 "수불원천리이래, 역장유이리오국호?")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다. 왕이 말했다. "선생께서 천 리를 멀다 하지 않으시고 오셨으니, 또한 장차 내 나라에 어떤 이익을 주실 수 있겠는지요?" 맹자를 만난 양혜왕은 사상가이며 유명인인 맹자를 만나 기쁜 나머지 자신의 국가에 큰 이익을 남기는 방법에 대해 물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익에 심취한 양혜왕의 질문이 영 불만스럽던 맹자는 양혜왕을 논리로 혼내던 기록이다. 上下交征利而國危矣(상하교정리이국위의). 이런 식으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익만을 취하려 한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苟爲後義而先利(구위후의이선리), 不奪不( )(불탐불염). 모든 일에 도의와 도리를 뒤로한 채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한다면 모든 것을 빼앗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혜왕이 이익을 이야기하자 모든 사람이 이익을 쫓게 되면 결국 나보다 더 가진자의 것을 가져가려 하게 되고 모든 사회는 이익을 좇으며 상대방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사회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이익을 취하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며 비도덕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회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맹자가 말했다. 모든이가 이익을 추구하면 결국 양혜왕의 것까지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빼앗으려는 상황까지 갈 것이므로 결국 나라가 멸망하려는 방법은 이익을 쫓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결과이다. 사회가 더 체계적 사회로 되는 것은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사회를 이끄는 부류는 계속 사회의 좋은 위치에 있을 것이지만, 소외되는 계층은 하위계층을 벗어나는 것이 더 어렵다. 사회에서 약자가 되는 것은 내가 어제처럼 오늘을 산다고 극복되는 것이 아니며 평소처럼 살다 보니 사회적 약자가 되기도 한다. 중앙에 모든 경제와 부가 몰린다면 지역의 군소도시, 더 작은 읍내, 시골에 거주하는 사람은 경제 약자가 되기 쉽다. 이익을 좇는 사회는 많은 사람을 더 피곤하고 힘들게 만든다. 이웃을 돕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위해서는 자발적 관심과 이익을 나눌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지역의 작은 사회라면 함께 살려는 노력을 통해 더욱 쉽게 극복 가능할 것이다. 서로 도울 때 이익은 더 커지며 행복은 배가 될 것이다.
단원 김홍도는 당시 가장 유명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중국에 기대어 중국식 그림을 재현하는 일에 멈춘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사실적 문학 이론을 그림으로 전하는 일도 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풍속도이다. 사진이 발달 된 오늘, 풍속도의 모습에 감흥을 느끼기 어렵지만, 당시 일반인의 살아가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는 시도 자체가 파격이었다. 강세황의 도움으로 김홍도는 도화원 화원이되었다. 도화원은 국가에서 관장하는 궁중화가 관리소였다. 궁중의 다양한 기록적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고 사진이 없던 시기에 글로 모두 정리 못 하는 또다른 기록을 주관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김홍도는 그림을 그리며 다양한 선진 그림을 접하게 된다. 본래 뛰어난 그림 솜씨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곳에 뽑혔겠지만 1781년 어용화가가 되어 정조를 그리게 되었다. 사실적 묘사의 실력은 여행을 가지 않고도 그곳을 잘 옮겨 그려 놓으면, 관광을 갔다 오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먼 곳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김홍도는 비밀리에 1789년 일본의 지도를 그려오라는 명을 받고 스승 김응환과 함께 일본 밀사로 가게 된다. 그런데 스승 김응환은 병으로 죽게 되었고 혼자 대마도로 가서 지도를 그려왔다. 일종의 일본에 대한 염탐이 주요 목적이었던 듯하다. 김홍도가 일본을 가게 된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만 뛰어났던 이 사건을 통해 새로운 가설이 나오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 그림으로 일컫는 그림이 '우키요에(浮世繪)'이다. 일식집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사무라이의 모습이나 후지산의 모습을 판화로 표현한 그림이 우키요에다. 이런 우키요에 그림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사람이 '도슈사이이 샤라쿠(東洲齋寫樂)'다. 그는 갑자기 나타나 10개월간 140여 점을 그리고 갑자기 사라졌다. 그렇기에 그는 예명을 사용하며 그림을 그리다 사라졌거나 아님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그림을 그리다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실체가 있는 전설이 되어있다. 그의 활동 기간은 1794년 5월~1795년 2월까지이다. 김홍도는 발가락이 6개였다는 설이 있는데 샤라쿠도 발가락이 6개라는 설, 일본에 간 기간과 완벽히 맞지는 않으나 유사한 시기에 일본에 있었으므로 일부 가설은 김홍도가 예명으로 10개월간 일본에서 활동하다 귀국했다는 설도 있다. 김홍도의 말년 기록이 없다는 것도 일본으로 가서 활동해서 그럴 것이라는 추측과 상상으로 사건을 사실처럼 더해준다. 김홍도는 1791년 정조의 초상을 그렸고 이 공을 인정받아 충청북도 괴산 연풍의 현감으로 가게 된다. 충북에 있는 동안 충북의 명승을 돌아보며 그의 특별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1796년, 병진년화첩(보물 제782호)을 만들었다. 20면으로 된 화첩은 단양 8경인 사인암을 그린 것이며 도담삼봉, 영랑호등과 같은 풍경, 산수 인물화, 화조화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연풍은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그리 큰 도읍은 아니었던 곳이다.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자 관아 곡식을 나누어 구율에 힘을 썼다고 하였으나 그를 헐뜯는 무리가 다른 이야기로 그를 모함했다. 백성들의 중매에나 신경 쓰며 젊은 병사들에게 사냥을 시키는 일에 열중한다는 모함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본업인 그림 그리는 일을 다시 하였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왕이 되면서 김홍도 역시 중요한 일에서 배제되며 쓸쓸한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서양이나 조선이나 새로운 사고는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나온다. 새로운 문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일상이 만들어 놓은 삶의 방식을 다른 세대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다듬어 만드는 것이다. 김홍도가 유명해져 연풍 현감으로 짧게 있었더라도, 지역에 매몰되어 관광 상품 만드는 것보다 정신을 찾고 조명하는 것이 르네상스의 해석에 보다 가까운 일이 될 것이다. 지역의 문화르네상스는 정신을 찾는 일을 먼저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