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나에게 주어진 이 작은 글 공간의 이름을 '사잇길'이라 지었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길'이란 뜻이었다. 그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길이 아니라 수풀이 우거진, 그리고 혼자 또는 두어 명이 오순도순 걸어가는 오솔길의 이미지를 담고 싶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한 길, 사람과 사람을 잇는 길이란 역시 '사랑'이라는 정답이 이미 나와 있다. 하지만 사랑은 예로부터 모든 예술의 주제요, 배경이었다. 사랑이야기가 문학의 처음이자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긴 세월 수많은 사랑타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명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어떻게·'라는 과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너무도 빤한 결론이지만 '어떻게'라는 과정이 있어서 누구나 내일을 꿈꿀 수 있다. 사랑이나 삶이 그러하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길은 수천수만 갈래의 길이 있을 터이고 그 길을 찾는 일은 문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평생 허겁지겁 쫓기며 살아온 나의 군 생활 중에도 다소 여유로운 시절이 있었다. 1993년 공군대학 교관 시절이었다. 그때 우연히 막 개봉한 영화 '서편제'를 보게 되었다. 그 영화가 끝나고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한이 서린 국악의 여운으로 인해 제작자들의 이름이 이어지며 올라가는 흰 스크린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진즉 내 속에 있었지만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던 정(情)과 한(恨)의 실체를 그 영화가 명징하게 깨닫게 해 준 순간이었다. 영화의 대단원은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남매였던 두 남녀가 밤새도록 소리를 통해 해후하고 또 헤어지는 장면이었다. 서로의 생사만이라도 알고 싶어 애절하게 찾아 헤맸던 그들이었지만 다음 날 아침 아무 말 없이 다시 떠나갔다. 그것이 우리식 사랑인 정이요, 또 맺힌 한을 풀어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우리에겐 '미운 정'이란 말이 있다. 미우면 미운 것이지 왜 거기에 따뜻한 뜻이 담긴 정이란 말이 붙었을까? 사실 사랑의 복잡한 감정을 이처럼 잘 표현한 낱말도 없을 것 같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미워졌지만 그렇다고 놓아버릴 수 없는 그 아픈 심정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고운 정과 미운 정이 서로 교차되면서 쌓이고 깊어진 멍울을 '한'이라고 우리는 풀이하고 있다. 그래서 정과 한은 서로 원인과 결과일수도 있지만 또 한 몸일 수도 있다. 젊었을 때에는 잘 몰랐지만 나이가 들면서 '한'이란 단어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평생 한스러운 일을 겪지 않았고, 또 그것이 내 속에 쌓였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그 아련하고 저릿한 감정이 내 속에서 저절로 동화되어 일어나는 것이다. 한이 담긴 영상이나 음악을 감상할 때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어온다. 내 핏속에 흐르는 정한(情恨)의 농도가 더 진해졌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삶의 과정에서 입게 된 크고 작은 생채기가 아니라 삶의 실체를 알아가는 통찰의 지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풍성해진 감성의 동화작용은 세상을 좀 더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사잇길 이야기가 샛길로 빠져 갈팡질팡해온 것 같다. 나는 사잇길이라고 여겼지만 독자들은 잘 못 들어선 샛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2년 동안 나름대로는 사잇길을 찾으려 했지만 의지만 앞세웠다는 후회를 하게 된다. 뜻은 그럴싸했는지 모르지만 속은 텅 비었다는 부끄러움이 앞선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독자들의 공감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에게 진실해야 하지만 무엇인가를 향해 골똘히 사색하는 과정이 좋아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이 굳어버리거나 나만의 좁은 틀에 갇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으려한다. 그 동안 부족한 글을 감내해준 독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아울러 이 지면을 허락해준 충북일보에게도 머리 숙여 고마움을 전한다. 이제 다음 사람에게 사잇길을 찾는 과제를 넘기며 더 재미있고 다양한 사잇길 이야기를 기대한다.
늦가을 볕이 허리를 낮추며 거실 안쪽까지 찾아들었다. 서늘해진 바람에 쫓기듯 집안으로 들어와서는 품고 있던 온기를 내어놓는다. 들녘과 산기슭을 쫓아다니며 곡식과 과일을 여물게 하느라고 온힘을 다 소진하였을 텐데 여기까지 찾아와 주어서 고맙다. 말간 볕 자락을 쫓아 창밖을 내다본다. 초등학교 운동장가에 가득 피었던 코스모스는 간 곳 없고 이젠 붉고 노란 단풍이 교정을 서정으로 물들이고 있다. 나무들 사이로 만국기가 펄럭이던 옛날의 가을운동회가 그려진다. 시골마을의 잔칫날, 어린학생들의 축제였지만 우리 청군이 졌을 땐 며칠 동안 속이 상해 우울했다. 나는 백군보다 하늘색 청군을 더 좋아했다. 왠지 모르게 청군이 더 빠른 것 같았고 힘도 센 것 같았다. 어쩌다 백군이 되었을 때는 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청군이었을 때 지고나면 무척 억울해했다. 예나 지금이나 가을볕은 여전히 교정에 가득한데 청군을 좋아했던 소년이 어느덧 영원한 백군이 되었다. 하릴없이 서성이던 시선이 교실 옆 옹색한 주차장 근처에서 멈추어 섰다. 빨간 승용차 한 대가 고추잠자리처럼 앉을 듯 말 듯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이윽고 제자리를 잡았는지 날개를 접고 젊은 여성운전자가 차에서 내렸다. 주변을 한 번 힐끗 살피고 나서 이정도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는지 교무실 쪽으로 총총걸음으로 걸어간다. 도로를 쌩쌩 달릴 때는 제 세상인 것처럼 신나지만 촘촘한 틈새를 비집고 한 몸을 끼워 넣기가 저렇게 어렵다. 이 넓은 세상 어디에 몸 하나 비비고 누울 자리가 없겠냐는 똥배짱이 아니고서는 두 다리 뻗고 잠자기 어려운 세상이다.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즐기는 세상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피곤에 절어있다. 물론 노파심에 지나지 않겠지만 아들과 딸의 사는 모습도 늘 아등바등하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 쌍둥이를 낳아 매일 전쟁을 치르듯 살고 있는 딸에게 물었다. "살만하냐?" 곧바로 나온 대답은 일단 시원하다. "그럼요!" 그러고 보니 물어보나마나 한 질문과 빤한 대답이 30여 년 전에 물려받은 그대로다. 가을볕은 땅위에 나리면서 잘게 부서진다. 바닥에 노랗게 쏟아진 은행잎들, 찰랑대는 저수지 물 위,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꽃들 위에서 부서지고 반짝인다. 그런가하면 가을볕은 텅 빈 가슴 속을 구석구석 비추기도 한다. 어둑해진 내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나무들이 화려했던 잎들을 조용히 내려놓고 스스로를 돌아보듯 나도 가을볕 앞에서 거울 속 나를 마주하게 된다. 시인 윤동주도 이맘때에는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갔나 보다. 그리고 우물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우물 속에는 달과 구름이 박힌 하늘, 그 하늘에 부는 가을바람이 있다. 그것들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서 돌아서고, 돌아가다가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여워져서 도로 가 들여다보고, 미운 그 사나이를 우물에 두고 가다 생각하니 이번엔 그 사나이가 그리워진다고 했다. 윤동주의 '자화상'이란 제목의 시다. 암담했던 시절 좁은 우물 속에 갇힌 자신을 미워하면서도 괜찮다고 다독이는 정경이 눈물겹다. 나도 그렇게 자신에게 관대할 수 있었던 때가 언제였던가 싶다. '그동안 잘 살았지' 라고 생각하다가도 조금씩 고개를 드는 아쉬움으로 인해 결국은 고개를 젓고 만다. 아직도 가보고 싶고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이 남아서일까? 가을볕의 정점은 한낮이라기보다 해가 저 멀리 산 그림자 뒤로 잠겨 갈 무렵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모습은 사라지면서도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아름다운 퇴장으로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조금씩 느려지면서 짙푸른 '이내'가 시작된다. 이내는 낮과 밤을 이어주는 회랑이다. 낮의 기운과 밤의 기운이 장막으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교차되도록 포옹의 시간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 시간을 통해 하루의 피로와 갈등을 쓸어내고 달콤한 휴식과 새로운 여명을 꿈꿀 수 있다.
