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3요소는 희곡, 배우, 관객이다. 보통 배우는 희곡, 즉 대본을 보고 출연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러나 나는 희곡을 보지도 못한 채 배우로 캐스팅되었다. 그런데 이번 생의 배역은 좀 묘하다. 고요가 몸을 불리는 밤이면 골방에 박혀 모국어로 나를 찾다가도, 소리가 키를 세우는 낮이 오면 외국어를 쓰는 아이들 속에서 나를 잊는다. 그러나 그 어떤 시간에도 나는 혼자다. 오늘도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오른다. 연극이 3막이나 4막으로 이루어지듯 나의 모노드라마 또한 대체로 4막이다. 간혹 시 창작 강사 역할이 주어지는 날이면 5막을 올리기도 한다. 오늘은 4막이 있는 날이다. 막이 오르는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새벽 6시 50분에 자동차 시동을 건다. 청주에서 진천으로 한 시간 이십여 분을 달려 무대에 도착한다. 8시 15분쯤 도착하면 1막이 시작된다. 1막의 관객은 12명의 아이들이다. 한국 아이가 단 한 명도 없다. 엄마 아빠가 모두 외국인인 아이가 9명이고 한쪽 부모만 외국인이 아이가 3명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러시아 1명, 우크라이나 1명, 우즈베키스탄 4명, 카자흐스탄 3명이다. 즉 중앙아시아 계열의 외국인이 9명이고 필리핀 다문화 1명, 베트남 다문화 1명, 캄보디아 다문화 1명으로 동남아 계열 다문화가 3명이다. 1막을 마치고 다시 한 시간 이십 분을 달려가면 2막이 시작된다. 2막의 관객은 가족들이다. 나는 분장을 지우고 앞치마를 입고 푸시시한 엄마 역할을 수행한다. 저녁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끝낸 뒤, 관객들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면 3막의 커튼을 연다. 3막엔 서재로 들어가 밀린 원고를 쓴다. 3막의 관객은 책상 위의 조명과 적막과 어둠이다. 새들도 사람들도 박제로 걸려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마술사의 풍경들 시간이 똬리를 튼 채 바삭하게 멈췄다 홀로 걷는 그녀가 햇살을 튕겨본다 멈춰진 사람들은 그녀를 외면한다 변하지 않는 곳에서 변한 것은 그녀뿐 아무리 흔들어도 모두가 그대로인 곳 그녀는 날 선 몸을 바다로 던진다 누군가 구름을 찢어 눈물을 닦아준다 -김나비, 「모노드라마」전문 동생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언니 언니는 죽으면 몸이 눈사람처럼 스르르 녹아내릴 거 같아. 도대체 몇 명 역할을 하는 거야?" 그러나 그건 모르는 소리다. 난 제대로 된 똘똘한 배역을 맡지 못해서 하루에도 서너 가지 배역을 흘낏거리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야무진 하나의 배역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그건 가끔 하는 하품 같은 것이다. 난 이렇게 여러 배역을 넘나드는 것이 좋다. 힘겹게 역할을 소화해 내는 짜릿한 기쁨이 있다. 쉬운 건 매력이 없다. 이제 마지막 4막이 남았다. 수면 잠옷으로 갈아입고 역할 속으로 들어간다. 이번 역은 잠멍을 때리는 아줌마다. 불멍, 물멍처럼 나는 잠멍을 즐긴다. 남들은 자는 동안 다양한 꿈을 꾼다는데, 난 거의 모든 잠 속에서 꿈이 없다. 기절한 것처럼 멍때리다 눈을 뜨면 새벽이다. 그러니 잠멍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내일의 연극을 위해 눈을 감는다. 언제나 내 삶은 모노드라마다.
내 일상엔 소소한 루틴이 있다. 일어나자마자 물 한 잔을 마신 후, 화장실에 가서 시 한 편을 낭송한다. 아침은 내가 만든 플레인요구르트 한 컵을 먹고, 퇴근 후엔 베란다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며 한동안 멍때리기를 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나를 벗고 다른 삶에 푹 젓는다. 다른 삶으로 들어가는 날은 금요일이다. 금요일이면 난 영상 속 인물이 되어 울고 웃는다. 코로나가 터지고 영화관을 못 가게 되었을 때, 넷플릭스를 신청했다. 보고 싶은 것을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장점은 있는데, 대부분의 OTT 영상물은 시리즈로 제작이 되어서, 그것을 다 보려면 밤을 새워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타인이 되어보는데, 그 정도의 시간은 지불해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넷플릭스를 뒤적이다 『인간 실격』 포스터를 발견했다. 1948년 발표한 오사이다자무의 소설을 개작하여 만든 영화일 거라 짐작했다. 눈 내리기 직전 왈칵 쏟아질 것 같은 하늘처럼, 읽는 내내 우울의 숲속을 걷게 했던 소설이다. 반가웠다. 버튼을 눌렀다. 암울한 분위기와 동반 자살 등 일부 느낌은 같지만, 전혀 다른 드라마다. 게다가 16편이다. 밤을 꼴딱 세워도 못 볼 분량이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화면을 응시한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유독 내 눈을, 귀를, 가슴을 당기는 것이 있다. 아버지와 딸이다. 딸은 부정이라는 인물로 작가였으나,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붓을 꺾고 우울한 시간을 걷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폐지를 줍는 성실하고 착하고, 오로지 딸이 세상의 전부이며 치매기가 살짝 있는 노인이다. 드라마엔 둘의 대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 오밀조밀하고 잔잔하고 소소한 이야기가 왜 그리 정겹게 느껴지는지,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진다. 그들은 케이크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나도 아버지가 있었는데…. 가만히 눈을 감고, 기억의 문을 살며시 열어본다. 붕어빵이 보인다. 안으로 조금 더 발을 들인다. 아버지가 손에 봉지를 들고 걸어 오신다. 한 입 베어 물면 몸 안에 퍼지는 소리 꿈틀꿈틀 유영하는 골목의 등뼈 위로 거나한 노랫가락이 타박타박 걸어온다 부스럭대는 검은 봉지에 발소리가 포개지면 외눈박이 가로등은 리듬에 맞춰 윙크하고 별빛은 비틀거리는 그림자를 비춘다 휘청이는 밤을 접으며 웃음 짓던 당신 위 속에 팥알 같은 종양을 숨긴 채 빵처럼 부푼 몸으로 붉은 꽃을 토하던, 별빛을 등에 지고 붕어빵 내밀던 아버지 문득 하늘을 보면 꼬리 흔드는 물고기 자리 말없이 반짝거리며 골목을 내려다본다 -─ 김나비,「물고기 자리」전문 《나래시조》 2023년 겨울호 겨울이면 떠오르는 간식이 있다. 붕어빵이다. 맛도 맛이지만, 그 붕어빵에 얽힌 아득한 기억을 소환하는 일이 좋다. 아버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착한 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가 있어서 다행이다. 눈이 온다. 하늘에서 누군가 기척을 한다. 오늘은 눈을 맞으며 붕어빵을 먹고 싶다. 붕어빵틀 앞에 소복소복 쌓인 붕어빵 중에 제일 못생긴 붕어를 하나 들고, 기억을 연하게 오래오래 되새김해 보련다.