들녘으로 나가면 저절로 배가 부른 수확의 계절이다. 하늘 천정이 한껏 높아져 숨 쉬는 공간, 생각하는 공간마저 넓어졌다. 그리고 선남선녀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행진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이렇게 하늘 푸르고 볕 좋은 시기를 놓칠 새라 이곳저곳에서 청첩장이 날아든다. 한동안 소식이 감감하던 친구의 전화는 대개 자녀의 결혼소식을 전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아야 할 반가운 소식이 다소 조심스러워졌다. 올봄에 날짜를 잡았다가 코로나상황을 살피며 미루어 왔는데 이젠 더 이상 전전긍긍할 수 없다는 절박한 친구도 있다. 결혼식장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고 체온을 재는 것은 기본이고 뒤풀이 연회를 할 수 없어 간단한 답례품으로 대신한다. 인원이 제한되어 결혼식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곧바로 돌아갈 때도 있다. 이럴 때는 서운하기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그동안 결혼식을 집안세력 과시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위한 계기로 삼는 폐단도 없지 않았다. 지나치게 호화로운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한 순간에 결혼식 문화가 바뀌어 가고 있다. 추석을 앞둔 주말에 아끼던 제자가 결혼할 여자 친구와 함께 찾아왔다. 주례를 부탁하려나보다 생각했는데 그냥 결혼 인사와 함께 청첩장을 건네러 왔단다. 요즘 대부분 인터넷 청첩장을 SNS로 전하고 마는 세상인데 일부러 찾아와 준 그들이 고마웠다. 제자의 주례를 서는 일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많은 사람 앞에서 두 사람의 결혼식을 주관하고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리가 개인적으로도 보람찬 일이다. 문제는 주례사이다. 주례사는 축하와 더불어 인생의 선배로서 덕담을 전한다. 하지만 신랑신부는 물론 하객들도 의례적인 말로 흘려듣기 일쑤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주지 않으면 무의미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간단하게 끝내면 성의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별도의 주례를 내세우지 않고 양가 혼주가 직접 하객들에 대한 인사와 신랑신부에게 당부를 건네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문화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생각을 실천하려다가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다. 한 제자가 결혼을 하겠다며 주례를 부탁했다. 하지만 주례 없는 결혼식 모습을 소개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고 거듭 말했지만 그는 완곡한 거절로 받아들였는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결혼식 당일, 그 결혼식 주례는 예식장에 고정적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선생님이 나를 대신하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진심이 담긴 사과를 했지만 제자는 그 이후 연락을 끊었다. 결혼식장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또는 딸에게 건네는 몇 마디 덕담과 당부는 진지하면서도 아름답다. 그 말을 듣는 신랑은 코끝이 찡해지고 신부는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 장성하여 품을 떠나는 아들딸에게 건네고 싶은 삶의 조언은 며칠 밤을 새워도 다 못할 것이다. 그것을 몇 가지로 간추리려고 부모들은 밤잠을 설친다. 몇 년 전 어느 선배님의 덕담은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먼저 신랑의 아버지가 단상에 올라가 두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그 다음 신부아버지 차례였다. 굳이 단상 아래에서 마이크를 받아든 그분은 하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짧고 의미 있는 말로 마무리했다. "윤경아, 나의 딸로 와서 그동안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살길 바란다.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인지 이미 너는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네 엄마가 사는 모습을 보았지? 그렇게 살면 된다." 얼핏 아내자랑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어차피 딸은 엄마를 닮아가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딸에게 엄마처럼 살라고 한 부탁에는 좀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요즘 우리사회는 가족중심이고 그 가운데에 엄마가 있다. 아버지는 단지 대표적 의미를 가졌을 뿐이다. 엄마가 가족이라는 사회의 중심역할을 지혜롭게 해낼 때 가족은 따스한 사랑과 화목한 보살핌 속에서 단란한 행복을 누린다. 그 막중한 책임을 출가하는 딸에게 강조한 동시에 그 동안 가족을 위해 수고한 아내를 위로한 말이었다. 아름다운 말 한 마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이제 더위도 지쳐 막바지에 이르렀나 보다. 가을이 다가오면 귀가 밝아지는 이유가 풀벌레들의 합창 소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알게 모르게 공기 중의 습기가 빠져나가고 한층 투명해진 아침 산책길도 크고 작은 새소리들로 부산했다. 늘 다니던 산책길이었지만 오늘 아침은 새로운 아침, 새로운 일상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문득 저들의 소리 소리들을 해독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애절하게 부르짖고, 시끄럽게 재잘대는 저들의 소리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지 궁금하다. 똑같은 음의 반복으로 들리는 저 소리에도 분명 암호처럼 내밀한 뜻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에 개입할 수는 없어도 한 철을 살다 가는 저들은 무엇을 걱정하고, 무슨 말로 사랑을 청하는지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 저들의 삶도 우리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증명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비록 미물에 지나지 않지만 저들의 삶 또한 고단하고 아슬아슬할 텐데 어찌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가 없으랴. 어쩌면 인간들보다 더 치열한 생존경쟁을 겪고 있지만 더 의연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서로 아등바등 싸우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라도 있다면 귀담아 들어보고 싶다. 옛날 산속에서 오랜 기간 수행을 한 선사님들은 짐승이나 새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했는데 글로 남겨놓지 않아서 내용을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러한 사실이 있다고 하니 나도 주의 깊게 저들의 삶을 살핀다면 어느 정도의 언어는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종류의 언어를 주고받지만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요즘 사람들의 언어보다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언어에는 꼬투리와 뒷다리가 있지만 저들의 언어에는 말로써 서로 할퀴거나 걸고넘어지는 반칙은 없을 것 같다. 이기주 작가는 말했다. 사람들의 말에는 온도가 있고 품격이 있으며, '무엇을 말할 것인가' 보다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동영상이 두 달도 안 되어 1억 회의 유튜브 조회를 돌파하더니 얼마 후 4억 회를 넘고, 8억을 뛰어넘었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은 그는 미국, 호주, 프랑스를 거쳐 영국 명문대 옥스포드 강단에 섰다. 한국의 한 무명가수에 불과했던 그가 갑작스레 유명인사가 되어 최고의 지성인을 자부하는 사람들 앞에 섰을 때, 그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것도 영어로…. 하지만 단숨에 좌중을 휘어잡았다. 그가 사용한 영어는 지극히 단순했다. 언어를 통한 의사전달이라는 것이 결코 지식이나 언변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평소 사용하던 말투로 마치 친구 몇 명이 모인 자리에서 수다를 늘어놓듯 말했다. 때론 비속어를 섞어가며 풀어가는 그의 이야기는 그의 춤과 노래 못지않게 사람들을 웃기고 감동시켰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저의 춤을 따라하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몸을 마구 흔들며 말춤을 추는 여러분들이 행복해 보여서 기쁩니다. 그리고 미안한 점은 한글로 된 노래가사를 여러분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란 점입니다. 그러나 멋지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도 상관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각자 자신만의 '강남스타일' 가사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나는 나대로의 가사로 노래 부르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사로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춤을 춥니다. 이게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 덕분에 오늘 대한민국의 한 가수가 옥스포드에 서게 되었고, 여러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이건 정말 꿈같은 일입니다.』 이즈음 목이 터져라 울어대는 매미의 언어는 암컷을 향한 절박한 구애의 노래다. 하지만 그 노래에 실린 가사를 사람들은 가을의 시와 음악으로 연결 짓는다. 원래의 뜻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멋있게 해석한다. 그래서 가을엔 아름다운 노래들로 가득하다. 하물며 가을엔 바람도 사랑노래를 부른다.
세상이 확실하게 바뀌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포에 기존의 인간사회가 전복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복작거리며 사는 소소한 행복과 침 튀기며 떠드는 즐거움도 빼앗겼다. '몸은 언택, 마음은 컨택'란 구호가 나왔다. 사람간 거리 유지가 서로 기대어 살던 마음마저도 멀어지게 한다는 반증이다. 다수의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개인은 한없이 작아졌다. 만물의 영장이라던 우리가 이렇게 허약한 존재였던가· 얄팍한 마스크 한 장에 삶을 의지해야 할 만큼 부실한 건축물 속에서 지금껏 살아왔단 말인가? 아직은 일시적 현상일 뿐이고 곧 극복될 것이라는 바람으로 버티는 것 같다. 인류의 역사가 그래왔던 것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공동체적 믿음이 있기에 제자리를 유지하고 있나 싶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Before Corona 시대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니 With Corona 시대를 대비하라고 한다. 나에게 당면한 현실은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이다. 지난 학기는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국가 정책과 학교에서 제시하는 지침에 따라 강의를 진행했다. 이론과목은 매주 동영상을 만들어 올리고 학생들은 정해진 시간에 그것을 보면서 각자의 집에서 공부했다. 두세 명씩 그룹으로 진행하던 실습은 한 명씩 분리하여 단축된 과정으로 운영하였다. 비상시국이란 이름하에 면피성 강의를 한 것이었다. 학생들도 어쩔 수 없이 따랐다. 하지만 기말고사를 통해 인터넷 강의가 어떠한 것인지 여실히 드러났다. 내가 의도했던 방향과 학생들이 이해하는 수준의 괴리가 컸다. 특히 기초적 개념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웠나 보다. 우선 바뀐 학습체계에 맞추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나의 책임이 크다.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불어넣어야 하는 측면에서도 노력이 부족했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곧 시작될 2학기 수업이다. 다시 시작되는 온라인 강의로 부족했던 부분의 보충과 제대로 된 학습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냥 받아들이고 적응하라는 말을 반복해야 하는가? 모든 분야가 다 어렵지만 특히 내가 전공과목으로 가르치는 항공분야는 최악의 상황이다. 지금 당장 바이러스 백신이 시중에 배포된다고 하더라도 관련업계가 정상화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지 가늠하기 어렵다. 수많은 기성 조종사들이 조종간을 놓고 실업자로 밀려났다. 그런데도 각 대학의 항공운항학과와 민간비행교육원에서는 끊임없이 자격증을 갖춘 예비조종사를 쏟아내고 있다. '졸업=실업자'가 되는, 그야말로 레드 오션(Red Ocean)의 극한이다. 졸업이 두려운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자니 이제 막 출발점에 선 학생들에게 너무 가혹하고, 희망을 실어 말하면 상황을 호도하는 것이어서 진퇴양난이다. 언젠가 회복될 것이니 묵묵하게 주어진 학업에 충실하자는 말도 그들에겐 무책임한 말로 들릴 것이다. 함께 고민해보자는 말 밖에 뾰족한 대안이 없어서 답답하고 안타깝다. 지난 1학기를 함께한 2학년 학생이 찾아왔다. 멋진 조종사의 꿈을 안고 이 길을 선택하였는데 암담한 현실 앞에서 전진도 후진도 못하겠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전진을 하자니 불확실한 앞날을 알면서 비싼 비행실습비 투자가 두렵고, 후진을 하자니 꿈을 접는 일이라 청춘이 아프다는 것이다. 일단 그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어 주는 데에 집중했다. 그런 다음, 조심스럽지만 힘주어 답했다. 인생은 확률게임도 아니고 사다리타기 게임도 아니다. 어느 길을 가야 가장 성공적일지 확률로 계산하기는 어렵다. 또한, 한 번 선택하면 결론까지 곧바로 달려가야 하는 사다리타기와 같을 수는 없다. 설사 한쪽 길을 택하여 걸어가는 중간에 잘 못 들어섰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걸어간 만큼은 남는 장사다. 내 기억으로도 성공과 실패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시작하고 일어서는 것이 인생의 묘미다. 그러니 지금 선택을 너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코뿔소처럼 돌진하라.