구급차가 왔다고 한다. 저혈당에 코로나까지 겹쳐 쓰러지셨단다. 간 김에 MRI도 찍고 CT 촬영도 하고 지금은 링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느닷없이 올케의 전화가 왔다. 응급실인데 어찌하면 좋겠냐고. 이번 생신에는 그냥 내려오지 말라고. 예약한 고기와 떡을 찾아서 저녁에 나서려던 참이었다. 당장 가겠다고 했다. 퇴원을 못 할 상황이라도 가봐야 하는 게 맞고, 퇴원할 상황이라도 가서 생신상을 차려 드리는 게 맞다고 입을 열었다. 아흔, 내일 당장 눈을 감으신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나이다.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다음이란 없다. 가는 도중, 오빠에게 전화가 온다. 이제 안정이 되었고, 퇴원 수속을 하고 있다고. '엄마'라고 가만히 발음해 본다. 뭔가 더 해야 할 말이 남아 있는 듯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한 번 더 발음해 본다. 가슴속으로 찬바람이 들어온다. 마른 대추처럼 쪼그라든 엄마 모습이 떠오르며 명치가 아려온다. 최근에는 정신도 오락가락한 듯 요양보호사를 도둑으로 몰았단다. 집에 있는 옷이 자꾸 없어지고 담금주가 사라진다고 의심했다고 한다. 몇 명의 요양보호사가 바뀐 후 엄마는 아무도 오지 말라고 소리 질렀고, 요양보호사들 사이에도 소문이 돌아 친정집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한다. 그 후 오빠가 마다리로 와서 돌보고 있지만, 증상은 호전될 기미가 없다. 어둠을 뚫고 도착한 친정은 영혼이 털린 몸처럼 불이 꺼져 있다. 베란다에 던져놓은 양파에 싹이 났다 연초록 긴 빨대를 몸 위에 꽂고 누워 짓무른 시간 속에서 거친 숨을 삭힌다 살점을 벗길 때마다 젊은 날이 둥글게 진다 손끝에 비린 향은 노모의 아린 눈빛 기억을 놓지 않으려는 거미줄처럼 진득하다 창가에 노을빛이 얼룩져 쿨럭이고 번져가는 지난날이 검붉게 멀어질 때 당신은 얇은 몸으로 두꺼운 겨울을 건넌다 ─ 김나비, 「뒤로 걷는 계절-치매」전문 (시집 혼인 비행) 쌀을 씻고 미역국을 끓이고 당면을 물에 불린다. 밖이 소란하다. 엄마가 올케와 조카의 부축을 받으며 현관문으로 들어선다. 죽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김치를 가위로 잘게 조각내서 쟁반에 놓는다. 거실에 있는 환자용 침대에 엄마를 부축해서 앉히고 죽을 드린다. 달게 잡수신다. "방학했냐?" 묻는 것이 지금은 정신이 들어온 것 같다. 죽을 자시고 딸기를 입에 넣으며 또 물으신다. "언제 방학하냐?" 난 아까 했던 대답을 반복한다. 엄마는 경로당에 먹을 것을 갖다 주어야 한다는 말을 몇 번 되풀이한다. 노인들이 당신의 생일을 손꼽아 기다린단다. 나는 내일 아침에 음식을 장만해서 점심상을 차려다 줄 것이라고 말한다. 한참 동안 멍하니 티브이를 쳐다보다 애들은 왜 안 왔냐고 묻더니 어느새 코를 고는 엄마. 이불을 끌어다 목까지 덮어 준다. 이젠 아기가 되어버린 나의 엄마. 얼마나 더 당신을 볼 수 있을지…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벌레가 견갑골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파먹는 느낌이다. 풀숲에 조용히 숨어서 풀잎을 사각사각 갉아먹는 풀벌레처럼 내 어깨 속에도 분명 무엇인가가 살고 있다. 7개월째 보이지 않는 그 무엇 때문에 잠을 설친다. 밤이면 통증은 더 심해진다. 자다 깨어 왼쪽 어깨를 오른쪽 손으로 주무른다. 여전히 저릿하다. 다시 동그란 안마 봉으로 두드린다. 잠이 달아나버린다. 습관처럼 컴퓨터를 켜고 화면을 본다. 커서만 깜빡이고 시상은 떠오르지 않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마음 공부를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던 스승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난 마음 공부를 잘하고 있는가. 나 자신을 돌아본다. 잘 이라는 단어에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냥 마음공부를 하고 있다. 짝사랑하는 사춘기 소녀처럼 어둠을 자르며 시를 기다린다. 잠시 그가 오는 것 같은 기척이 느껴져 한 줄을 쓰고 나니 또 먹먹하다. 창밖에 겨울비만 추적추적 걸어오고 있다. 하늘과 땅을 비질하는 빗소리를 들으며 또 무작정 기다린다. 그대가 다녀간 행간 아픈 싹이 돋는다 비 오는 내 눈 속에 거미가 내려온 걸까 공막 속 핏발선 줄에 빗방울이 걸려있다 명치에 쌓이는 빗소리를 닦아 내며 그대를 불러내어 종이에 가둔다 초침은 째깍거리며 어둔 밤을 가위질한다 썩지 않는 기다림은 끝날 수 있을까 비의 창살을 뚫고 날아가는 그대 모습 도시의 엉킨 발소리 밤을 넘어 행을 지운다 어둠이 삼켜버린 길을 찾아 떠도는 슬픔 그대의 항아리에 피도 살도 다 풀어놓고 하얗게 녹아내린 채 흔적 없이 남고 싶다 ─ 김나비, 「시시(時時)한 새벽」전문 (시집 혼인 비행) 내가 글을 대하는 자세가 삐딱해서 견갑골도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하도 시답지 않게 시를 쓰니 뼈도 나를 벌 하는 것 같다. 기다린다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리라. 그래서 이 이슥한 시간에 홀로 깨어 있게 하는 것이리라. 스승님은 늘 말씀하셨다. 마음공부를 하다 보면 사물이 말을 걸어오는 날이 있을 거라고. 그러나 사물은 아직 내게 아무런 말도 걸어오지 않는다. 어깨의 통증만이 툭툭 말을 건다. 뼈가 뾰족뾰족 일어나 살을 쑤신다. 더 생각하라고, 더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박힌 눈동자로 밖만 보지 말고 안으로 돌려 자신을 돌아보라고. 자신의 내면을 샅샅이 살펴보라고. 자신을 안 뒤에야 사물도 알게 될 거라고 나를 채찍질하는 것 같다. 사물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까지 마음공부를 하련다. 언젠가는 내게 말을 걸어오겠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폴 발레리의 시구가 떠오른다. 살짝 시구를 변주해 본다. 찬비가 온다. 써야겠다.