식탁 위에 뭉툭하게 생긴 머그잔 하나가 있다. 꽃그림에 잔 받침까지 갖춘 찻잔과 반짝이는 유리컵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마당발로 활약한다. 생긴 것과는 달리 속에 무언가를 담고 있는 시간이 많고, 개수대에서 설거지를 기다리는 시간도 다른 그릇에 비해 많은 편이다. 그러나 아내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연유는 다른 데에 있다. 널찍한 속과 푸짐한 궁둥이의 안정감이 무기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예쁜 분위기를 집착하는 아내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없다. 다름 아닌 통짜로 된 허리에 아들과 사이좋게 찍은 사진을 담고 있어서다. 팔짱을 낀 아들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댄 아내는 마냥 행복하게 웃고 있다. 커피나 물을 마실 때 큰 귀 모양의 손잡이를 잡고 잔을 들면 엄마와 아들의 다정한 모습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거실의 몇몇 액자에도 비슷한 분위기의 가족사진들이 있지만 그것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카메라에 맞춰진 웃음이 아니라 봄바람이 앞 머릿결을 살랑살랑 흔들 때의 환한 모습이다. 머그잔이 그릇의 기능을 넘어서 가족들에게 따스한 온기를 전하는 전령사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현역시절 미국 국방성 펜타곤에 출장을 갔다가 선물로 커다란 머그잔을 받았다. 집에 갖고 와서 꺼내보니 멋진 펜타곤 사진을 표면에 담고 있어 무척 값어치가 나가는 선물로 여겨졌다. 그런데 막상 그 큰 컵에 담아서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미군들이 한나절 먹을 커피를 담아 들고 다니며 일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우리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거실 장식장에서 펜타곤방문 기념품으로 폼 나게 지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나라에 대한 동경이 사그라지듯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했고 결국 건넌방 책상 위로 옮겨졌다. 지금 여러 가지 필기구를 담고 있는 필통의 역할을 십 수 년째 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되리라는 운명은 아니었겠지만 버려지지 않고 이차적인 역할에 만족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문학을 하는 지인들과 함께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카페에 간적이 있다. 카페에서는 커피를 머그잔에 담아 주었다. 골판지 목도리를 한 일회용 종이컵 대신 무색의 표면에 자그마한 로고가 들어있는 머그잔이었다. 색다른 느낌을 안겨준 것은 제각기 다른 모양을 가진 머그잔들이었고, 똑같은 종류의 커피를 담고 있어도 조금씩 그 맛이 다를 것 같았다. 머그잔은 대부분 비슷비슷한 모양이란 관념이 깨져서 그런지 속에 담긴 커피의 맛은 특별했다. 사실 나는 커피의 깊은 맛을 잘 모른다. 오히려 커피의 맛은 향이 퍼져 있는 주변 공기의 맛이고 앞에 앉은 사람과 주고받는 정다운 대화의 맛이라고 생각한다. 그날은 약간 둔하게 생겼으면서도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진 머그잔이 커피의 또 다른 감미를 더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끼며 마신 커피가 바닥을 보이고 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과정에 작은 소리가 느껴졌다. 신기해하며 잔을 흔들었더니 잔속에서 투명한 소리가 났다. 아마 머그잔을 만들 때 아랫부분에 빈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 작은 구슬 하나를 넣어 둔 것 같았다. 목을 타고 내려간 커피의 잔향이 더욱 진해지는 순간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정류장 유리벽에 울상을 짓고 있는 커다란 곰이 눈에 띄었다. 그림 아래 써 놓은 글은 나를 그 자리에 잠시 서 있게 만들었다. "왜 그렇게 사니? 미련곰탱아!"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주장하면서 살라는 어느 사회단체의 선전 문구였지만 앞만 바라보며 살아온 나에게 던지는 말 같았다. 평생 다양한 분위기에서도 잘 어울리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머그잔처럼 살고 싶었다. 내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조금은 특별한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그 직업으로 인해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렇게 살아온 나는 지금 머그잔인가? 미련곰탱이인가?
다시 6월이다. 한층 진해진 초록의 산하에 강한 햇볕이 쏟아져 내린다. 땅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열기가 나른한 여름의 시작을 통고한다. 유독 울타리를 타고 넘은 덩굴장미는 뜨거운 햇살을 기다렸다는 듯이 진홍색 생기를 발산하고 있다. 문득 군에서 보낸 젊음의 시간들과 먼저 간 전우들의 모습이 꽃잎 위에 겹쳐진다. 마치 전쟁의 상흔을 안고 있는 사람처럼 6월은 늘 가슴 저린 기억의 재현으로 시작된다. 14명의 동기생, 숱한 사연을 남기고 간 선배와 후배들, 야간비행 중 산화한 두 명의 부하조종사…. 국립묘지에 잠들어있는 그들이 나에게는 6월의 의미를 일깨우는 영웅들이다. 어렸을 적부터 유달리 전쟁영화를 좋아했다.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나에게 치열한 전쟁의 이미지는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군인의 길을 걷게 된 숙명이나 삶의 가치관은 전쟁영화를 통해 싹을 틔우고 길러왔는지도 모른다. 생도가 되기 전 힘든 군사훈련 과정에서 영화에서의 주인공처럼 멋있는 선배님을 만났다. 몸과 마음이 지쳐갈 즈음 훈련을 독려하는 선배님의 뜨거운 눈빛과 우렁찬 구령, 그리고 하루의 훈련을 마치며 남기는 한 마디 명언은 희망의 씨앗이었다. 나도 저렇게 멋있는 군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힘든 과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육년이 지난 후 대위였던 선배님은 불의의 비행사고로 순직하였다. 나는 한 명의 영웅을 잃었고 그는 내 가슴으로 들어와 묻혔다.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전쟁영화는 '라이언일병 구하기'다. 여느 전쟁영화처럼 그 영화에서도 영웅이 등장한다. 하지만 초인적인 신념이나 전투력을 발휘한 영웅이 아니라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을 법한, 가장 평범한 영웅이었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불합리의 합리'였다. 국가적 운명이 달려있는 전쟁 상황에서 한 명의 병사를 구하기 위해 여덟 명의 베테랑 군인들이 죽음의 지역으로 투입된다는 사실은 분명 '불합리'였다. 그 임무를 부여받은 대장 밀러대위는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원들을 설득해야 했고, 임무 완수를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바쳐야 했다.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 집으로 돌아가면 모두 둘도 없는 아들이요, 형제요, 친구들이다. 전쟁 중이라고 해서 생명의 가치가 떨어진다거나 계급에 따라 차별이 생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명으로 인해 여덟 명이 희생된다 하더라도 일단 상부에서 떨어진 명령이라면 따라야 하는 것이 군대의 합리이다. 라이언일병은 평범한 가정의 사형제 중 막내였다. 세 명의 형들이 거의 동시에 전사하자 혼자 남은 라이언일병은 꼭 살려서 집으로 보내야 한다고 결정했다. 네 명의 아들을 모두 잃어버렸을 때의 부모심정을 국가에서 배려한 것이었다. 그러한 인간애로 말미암아 국민들과 전쟁터의 군인들이 더욱 용감해 질 수 있다면 불합리는 합리의 가치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감동적인 장면은 이미 두 명의 희생을 치르고 겨우 찾아낸 라이언일병이 정작 자기는 이 전장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다 소중한 생명을 가졌고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는데 자기만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의 어머니도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여덟 명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임을 예견할 수 있었다. 요즘 군대에서는 점점 불합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속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어항처럼 내부가 투명해지고 있으니 불합리가 자리 잡을 틈이 없을 것 같다. 불합리가 없으면 한층 공정해질 터이고 바람직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민간사회의 합리적 가치기준과 느슨한 규율이 투명해진 군대에 그대로 적용된다면 어떻게 될까. 군대는 민간사회와는 다른 특수한 존재이유를 가지고 있다. 군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민간사회의 잣대로 합리와 불합리를 재단하기 시작하는 순간 군대는 본연의 목적과 다른 길을 가게 마련이다. 만약 밀러대위가 사회에서 말하는 합리적 판단기준을 적용했다면 그는 결코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은 유난히 눈이 아프다고 말씀하셨다. 아침을 먹은 후 어머니를 모시고 읍내 안과병원으로 갔다. 평일이었는데도 제법 많은 분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이 노인들이었다. 한참을 기다린 진찰 결과, 눈물샘이 메말라 안구주변에 약간의 염증이 생겼단다. 점안액과 안연고를 처방 받아 병원 문을 나설 때 어머니는 내과진료도 받아보고 싶다고 하셨다. 모처럼 나온 김에 가고 싶은 곳은 다 들러서 가자고 말씀드렸다. 평소 자주 다니셨는지 늙수그레한 내과병원 의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별 진찰도 없이 두세 가지 약을 처방해 주었다.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갔더니 소화제와 골다공증, 고혈압 약이란다. 진찰을 하기 전 어머니는 셋째 아들이라고 묻지도 않은 답으로 나를 의사에게 소개하셨다.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나설 때 어머니의 손에는 약간의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늘은 지팡이 대신 아들의 손을 잡고 읍내 이곳저곳을 걸어가시는 어머니의 발걸음과 표정 속에는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다. 오랜 군 생활을 마치고 며칠간의 틈을 내어 시골 어머니와 단둘이서 시간을 보낼 때였다. 객지생활에 늘 지쳐있는 것 같고 가끔씩 왔다가 인사치레만 하고 바쁘게 돌아가던 아들이 오늘은 병원까지 동행해주니 어머니는 들뜬 표정이 역력했다. 평소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좀처럼 꺼내시질 않으셨지만 그 날 저녁에는 좀 달랐다. 이런저런 주변 친척들의 이야기며 육남매를 키우며 기쁘거나 아쉬웠던 지난 이야기들을 밤이 이슥해지도록 풀어놓으셨다. 사관학교를 나와서 전투조종사가 된 아들을 두었지만 혹시 자식자랑 끝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봐 남들 앞에 내놓고 자랑을 하지 못하셨단다. 뉴스에 비행기 사고란 말이 나오면 온 가슴이 덜컹하셨던 어머니다. 그럴 때마다 속을 다 태우셨지만 먼저 전화하시지는 않으셨던 어머니다. 그렇게 참고 참으며 마음속으로 기도만 했던 아들이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치자 비로소 시름을 놓으셨나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갑자기 자식자랑을 하고 싶어졌단다. 높은 계급으로 현직에 있을 때는 가만히 계시다가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범한 아들로 돌아왔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 듯 말 듯하였다. 내가 결혼을 하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어머니는 못내 서운해 하시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서두냐고도 하셨다. 알고 보니 어머니는 당신만의 남다른 기대를 안고 계셨던 것이었다. 형 둘과 누나가 좀 뒤늦은 결혼을 하면서 마음고생이 있었는지 셋째 며느리 감은 고르고 골라서 결혼시키리라 생각했단다. 조그만 시골 읍내이지만 자랑을 해도 되겠다 싶은 아들을 데리고 맞선 보는 장소에 나가고 싶었단다. 가끔 전화로 집에 한 번 다녀가라는 말을 스치듯 말씀하셨지만 그 속엔 어머니의 남모르는 바람이 담겨있었던 것이었다. 80년대 초반 무렵, 조종사들은 거의 모두가 부대 내에서 비상대기를 해야만 하는 시절이었다. 군대에 매여 산다는 애처로운 마음에 맞선이야기를 한 번 꺼내보지도 못한 채 마냥 기다리기만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사귀던 아가씨가 있어서 결혼을 하겠다는 허락이 아닌 통보를 받으셨다. 그렇게 한 번쯤 내어놓고 자식자랑을 하고 싶었던 어머니의 작은 소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어머니는 내성적이셨다. 선천적으로 당신자랑은 물론 자식자랑도 못하시는 분이었다. 혹시나 누가 시기라도 할까, 자랑이 빌미가 되어 잘못된 결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소심함으로 전전긍긍하며 속에만 담아두셨다. 그런 아들이 마침내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어미 곁에 와 준 것은 못내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그토록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던 아들의 손을 잡고 읍내 거리를 걷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할 때 손을 잡고 병원으로 데려가 주는 아들이 있다는 것, 그 아들과 밤늦도록 간직해오던 이야기를 후련하게 풀어놓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어머니가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얼마만인가? 마당을 쓰는 대빗자루 소리를 들어본지가…. "쓱~싸악~, 쓱~싸악~"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공원 산책길에서 이 소리를 들었을 때 잠시 딴 세상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기다란 빗자루로 무언가를 힘차게 쓸어내고 있는 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가면서 아마도 요즘 흔한 플라스틱 빗자루일터인데도 그 소리가 자못 정겹고 맑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 시간에 무엇을 저렇게 열심히 쓸고 있을까· 다가가는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속없이 불어대던 봄바람에 어지러이 흩어진 것은 수북했던 지난해 가을 낙엽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지기 시작한 꽃잎들과 꽃봉오리를 감싸고 있던 꽃받침 같은 봄의 흔적들도 꽤 있었다. 벌써 봄이 쓸려나고 있는가· 비질은 무언가를 한쪽으로 모으는 행위이다. 쓸모없는 것이라면 버리기 위한 비질일 터이고, 알곡과 같이 소중한 것이라면 갈무리하기 위한 비질이다. 행위의 목적이 다르므로 비질을 할 때의 느낌 또한 전혀 다를 것 같지만 실제 비질을 해본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등과 이마에 땀이 살짝 나도록 비질을 한 후 뒤돌아서서 빈 마당을 바라보면 비움을 향한 것이건 채움을 향한 것이건 비질이 주는 뿌듯함은 서로 맞닿아 있었다.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적, 시골집에 간 날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었다. 