계절이 또 옷을 갈아입고 있다. 조석으로 불어오는 생경한 바람은 몸을 움츠리게 한다. 옷장 정리를 한다. 반 팔은 깊숙한 곳에, 긴 팔은 손이 닿기 편안한 곳에 놓는다. 주말엔 내복을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스카프를 정리한다. 분홍색 바탕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있는 스카프, 파란색 바탕에 꽃무늬가 그려진 스카프, 갈색 바탕에 검은 체크무늬가 수 놓여진 스카프, 초록색 민무늬 스카프…. 언제 이렇게 사 모았는지, 참 많이도 그러모았다. 세월이 쌓인다는 건 냄새가 쌓이는 것이라는데, 나에겐 어떤 냄새가 날까. 하늘거리는 스카프 속에서 내가 쌓은 욕심의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 나올 것 같아 멈칫한다. 물방울 스카프를 들고 냄새를 맡아 본다. 점·점·점 물방울 떨어진 자리 서릿발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하얀 날 장롱에 곱게 넣어둔 스카프를 꺼낸다 둘·둘·둘 감으면 파도 소리 목에 걸린다 폭풍이 밀려와 당신을 삼킨 새벽 바다의 고함을 뚫고 파도가 건넨 스카프 감는 건 사람의 체온을 데우는 일 사랑은 파도에 유영하듯 풀어주는 것 찬바람 일렁거리고 당신이 밀려오고 감기 위해 풀어야 했던 당신의 스카프 서리 내려 감기는 지금은 초겨울 저절로 스카프 감는 매큼한 계절이다 ─ 김나비, 「물방울 스카프」전문 (시집 혼인 비행)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스카프를 자주 감는다. 감는다는 것은 사람의 체온을 데우는 일이다. 체온을 데운다는 것은 기억을 데우는 것이다. 창밖에 초겨울 바람이 일렁이며 춤을 추고 있다. 내게 남아있는 겨울은 얼마나 될까. 많아야 스무 번일 것이다. 사는 동안 다른 사람의 기억을 데워줄 수 있는, 따듯한 스카프 같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빗소리가 기억을 몰고 온다. 유행가 가사처럼 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내 유년의 빗속을 함께 걸어주던 K. K를 만나고 온 지도 벌써 열 달이 되어 간다. 지난 1월에 강남센트럴씨티 터미널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다. 5년 만의 만남이었다. 나는 K에게 향수를 선물했고, K는 내게 클렌징폼을 주었다. 가뭄에 콩 나듯이 만나는 사이지만 언제나 밝게 웃는 K의 모습은 나를 환하게 만들었다. 초등학교 시절, 예고 없이 비가 오는 날이면 K와 나는 비를 맞으며 하교를 하곤 했다. 낭만이나 놀이 때문은 아니었다. 당시 다른 아이들은 엄마가 우산을 갖고 학교 현관에 와서 기다렸지만, 나와 K는 누구도 오지 않았다. 나는 7남매 중 하나인 작은 계집아이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내게 우산을 가져올 거라는 것은 애당초 기대도 안 했다. 그것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창피했다. 그나마 나와 같은 처지의 K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K의 엄마는 허리를 다쳐 일어나지 못하는,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서 장사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느닷없이 비가 와도 올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양손에 운동화를 벗어들고 도로를 찰방찰방 걸었다. 세차게 빗줄기가 내릴 때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비를 피하기도 했다. 소리는 기억을 두드리는 징검다리 흔들리는 창문 사이로 빗소리가 건너오면 속울음 빗장뼈 풀어 지난날을 끌고 온다 먹구름 등에 지고 걸어온 비탈길에 겹겹이 엉키는 애처로운 걸음들은 바닥에 부서져서야 일어서는 눈물 소리 절름거리던 시간만큼 소리가 쌓여간다 얼마나 울음을 풀어내야 길이 보일까 번지는 물무늬마다 햇살 몇 되 박혀있다 ─ 김나비, 「빗소리 현상학」전문 (정형시학. 2022. 봄호) 빗소리가 K를 몰고 온다. K는 내게 말하곤 한다. 유년의 몇 안 되는 즐거운 기억 중에 내가 들어있다고. K는 지금 강남의 한 초등학교 특수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K는 지금쯤 빗소리를 들으며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공문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내일 수업 준비를 하고 있을까. 어쩌면 학부모와 상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K의 앞날에 맑은 햇살만 가득하길, 빗소리를 들으며 손을 모아본다. 도란도란 속삭이던 K의 목소리가 비를 타고 귓속으로 내린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까. 얼마 전 이 손에 들어왔다. 다문화 정책학교에 근무하게 된 나는 난생처음 러시아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러시아 시집이 내게 날아든 것이다. 우리 반에 러시아 아이들 비중은 20퍼센트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러시아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문화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되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내 삶 곳곳에 러시아 작품들이 있었음을 발견하고 놀란다. 고교 시절, 내 책상 위엔 푸쉬킨의 「삶」이라는 시가 넓적한 나무 판에 불로 새겨져 걸려있었다. 오빠가 수학여행을 다녀오며 사 온 것이었다. 푸쉬킨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외우고 또 외웠던 그 시는 아직도 내가 외는 몇 편 안 되는 시 중에 하나다. 어디 그뿐이랴. 그 시절 나는 오빠 방에 꽂혀 있던 『부활』, 『닥터 지바고』를 읽으며, 눈 덮인 러시아 자작나무 숲을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마당에 자작나무를 열 그루를 심었다. 기온이 안 맞아서인지 관리를 못 해서인지 비록 나무는 고사하고 말았지만 자작나무 하면 왠지 편안함이 밀려든다. 