형제들이 다 모이는 날에도 그 일은 양보하지 않고 으레 내 일인 양 여겼다. 아버지가 손수 만드신 대빗자루는 제법 묵직하였다. 바싹 마른 대나무 잔가지들을 모아 다발로 묶고 약간 굵은 대나무로 자루를 만들어 넣었다. 보기에는 억세고 성긴 모습이었지만 가느다란 잔가지들의 탄력으로 인해 끝은 섬세하고도 옹골졌다. 집안의 음달지고 구석진 곳곳을 샅샅이 훑어내는 대빗자루의 힘을 다른 것으로는 따라갈 수 없었다. 빗자루에 쓸려 모아지는 것은 대개 삶의 흔적들이었다. 집안의 감나무 낙엽과 잔돌도 많았지만 콩이나 벼와 같은 곡식 알갱이들도 있고 조카들의 장난감, 종이 쪼가리, 몽당연필과 지우개 같은 학용품도 있었다. 드물게는 동전도 그늘진 곳에 숨어 있다가 낚싯대처럼 휘청대는 빗자루 끝에 걸려 마당 가운데로 나왔다. 그것들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생활의 가운데에서 밀려나 잊힌 것들이어서 작은 연민과 정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아침 일찍 마당을 쓸면 집안 전체가 환해지는 효과와 더불어 온 집안사람들을 깨우는 덤도 있었다. 대빗자루가 내는 청량한 소리는 귀를 자극하여 더 이상 잠자리에 누워있기 힘들게 했다. 모두들 부스스 일어나 마루로 나오면서 시골집의 하루가 시작되곤 했다. 큰 빗자루 비질은 아마도 산중의 스님만큼 고수가 있을까 싶다. 스님들은 새벽마다 절마당을 쓸어 가람을 깨끗이 한단다. 그것이 절집의 일상이면서도 중요한 행사인 것은 수행의 일부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 어느 스님은 평생 마당을 쓸다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단다. 커다란 빗자루가 마당뿐만 아니라 마음의 바닥을 끊임없이 쓸어내고 닦아내게 되어 마침내 심신이 청정해지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처럼 비질을 하는 것은 단순한 청소의 의미를 넘어서고 있음을 나도 경험하였다. 시원한 비질 소리가 난 곳은 공원의 화장실 앞이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산책로로 이어진 길과 화장실 앞마당을 쓸고 계셨다. 공원관리를 맡고 계신 분인지 아니면 봉사로 그 일을 하는 분인지는 모르지만 그분의 얼굴을 마주하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분이 들고 있던 빗자루도 내 상상을 깨고 매끈하게 잘 묶은 대빗자루였다. 나도 오랜만에 비질을 해볼까 했지만 그분의 우려 섞인 표정에 단념하고 가던 길로 돌아섰다. 그분도 옛날 나처럼 양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돌아서자 다시 시작된 대나무 빗자루의 경쾌한 음악소리는 어느 새 내 속의 마당도 깨끗이 쓸어버렸다. 마스크를 벗고 신선한 아침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알은체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친근감의 표시란다. 라디오 방송에서 아나운서가 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정말 그럴까?'하는 의아함이 솟았다. 하지만 곧바로 이 말의 뜻을 이해했고 공감이 갔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혼자 서먹서먹한 기분으로 서 있을 때, 누군가가 알은체하며 다가와 말을 건네면 무척 반갑고 고맙다. 굳어있던 마음이 풀어지면서 주변 분위기에 온기가 돈다. 알은체의 반대는 모른 체이다. 나는 그 사람이 반가워서 알은체하려고 다가가는데 그 사람은 나를 모른 체하며 지나쳐 버리면 기분이 어떤가? 처음에는 민망스럽다가 그 다음엔 서운하고 나중엔 괘씸하기까지 하다. 그 찬바람 도는 상황을 생각하면 알은체가 얼마나 '친근한 배려'냐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알면 반가워하고 모르면 그냥 지나치는 것이 상례인데 '알은체하다'는 말은 그냥 지나치기가 미안해서 인사치례를 한다는 어감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의 인심이 표면적이고 형식적이어서 그 정도로도 인간관계 유지에 충분하다는 것일까? 어쩌면 '안다'라고 표현하기가 정말 조심스러운 세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지식이나 사람을 '안다'라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그 말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허구적인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안다'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심지어 평생을 같이 살아온 배우자인데도 말년에 가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고 후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도 쥐꼬리만 한 지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아는 척 해왔지만 한 발자국만 깊이 들어가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지식이고 기억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안다'가 아니고 '알은체하다'는 말이 더 솔직하고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안면은 있지만 이름이 금세 떠오르지 않거나 어떤 인연으로 만났던 사람인지 명확하지 않을 땐 그저 알은체하는 것이 최선일 수가 있다. 자칫 친한 척 과도한 반가움을 표시했다가 혼자 머쓱해 질 수 있고 속된 꿍꿍이를 가진 것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방송에서 맨 처음 시작의 말로 이 말을 꺼낸 아나운서는 꽃샘추위가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어디에선가 꼼지락대며 다가오고 있는 봄을 알은체하며 맞이하자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봄을 알은체하자'는 말, 무척 신선하고 감각적인 표현으로 귀를 자극한다. 봄을 알은체하며 맞이하면 멈칫거리던 봄이 더 반갑고 친근한 느낌으로, 좀 더 빨리 다가올 것이란 설정이 가슴 설레게 한다. 사실 봄이란 계절의 오고감은 자연의 변화보다 심리적 감성이 더 크게 작용한다. 춘삼월에 접어들며 낮 기온이 치솟기도 하고 하루 종일 내리는 비가 '부슬부슬'이 아니라 '추적추적' 내리는 데도 아직 봄을 말하기에는 민망하다. 거리에는 하나 같이 얼굴을 감싸고 두툼한 외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종종거리며 걸어간다. 그나마 밖으로 나다니는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다. 어지간하면 집안으로 꽁꽁 숨어들었다. 뜰 안의 산수유가 꽃봉오리를 조심스럽게 터뜨리며 애써 봄을 전하려 하지만 사람들은 모른 체하고 있다. 봄도 봄이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이 사람을 경원시한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슬프다. 이른바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라는 말이 인간사회의 종말을 예고하는 말 같기도 하다. 산문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쓴 신영복교수는 감방에서의 여름나기가 제일 힘들다고 했다. 여러 사람이 좁은 감방 안에서 칼잠을 자야할 때, 옆 사람이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배척하고 밀어내야 하는 여름이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고 적었다. 싫건 좋건 서로의 몸을 밀착하고 껴안으며 잠을 자는 겨울감방살이가 그나마 더 낫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사회 전체가 한 여름의 감옥보다 더 무서운 곳이 되어가고 있다. 무서울수록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 반대를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봄을 건너뛰거나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서로 반갑게 악수하거나 안아 주지는 못하더라도 주변 사람들과 다가온 봄에게 반갑게 알은체라도 하여 이 고통에서 슬기롭게, 하루 빨리 벗어났으면 좋겠다.
중국 동북부 지린성에 있는 차간호(査干湖)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그들은 한겨울 호수의 두꺼운 얼음판에 수백 개의 구멍을 뚫어 물고기를 잡는다. 얼음 아래 2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그물을 펼치는 기술도 대단하지만 많을 땐 4톤이나 되는 물고기를 한꺼번에 잡을 때도 있다니 관광객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하였다. 서서 누는 오줌줄기가 얼어붙는다는 맹추위 속에서 그물을 끌어 올리는 과정은 극한의 고된 작업이었다. 그러면서도 오직 사람과 말의 힘에만 의지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과 행동, 어디에서도 삶에 찌든 면은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내가 간 날은 그물에 걸려 얼음 위로 올라온 고기가 대여섯 마리 밖에 되지 않았다. 30여 명이 매달려 한 사람 몫도 안 되는 빈 그물을 끌어올리면서도 그들의 팔뚝에는 힘이 남아 있었다. 그물에 걸린 고기가 몇 마리밖에 되지 않자 구경하던 사람에게 그냥 나누어 주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그들의 삶에 동참하고 같이 안타까워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작업 도중 북적이는 관광객들로 인해 적잖이 방해가 되었을 터인데 그 누구도 짜증을 내거나 귀찮아하는 표정은 없었다.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정신이었을까· 하루를 허탕 치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것을 허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웬만큼 삶을 달관하지 않고서는 어렵다. 어부들은 고기가 많이 잡혀 만선일 때도 있지만 빈 배로 돌아올 때에도 그것을 일상으로 여기는 여유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강추위 속의 작업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겨울철 한두 달 동안만 이루어지는 생업인데 이럴 때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며 낙관할 처지는 아니었을 터이다. 오전부터 눈 덮인 얼음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오후 중반이 넘어서야 그물이 다 끌어올려졌고 그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나도 허탕은 아니었다. 직접 작업을 한 어부들이 허탕이라고 여기지 않는데 둘러 싼 관광객들이야 허탕일 리가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얼음평원 위에 수많은 사람들과 차량들이 한 군데에 모여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해도 "쩡∼쩡∼" 소리 한 번 내지 않는 얼음의 견고함은 경이로웠다. 그곳에 가기 전 TV로 보았던 풍성한 수확이 아니라 오히려 허탕을 친 모습에서 그들의 너른 인심과 유연한 삶의 태도가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삶은 얻어지는 결과로 평가된다. 얻은 것이 없고 가진 것 또한 없으면 헛살았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게 삶의 일반론이지만 차간호 사람들을 보면서 그 일반론이 오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력에 대한 대가가 꼭 있어야 한다는 각박한 일반론을 내세우는 한 우리의 삶은 늘 피곤하고 곤궁하고 후회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내일의 작업을 위해 텅 빈 그물을 다시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는 차간호 사람들을 뒤로하고 눈 덮인 얼음 위를 아스팔트인양 쌩쌩 달리는 총알택시를 탔다. 20여분을 달린 후에야 마침내 버스가 기다리는 호숫가에 가 닿을 만큼 차간호는 넓었다. 저녁 무렵 주변 식당에서 물고기 요리를 먹었다. 민물고기 특유의 흙냄새가 배어 있어서 그리 맛있게 먹지는 못했지만 배가 불렀다. 하루를 얼음 위에서 보낸 덕분에 추위에 대한 내성을 얻었고, 그들의 표정에서 배운 여유와 널찍한 인심이 배 속을 이미 채우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추운 얼음 위에서 쳇바퀴 돌듯 뱅글뱅글 돌며 그물을 끌어올리던 말들의 모습이었다. 특별히 제작된 얼음용 편자를 신고 연자방아 돌리듯 쉴 새 없이 도르래를 돌리는 말들의 온몸에서는 더운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쳇바퀴 돌듯 고단한 삶을 살기는 사람과 똑같았다. 하지만 주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 하루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따스하며 푸근한 저녁을 맞으리라. 정초의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차간호 물고기들이 그물 속으로 가득가득 들어오는 꿈과 함께 그들의 노곤한 밤은 깊어 가리라.