최근에는 윤제균 감독의 영화 을 보며 스크린 속의 새하얀 자작나무 숲을 다시 본다. 하얀 눈 위에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군들이 손가락을 자른다. 붉은 피로 물드는 차가운 자작나무 숲, 그 강렬한 첫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이렇듯 러시아 문화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삶의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톨스토이를 비롯하여 도스토옙스키, 고리키, 체호프, 레르몬또트, 고골. 푸쉬킨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작품은 내 삶의 자양분이었다. 보즈네센스키는 이번에 처음 접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을 읽으며 러시아 문학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생각이 꼬리를 물며 문학뿐 아니라 그림을 떠올린다. 화가 샤갈과 칸딘스키 그림도 다시 찾아보는 나만의 행복한 시간 여행을 한다. 우연과 필연 사이 그 간극에 당도한 시집을 편다. 보즈네센스키(1933∼2010)는 모스크바 출생이다. 그는 구소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인이었고 한다. 보즈네센스키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주된 관심사로 두면서도 전통적인 시 형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고자 과감한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즉 다중 운율시, 산문시, 시와 산문의 혼합시, 그래픽시, 시각시 등 다양한 형식을 개발하게 했다. 그의 시를 보면 기존의 예술 형식에 도전하고자 했던 전위파 시인의 눈부신 개성을 느낄 수 있다. 책을 덮고 우리 반 아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아이들이 더 친숙하게 다가옴을 느낀다. 어릴 적 접했던 시 한 편이, 나도 모르는 행복한 기억을 갖게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아이들에게 시조를 가르치고 있다. 훗날 러시아로 돌아가 한국을 회상할 때 시조가 그리움이라는 리듬으로 피어나길 바란다. 한국의 가락이 그들의 의식 속에 잔잔히 흐르며 아름답게 기억되길.
윤제균 감독의 영화 은 2014년에 개봉되었다. 황정민과 김윤진이 열연한 이 영화는 1950년 흥남 철수작전이라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한국전쟁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인물 덕수가 주인공이다. '덕수'는 평생 자신을 위해 살아 본 적이 없다.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힘겨웠을 가난하고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 괜찮다고 웃어 보이고 다행이라고 다독이며 자신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우리네 아버지다. "힘든 세상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게 참 다행 이라꼬."라는 덕수의 대사는 우리 부모님을 보는 듯 가슴이 아렸다. 이 영화를 통해 파독 광부, 베트남전, 이산가족 찾기 등 한국전쟁에서 현재의 우리나라 시대상을 다 볼 수 있어서 의미가 있었다. 또한 김동리의 라는 소설과 함께 읽으면서 흥남 철수에 관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아픈 역사를 곱씹으며 씁쓸함이 밀려들었다. 흥남 철수 작전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난민 수송 작전으로 기네스에 오르기도 했다는데, 이런 피난민의 우여곡절의 장면들이 영화에 그대로 묘사가 된다. 극 중 영자가 남편 덕수에게 울분을 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신 인생인데 왜 그 안에 당신은 없냐구요!"라는 영자의 말은 아프게 다가왔다. 덕수의 인생에서 정작 덕수 자신이 없었던 이유는 약속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려 애쓰며 평생을 산다. 아버지와 그는 눈발 날리는 흥남에서 두 가지 약속을 한다. 첫째,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지키라는 것과 둘째, 꽃분이네 가게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흥남 부두에서 막순이를 놓치고 아버지와 헤어지기 직전 어린 덕수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아버지가 없으면 니가 가장이지? 이제부터 니가 가장이니 까니, 가족들 잘 지키기요."라고. "나는 막순이 찾아서 데리고 갈 테니 부산 꽃분이네 고모 집에서 만나자."라는 또 하나의 약속을 한다. 덕수는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에 평생 꽃분이네 가게를 처분 못하고 산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 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 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 예." 라며 운다. 그 장면은 우리네 아버지의 책임감과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어서 고마움과 동시에 부채 의식에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약속은 얼마나 많은 구속력을 지니는가 생각해 본다. 그것이 나 자신에게 하는 약속일지라도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오늘 밤, 나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해 본다. 첫째, 내 삶에 어머니로의 김희숙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김나비가 들어 있기를. 둘째, 김나비의 소소한 삶을 다루는 작가가 아니라 주변과 시대를 아우르는 그런 작가가 되기를.
내비게이션으로 충무아트센터를 찍는다. 서울에서 차를 몰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주차다. 다행히 그곳은 주차장이 있다고 한다. 서울은 어디를 가나 내겐 처녀지다. 처음이라는 것은 두렵고 설레는 일이다. 나이가 들고 나니 그 두려움이 싫어서 처음이라는 설렘을 포기한 적이 많다. 그러나 오늘은 포기라는 단어는 배추를 세는 단위로만 치부하기로 했다. 지하 3층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핸드폰으로 차의 위치를 찍는다. 어둑한 길눈으로 밤새 차를 찾는 불운을 막기 위해서다. '『행복한 왕자』를 과연 어떻게 1인 뮤지컬로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을 안고 계단을 오른다. 『행복한 왕자』는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단골 동화다. 그 이야기를 오늘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한발 한발 걸을 때마다 보이는 모든 것을 꾹꾹 눌러 눈에 담는다.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는 이곳을 찬찬히 살피며 공연장으로 들어선다. 『행복한 왕자』는 오스카 와일드가 1888년도에 지은 동화다. 빅토리아 시대에 가장 성공한 극작가로 뽑히는 그는 의사인 아버지와 작가인 어머니 슬하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언변으로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결혼 후 두 자녀를 두고도 동성애를 했던 사람이다. 그로 인해 수감생활을 하는 등 말년에는 불행하게 죽음을 맞는다. 그는 갔지만 그가 쓴 작품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도 책으로 연극으로 뮤지컬로 재연되고 있다. 도시의 광장 높은 곳에 세워진 왕자 동상이 있다. 두 눈은 사파이어고, 그의 칼에는 루비가 박혀 있고 온몸은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다. 어느 날 다른 제비보다 뒤늦게 남쪽 나라로 가던 제비가 행복한 왕자 동상에 앉는다. 그리고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왕자는 광장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이 안타까워 제비에게 자기가 지닌 루비. 사파이어. 금박 등을 나누어 줄 것을 부탁한다. 왕자를 사랑한 제비는 왕자의 눈과 손과 발이 되어 가난한 이들을 돕다가 그만 이집트로 가야 할 시기를 영영 놓친다. 결국 철새인 제비는 추운 겨울을 못 이기고 동사하고 만다. 금박이 다 벗겨지고 보석조차 없는 왕자 동상은 흉물스럽다고 하여 태워지고,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 왕자의 심장과 죽은 제비는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이고 왕자는 과연 행복했을까를 반문해 본다. 뮤지컬을 보는 내내 나는 왕자보다 제비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왕자의 말에 가스라이팅 되어 자신이 죽을 수도 있지만 떠나지 못하고 그의 주변을 맴도는 제비의 선택이 옳은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해 본다. 물론 사랑하면 자신의 안위나 행복보다는 상대를 더 배려할 수 있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연인들의 사랑은 좀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 볼 문제다. 본인이 죽은 후에 행복한 세상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왕자는 휴머니스트로 묘사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어주고 행복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왕자가 에고이스트로 보인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는 것은 진정한 휴머니스트가 아니다. 누군가를 돕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본인이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제비를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이기적인 처사임이 분명하다. 물론 그가 도시의 다른 여러 사람에게 기쁨을 선사했음은 자명하다. 공리주의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타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되는 것이 맞는 것일까. 그 소수도 소중한 생명이 아닐까. 트롤리딜레마에서 느꼈던 난감함이 나를 엄습한다.
다섯 시 알람이 울린다. 인천, 눈을 뜨자마자 낯선 도시를 발음해 본다.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관에서 '100편의 소설 100편의 마음'이라는 전시회가 열린다고 한다. 오래전 작가들의 영혼을 보러 간다는 것은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1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두근거리는 일인가. 청주에서 인천까지 물리적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도道를 넘나들기 때문에 심리적 거리는 멀다. 먼 길을 떠날 생각에 며칠 전부터 마음이 분주했다. 시외버스 앱으로 미리 차 시간표를 알아보고, 쉬운 길 찾기 앱으로 경로도 익혀 두었다. 그리고 일곱 시 이십 분 버스를 예매해 놓았다. 드디어 오늘, 나는 1900년대를 만나러 간다. 여섯 시 반에 현관문을 열고 나와 내 차에 시동을 건다. 터미널 근처에 차를 주차해 놓고 인천행 버스를 탈 요량이다. 터미널 근처 골목을 빙빙 돌기를 몇 번, 마침 주차했던 차가 빠지고 있다. 간신히 차를 대고 바람처럼 걷는다.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인 탓에 시간이 넉넉하다. 버스를 기다리며 훈풍을 맞는다. 사느라 바빠 계절을 마주할 겨를도 없었는데 봄이 불쑥 내 옆에 서 있다. 버스가 도착하고 자리에 앉는다. 내 좌석은 9번이다. 나는 9라는 숫자가 좋다. 9는 10보다는 작지만, 왠지 1만 더하면 가득 찰 것 같은 희망을 품게 한다. 그래서 티켓이나 좌석을 예매할 때 늘 9번을 고른다. 남들은 7을 좋아하지만 7은 내겐 너무 과분한 숫자라는 생각을 한다. 내 인생에 행운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학창 시절 소풍에서 나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보물을 찾아본 적이 없다. 고로 나는 행운은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내 자유의지이길 바라며, 그 길이 힘겹지 않기를 기도한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고속도로에 접어들고 이팝나무들이 길옆에 늘어서서 하얀 꽃잎을 피워 올리고 있다. 들판이 스륵 지나가더니 산들이 휙휙 지나간다. 초록으로 몸을 불리는 봄이 창문을 통해 나를 관람한다. 지나간 날을 떠올린다. 여러 해의 봄이 버스의 속도에 맞춰 나를 스치고 뒤로 뒤로 멀어진다. 수많은 봄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멀어지는 봄날 중 한 컷을 잡아 생각에 잠긴다. 시간을 거꾸로 더듬다 보니 어느덧 인천에 도착한다. 인천역에서 내려 차이나타운으로 발을 옮긴다. 짜장면 박물관을 관람하고 인천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하얀 짜장면집에 가서 점심을 먹는다. 박물관에 전시된 오래된 책들을 보며 그 시절을 상상해 본다. 한참을 구경하고 있는데 황순원의 소나기가 보인다. 소나기 책 표지와 겹치며 학창 시절 추억이 아득하게 피어난다. 생각에 젖어 있는데 일행들이 보이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꽁무니를 따라나선다. 우리는 언덕을 올라 '자유공원'으로 간다. 1889년 무렵, 우크라이나인 토목기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한 공원으로 당시에는 만국공원(萬國公園)이라 명명했다가, 1957년 자유공원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공원을 둘러보고 전망대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본다.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자유를 생각한다. 조선인의 의견이 배제된 채 외국인들에 의해 조성된 자유공원, 그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진정 이곳은 누구를 위한 공원이었을까. 문득 '개인의 자유가 이웃의 재앙이 될 때 그 자유는 끝나며 또 끝나야 한다.'라는 프레드릭 윌리엄 파라는 말을 떠올린다. 인천을 뒤로하고 청주행 버스를 탄다. 꾸벅꾸벅 졸다 보니 청주에 도착한다. 청주의 포근한 밤이 내 살갗을 어루만진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마주친다. 지금 내 눈에 빛을 발하는 저 별은 오랜 시간을 날아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리라. 몇 년 전에 출발한 빛이 몇 광년을 날아서 드디어 오늘 내 눈 속에 빛을 발하는 것이리라. 마치 오래된 날들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날아와 오늘 내 가슴에 내려앉는 것처럼.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자유라는 말을 떠올린다. 나는 지금 자유로운가. 내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영혼은 육체의 노예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곰곰 생각에 잠기는 밤이다.
이 영화를 보면 꼭 잠을 자게 된다. 나는 몇 년째 트로이를 보고 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제대로 영화를 보지를 못했다. 남편은 내가 영화를 틀어놓고 잠드는 바람에 무려 다섯 번이나 브레드피트의 활약을 봤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책 읽기 모임에서 『일리이드 오디세이아』를 읽기로 했다. 벽돌보다 더 두꺼운 책을 사놓고 몇 번이고 읽기를 시도했으나 완독하지 못했다. 그래서 손쉽게 『일리이드 오디세이아』의 내용을 더듬어 보고자 선택한 영화가 트로이였다. 트로이는 책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그러나 영화도 쉽지 않았다. 난 영화를 보는데도 여러 번 실패했다. 전쟁 장면이 나오면 꼭 잠들게 된다. 전쟁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 너무 장시간 전쟁 장면이 나와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다. 시청 30분을 넘어가면서 전쟁 장면이 나오면 매번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그러나 이번만은 참아야 한다. 이번엔 기필코 앤딩 장면까지 보리라.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영웅의 삶과 평범한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영웅도 평범한 인간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죽음은 삶의 일부이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의 삶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아킬레스에게 포로로 잡혀 온 브리세이스는 신은 경배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사제이다. 심지어는 전쟁의 신인 아레스마저도 경배의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라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아킬레스는 말한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알려줄까? 신은 인간을 질투해. 인간은 다 죽거든. 신은 죽을 수 없는 존재들이지. 우리는 늘 마지막 순간을 살지. 그래서 삶이 아름다운 거야. 이 순간 너는 가장 아름다워. 이 순간은 다시 안 와!" 그 대사를 듣는 순간 명치에 돌덩이 하나가 쿡 박힌다. 영화의 전반부에 많은 병사가 죽는다. 시신을 수습할 때 시신 아래 그림자처럼 찍힌 핏자국이 내 시선을 베어간다. 도장처럼 새겨진 자국은 시신이 살아있었다는 흔적을 땅에 새긴 것이리라. 단에 시신들을 가지런히 눕히고 감은 눈에 저승에서 쓸 노잣돈을 얻은 후 태우는 모습은 우리네 장례 의식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 휴식기 하얀 골격이 수평으로 누워있었지 피도 살도 다 내 준 마른 꽃잎 위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평화로운 날들이 불어왔어 떨어져 나간 팔 관절과 다리가 바람에 흩어지고 박음질 된 시간이 침묵의 열매를 맺고 있었어 사라지는 것으로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게 죽음이지 나는 초록 머리 날리며 너의 영혼이 나는 것을 보고 있었지 -김나비 「죽음의 한 살이」 일부 그녀는 묻는다. "나는 포로인가요?" 아킬레스는 답한다. "너는 손님이야. 언제든지 떠날 수 있지." 빗발치는 불화살과 불덩이 공 위로 쌓이는 파도 소리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가슴을 파고든다. 아킬레스는 죽는 마지막 순간에 브리세이스의 품에 안겨 말한다. "피로 얼룩진 내 삶에 너는 평화를 주었어."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그는 뜨겁게 사랑했고 평화를 느꼈던 것이다. 단에 올려진 아킬레스의 눈에 동전이 올려지고 불 속에 휩싸인 그가 행복해 보인다. 드디어 오늘 오 년 만에 영화 한 편을 다 보았다. 여운이 내내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죽음이 있기에 아름다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본다.
변화는 좋은 변화든 나쁜 변화든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올해는 내 생에 많은 변화가 감지된다. 지역 만기가 되어 임지를 옮겨야 한다. 새 부임지는 집에서 거리가 제법 있다.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 넘게 운전을 해야 한다. 게다가 다문화 정책학교에 소규모 중심유치원에 특수교사가 없는 통합학급이라 특수교사 역할도 해야 한단다. 나도 모르게 두려움의 싹이 튼다. 꿈은 무의식의 표현이라 했던가. 요즘 깊은 잠을 못 이루고 자주 꿈을 꾼다.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서 고라니의 또랑또랑한 눈망울이 천진하게 쳐다보고 있다. 까만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차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브레이크 페달을 있는 힘껏 밟는다. 뒷좌석의 물건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귓속으로 달려든다. 순간 나는 핸들에 머리를 묻고 눈을 꼭 감는다.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며 살며시 눈을 뜬다. 그때 고라니가 뛰기 시작한다. 차 앞으로 난 도로를 겅중겅중 달리고 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라니 뒷모습에 오래도록 시선을 던진다.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인다. 멀어져 가는 고라니를 한동안 바라보다 벌떡 일어난다. 꿈이다. 온몸에 식은땀이 나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잠을 청한다. 이번엔 온천지가 하얀 눈으로 덮여있다. 나는 홀로 길을 잃고 눈발 속을 맨발로 걷고 있다. 사방을 분간할 수 없게 눈이 내리고 눈에 덮인 길은 길인지 들판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한참을 서성이고 있는데, 설산 속에서 고라니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하늘엔 어둠을 찢고 나온 반달이 희끄무레하게 떠 있고 별빛은 두근두근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벌떡 일어나 머리맡에 놓여있는 물을 마신다. 더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 꿈을 곱씹다 컴퓨터를 켠다. 내내 고라니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는 종일 도로 위에서 서성이는 작은 고라니가 된다. 야음을 틈타 허기 지우려던 걸음이 / 눈발 날리는 도로에 널브러진다 // 부릅뜬 눈에 / 달빛이 소름처럼 내려앉는다 / 도로가 훅훅 / 고라니의 식어가는 숨을 삼키고 / 밤은 검은 손을 뻗어 글썽이는 살갗을 더듬는다 // 난생 처음 등을 깔고 누워 바라본 하늘 / 단단한 어둠을 찢고 나온 쪼개진 반달이 검은 눈에 박히고 / 자작나무 그늘 속에서 튀어 오른 부엉이 울음소리 / 할딱이는 몸을 휘감고 맴돈다 // 널린 몸통에서 / 새어 나오는 붉은 실타래를 / 솜털 쌓인 도로가 빨갛게 받아먹는다 // 밤새 눈발이 중얼중얼 잠꼬대처럼 내리고 / 허기진 도로는 뜨거운 피를 삼킬 때 / 여린 숨은 하얗게 지워진 꿈을 꾼다 -김나비 「도로 위의 잠」전문 문득 그 어둠 속의 고라니가 나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거친 시간을 건너며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아니, 지금도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진정 나의 길인가? 그 밤의 어두운 도로에서 갈길 몰라 서성이던 고라니처럼 지금도 나는 내 인생의 길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길을 걸은 적이 있었는가? 이 길은 지금 맞는 길인가? 내가 가는 길이 험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험난한 길일지라도 잘 헤쳐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올 한해 절망을 희망으로 옮기는 따스한 날들이 가득하길 바란다. 오늘 내 모든 두려움이 기우였다고 미소짓는 날이 오길 기도한다. 아자~!
누군가를 본다는 것, 자세히 그를 본다는 것, 그것은 관심이고 애정일 것이다. 관심이 없다면 보지 않을 것이며 더군다나 애정이 없다면 자세히 볼 이유가 없다. 로버트 카메룬의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나비족에게는 '사랑한다'는 단어가 없다. 대신 그들은 'I see you'라는 문장으로 그 감정을 대신한다. 1편을 보았을 때 그 문장이 무척 인상 깊었다. 하여 그 문장을 시 강연 할 때 종종 예를 들곤 했다. 시를 쓸 때 사물을 자세히 애정 어린 눈으로 봐야 한다고. 그래야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며 사물의 언어를 읽을 수 있다고. 깊게, 찬찬히, 꼼꼼히, 자세히, 세상을, 주변을 관찰하는 시선. 그것이 곧 사랑의 시선이고 시인의 마음이라고. 얼마 전 아바타 2편을 봤다. 2편은 가족 간의 사랑을 주 테마로 잡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사랑이라는 단어는 없다. 그들은 서로를 자세히 봄으로써 서로의 애정을 느끼고 교감했다. 2편에서는 제이크 설리가 나비족의 족장이 되어있다. 그는 판도라 행성에서 가족을 이루며 평화로운 나날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를 다시 찾아온 지구인들이 그들의 터전을 빼앗으려 위협한다. 결혼하지 않은 1편에서 그는 지구인들에게 대항해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2편의 설리는 가족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아버지였다. 지구인들에게 대항하기보다 가족을 보호하는 것을 선택한다. 설리는 그들을 피해 물의 나라로 숨는다. 1편의 설리였다면 지구인에게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웠겠지만 가족을 가진 그는 감정을 억제한다. 그것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들끓는 감정을 조절하고 자신을 내려놓고 가족의 안위를 위해 참고 또 참아야 하는 시간, 그 인내의 세월을 부모가 되지 않아본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설리의 모습에서 문득 나의 아버지를 만난다. 강가에 서서 겨울의 조각칼 소리를 듣는다 강물에 입 맞춘 비료 포대 싸늘하게 양각되고 부러진 나뭇가지 강의 팔에 박혀 실핏줄로 상감될 때 숨 놓은 얼음 위에 멈춰진 썰매는 기억 속에 음각된 당신을 데려오고 썰매를 만들어주던 사포 같은 당신 손이 스친다 배추를 갈아엎던 날 강가에 홀로 서서, 하얗게 담배 연기만 피워 올리던 당신 처진 어깨로 말없이 언 강을 바라보며 삶의 무게를 조각하던 아버지 아픔을 얼리기엔 겨울 강이 최고라며 얼지 못한 바람이 귓가에 속삭일 때 백구의 컹컹 짓는 소리가 물에 닿아 얼어 간다 -김나비 시 「겨울 판화」전문 1편이 개봉되고 13년 만에 개봉되었다는 영화는 13년의 간극 만큼이나 화려한 영상미가 돋보였다. 물의 길이라는 제목처럼 물속의 풍경은 황홀하다. 내가 물속을 유영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답게 제작된 영상에 인간의 한계는 어디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더 울림을 준 것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을 섬세하게 그려낸 점이다. 보통 인간은 자신의 두뇌를 10% 정도 사용한다고 한다. 그 10%를 사용한 사람 머리에서 이런 환상적이고 애잔한 감정선을 건드리는 작품을 만들어 냈는데, 그 이상을 사용한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상상하며 창밖으로 눈을 준다. 부모로서의 무게감과 자식으로서의 죄책감이 밀려오는 겨울밤이다. 53m가 넘는 19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한참 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검은 창 위로 비치는 내 모습 위로 아버지가 설핏 스친다. 아버지를 그리며 살아생전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가만가만 되뇌어 본다. "I see you!"
등단을 꿈꾸는 예비 작가라면 한 번쯤 겨울에 가슴앓이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연유는 해마다 봄이 아닌 겨울에 신춘문예 당선자가 발표되기 때문이다. 나도 그 가슴앓이를 했던 사람 중 한 명이다. 일간지에 원고를 보내놓고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 되면 전화기를 손에 달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화장실에 갈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핸드폰의 벨 소리에 촉을 세웠다. 혹시라도 당선 소식이 왔는데 놓칠까 봐 평소에 받지 않는 모르는 전화번호도 다 받았다. 연락이 없는 날이 계속되고 그런 밤이면 작은 공벌레처럼 어둠 속에 몸을 말고 뒤척였다. 그리고 내 영혼을 다 털어 넣은 작품이 버려진 것을 생각하며, 다시는 시를 안 쓰리라 다짐에 또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 시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다시 겨울이 오면 봄, 여름, 가을에 작업했던 시들을 모으고 가르며 신춘문예에 맞는 작품들을 선별했다. 그러나 선별하려고 막상 읽어보면 독창성이 없는 것 같고 시적 언어가 너무 모자란 것 같고 제대로 된 작품들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몇 년을 투고하고 또 투고하다 포기하고 싶어질 무렵 드디어 전화 한 통이 날아들었다. 하늘이 눈을 폭죽처럼 쏟아내던 날로 기억이 된다. 문화부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중복 투고나 표절 검사를 해 봐서 특별한 사항이 없으면 당선 발표할 예정입니다. 지면에 발표하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 중후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멍하게 앉아있었다.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팠다. 꿈인 것 같아 볼을 몇 번이고 꼬집어 보기도 했다. 세상을 다 얻을 것 같은 기쁨이 나를 감싸고 돌았다. 돌아보면 그 겨울 날아든 전화 한 통이 나에게 지금까지 시를 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었던 것 같다.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문학과는 다른 일을 하다 뒤늦게 시의 길을 접어선 나에게 신춘문예는 넘을 수 없는 문처럼 견고하게 보였다. 아무리 두드려도 내 손만 아플 뿐 몇 년간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너무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 들려온 당선 소식, 세상의 그 어떤 기쁨과 맞바꿀 수 없는 기별이었다. 가끔 시 쓰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내려놓고 싶을 때면 홀로 읊어보는 시가 있다. 바로 박노해 시인의 시이다. 대지에 가뭄이 들고 생명이 타들어 갈 때 인디언들은 기우제를 지낸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기적처럼 비가 내린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니까 -「인디언의 기우제」 부분 혹시나 신춘문예에 낙방하여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시인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싶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날은 온다. 사람들은 자신이 몇 도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염없이 끓기를 기다리는 것은 얼마나 애간장을 녹이는 일인가. 그러나 0.1도를 채우지 못하고 포기하지 마시라. 당신은 지금 99.9도이다. 또 당선이 되어 기쁨을 누리고 있는 시인들에게 말하고 싶다. 신춘문예 당선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시인으로의 여정이 멀고도 험할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시에 개인의 희로애락만 담는 것이 아니고 사회를 담고 역사를 담아야 한다. 시가 당신을 거부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좌절의 그림자가 찾아온다면 신춘문예 당선 당시의 그 두근거림과 희망의 순간을 떠올리길 바란다. 그리고 다시 무릎을 일으켜 세우길 바란다. 끝없는 시의 레이스에서 지치지 말고 끝까지 완주하길 바란다. 이것은 아직도 시 숲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에게 하는 겨울 다짐이기도 하다.
카트에 동전을 밀어 넣는다. 덜컹거리는 카트를 밀고 식자재 코너로 향한다. 메모지를 꺼내 하나하나 체크 하면서 장을 본다. 미역을 사고 케이크를 사고 잡채 만들 재료를 사고 홍어를 사고 동태 포를 사고 고기를 산다. 꼭 필요한 것만 샀는데도 영수증 길이가 허리를 감고도 남겠다. 12월은 동아리 연말모임에 자연인들 모임에 직장 친목회 모임에 다양한 행사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으뜸인 행사는 단연 엄마의 생신이다. 구십이 다 된 엄마다. 어제 보고 왔는데 다음날 바로 전화해서 "언제 와?"라고 아이처럼 우는 엄마다. 그러기에 더더욱 마음을 다해 준비해야 하는 일이다. 고속도로를 탄다. 두 시간을 달리는 동안 휙휙 스치는 잎 떨군 나무들이 마른 팔을 흔들며 쳐다본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다 내려놓고 나면 왜 쓸쓸해 보이는 걸까. 톨게이트를 지나 마다리에 접어든다. 곳곳에 빈집이 눈에 들어온다. 엄마가 사는 바로 옆집 대문은 팔이 빠진 듯 기울어져 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반듯한 집이었다. 아주머니가 서울 아들네로 가고 불과 6개월 정도 지났을 뿐인데 낡은 집이 되었다. 주인 잃은 텅 빈 집을 지나 친정집 입구에 들어선다. 백구가 꼬리를 흔든다. 가끔 보는데도 여전히 날 알아보는 백구,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장 본 물건들을 옮긴다. 앞치마를 두르고 가족들 저녁 준비를 한다. 곧이어 조카가 오고 언니가 오고 올케가 오고 동생 내외가 온다. 한 사람씩 현관을 들어설 때마다 엄마의 얼굴에 박꽃이 핀다. 저마다 바쁜 일을 뒤로 하고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 가족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 옥수수 알처럼 환한 이를 드러낸다. 새삼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노을 지는 저녁, 마루에 배를 깔고 다리를 까딱이며 그림을 그리던 동생. 다니던 출판사에서 출고 전 가져다준 새소년이란 어린이 잡지를 내게 내밀던 언니. 나를 옆에 앉혀 놓고 알퐁스도테의 별을 읽어주던 스포츠머리 오빠. 오빠와 싸우고 몰래 그의 책에 구멍을 뚫어 놓으며 분풀이하던 내 모습. 며칠 뒤 범인으로 지목되어 머리를 쥐어 박히던 영상들. 오빠만 귀히 여기는 엄마에게 투덜대기도 했지만 결국 엄마를 지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오빠의 몫이다. 어느새 중년을 훌쩍 넘긴 형제들이 둘러앉아, 옛 시간을 소환하여 도란도란 웃음꽃을 피운다. 사회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사람은 없지만, 사회에 폐 끼치며 산 사람도 없다. 그런 우리들을 보며 엄마는 그저 아이처럼 웃는다. 몇 시가 되었을까. 주방에서 들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다. 나가보니 올케다. 하나뿐인 며느리다. 시어머니 생신이 신경이 쓰이긴 했나보다. 12시까지 마을 회관에 어르신들이 오신다고 한다.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고기를 볶으며 그간 살아온 이야기들을 푼다. 남편 험담과 아이들 염려는 고명처럼 얹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동생이 나와서 돕는다. 음식을 다 장만하고 나니 11시다. 남자들을 대동하여 쟁반에 음식을 담아 마을 회관으로 향한다. 어르신들이 모여들고 소박하지만 우리가 준비한 생신 상을 차려 낸다. 흐뭇한 미소를 방사하는 엄마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틀이 쏜살처럼 지나가고 나는 차에 시동을 건다. 절뚝이며 마당에 나와 배웅하는 엄마를 안아준다. 껍질만 남은 작은 몸이 내 품 안에 들어온다. 가슴 속에 쏴 하고 찬바람이 일렁인다. 이런 생일상을 얼마나 더 차려줄 수 있을까. 진정 엄마를 위한 시간이었을까. 이 모든 것이 나 자신을 위한 일은 아니었을까. 결국은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한 일은 아닐까. 사이드미러에 보이는 엄마의 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내 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는 엄마. 언제나 그리운 나의 엄마. 그 그리움을 마당에 남겨두고 나는 길을 나선다. 내일이면 또 엄마에게 전화가 올 것이다. "언제 와?" 그 목소리마저 그리울 날이 오겠지.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남겨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