나이가 들면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이유를 따지지 않는다. 그저 지금껏 그렇게 해왔으니까 당연하게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갑자기 삶의 형태가 바뀌어야 한다면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전조현상으로 받아들이거나 심리적으로 쫓기는 이유가 된다. 가족만 빼고 다 바꾸라고 강요하는 요즘 세태에서 관혼상제의 관습이 잘 바뀌지 않는 이유도 나이든 어르신들의 오랜 경험이 깊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바꿔야 한다는 젊은 세대와 이에 저항하는 기성세대간의 갈등은 인류의 집단생활이 시작된 이후부터 계속되어 왔으리라. 처갓집 제사상에는 좀 색다른 관습이 있다. 조상 신위(神位)가 있고 그 옆에 나란하게 성주님(집을 보호해 준다는 신령)을 위한 밥과 국, 수저가 올라간다. 그 뿐만 아니다. 제사상 옆에는 별도의 작은 소반에 밥과 국, 정안수와 수저 한 벌이 놓여진다. 장모님의 말로는 삼신(三神)을 위한 상이란다. 이러한 상차림을 두고 제사를 지낼 때마다 장모님과 아들·며느리들 사이에 작은 다툼이 일어난다. 아들은 아버지 제사이니 다른 신들은 모시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고, 장모님은 남편 제사이지만 남편 옆에는 다른 신들도 같이 있으니 그들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장모님은 젯밥을 담을 때도 성주, 삼신, 그다음이 장인어른이다. 제사상으로 인한 다툼이 있을 때엔 사위인 내가 나서서 중재를 해보지만 완강하신 장모님 뜻을 꺾을 수 없다. 누구를 위한 제사냐고 따져도 소용없는 일이다. 장모님 생각으로는 조상신보다 성주신과 삼신의 힘이 더 세기 때문에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집안에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 실존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그들을 향해 온갖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서 일찍 돌아가신 장인어른 대신 혼자서 집안을 지켜온 억척성과 애틋함이 엿보인다. 장모님의 생각을 바꾸는 일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만큼 어렵게 느껴졌다. 더구나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큰며느리의 입장에선 무척 껄끄러운 일인데도 완고하신 장모님의 뜻에 아무도 거역하지 못하고 따라왔다. 그런데 지난번 제사 때 변화의 조짐이 일어났다. 여느 때와 같이 제사상을 차려놓고 늦어진 장손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큰며느리의 어두운 표정에 못내 신경이 쓰였는지 갑자기 삼신용 제사상을 치우라고 하셨다. 이제는 너희들이 알아서 한다고 하니 그렇게 해보라는 말씀이었다. 장남은 눈치를 보다가 이왕 상을 차린 것이니 올해는 예전처럼 지내자고 했으나 장모님은 다시 강짜를 부리셨다. 결국 내가 나서서 조율에 들어갔다. 저렇게 준비된 상을 치우고 나면 그게 또 장모님의 잠자리를 한동안 괴롭힐 터이니 그냥 놓아두겠습니다. 장모님이 편안해야 저희들의 마음도 편합니다. 그런데 내년부터는 처음 준비할 때부터 저희 의견에 따라 주십시오. 제사는 장인어른을 기리는 한편 자손들이 모여서 우의를 돈독하게 하는 자리이지 온갖 신들을 모셔서 집안의 우환을 없게 해달라고 비는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장인어른 입장에서도 그렇잖습니까. 가족들 앞에서 혼자서 먹고 싶지 장인어른보다 더 높은 귀신들과 함께 진지를 드시고 싶겠습니까? 잠시 뜸을 들이신 장모님은 그건 그렇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해는 가지만 바뀌기는 어렵다는 것을…. 소설가 김훈은 '삶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험될 뿐'이라고 했다. 사회적 통념이나 이치를 따지는 논리로 삶을 설명하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더구나 85년의 고된 경험으로 축적된 장모님의 습성을 바꾸는 일이야말로 또 다른 삶의 경험에 의해서만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 장모님에게는 논리적 설명이 아니라 이젠 안심하고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새로운 경험과 그 뒤에 따르는 신뢰가 필요한 것 같다. 모든 갈등의 불씨와 변화의 가능성은 '신뢰'의 문제이니까.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그리워지는 것들이 있다. 추위에 움츠려들고 삶에 지친 발걸음을 경쾌하게 만들어주던 크리스마스 캐럴. 텅 빈 주머니 속의 휑한 마음을 데워주던 구세군 종소리. 먼 고향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던 군밤과 군고구마 냄새. 집안에 들어서면 발개진 콧등을 시큰하게 만들던 어머니표 배추된장국. 그리고 졸린 눈을 부비며 기다리던 주말의 명화 벤허, 십계, 쿼바디스, 사운드 오브 뮤직…. 묻혀있던 화롯불이 되살아나듯 기억의 저편에서 연기처럼 폴폴 일어나는 이 그리움은 거의 조건반사적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일은 추수마당에서 풍구를 돌리는 것과 같다. 지난 한 해 동안의 일들이 갈무리할 알곡이 아니라 대부분 죽정이로 날아가 버리는 공허함을 확인하는 일이다. 바쁘게 살아왔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의 결핍이 이것저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나는 게 분명하다. 사실 그것들도 당시에는 그저 스치며 지나치던 죽정이 같은 일상이었다. 흔한 일상이 맨 앞쪽에 내려앉은 알곡이 되어 그리워지기까지는 시간의 반복이라는 묵은 때가 켜켜이 쌓여있다.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해진 것에는 내 영혼의 일부가 깃들어 있다. 어저께도 밤늦은 시간에 하릴없이 TV 채널 속을 방황하다가 '디어 헌터(The Deer Hunter)'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격동기인 1970년대 말 극장 개봉 시기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세 번 이상 본 영화중의 하나이다. 영화가 끝난 시간은 벌써 새벽이었지만 영화에 몰입되었던 감동의 여운이 남아 노곤함 속에서도 잠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세 시간이나 되는 길고 긴 상영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전개와 뛰어난 영상미, '카바티나'라는 감성적인 배경음악은 익히 잘 알고 있어서 더 이상 흡인력이 되지 못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빠져드는 것은 아무래도 내 속의 식지 않은 갈망 때문이 아닐까 싶다. 평소에는 잊고 있었지만 영화라는 자극을 통해 내가 꿈꾸던 것이 무엇인지 얼핏 엿보게 되는 것이다. 영화를 본 다음 날, 나는 영화 속 의리의 사나이 '로버트 드 니로'가 되어 어깨를 우쭐대며 다녔다. 산다는 것은 연자방아 도는 것과 같은 반복의 연속이다. 반복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반복을 하게 된다. 반복을 통해서 삶이 익숙해지고, 좀 더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복의 틀에 갇힌 현실을 탈피해보려고 발버둥 치는 노력도 따지고 보면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향한 갈망이다. 연말이 다가오면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그 어딘가를 향해 훌쩍 떠나고 싶은 것도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지 못한 반성이자 갈증이다. 그런데도 반복적인 삶에서 무작정 벗어나려고 하면 그 탈출은 실패하기 쉽다.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면서도 무료한 반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눈에 들어오는 현상과 몸에 다가오는 느낌들을 너무 쉽게 일반화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은 무언가 새롭지 않으면 지워버리고 만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자꾸 지워가다 보면 일 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남는 것은 달라진 몸의 변화뿐이다. 우리 몸의 변화만큼 이 세상도 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그 변화를, 그 속의 새로움을 찾아내지 못할 뿐이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깨닫지 못한 것이 수없이 많다. 아니 누군가가 알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재확인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가치는 충분하다. 내 삶에 있어서는 처음이니까 그렇다. 콜럼버스가 인디언들이 살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여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한 것과 똑같은 이치다. 지친 삶의 허기와 갈증을 해소하려면 새로운 땅을 다시 파내려 가는 방법도 있지만 파헤친 곳에서 좀 더 깊이 파보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평소 다니던 산책길에서 가을의 뒷모습을 본다. 나무들이 자신의 그늘아래 화려했던 가을 옷을 조용히 벗어 놓고 다음 계절을 기다리고 있다. 그에 비해 산책길을 수북이 덮고 있는 갈참나무의 마른 잎들은 생각이 좀 다른가 보다. 바삭한 소리를 내어 정적을 깨트린다. 지난날들에 대한 미련인가? 밟혀 부스러지면서도 그냥 흙으로 돌아가기는 싫은 듯 발밑에 작은 저항이 느껴진다. 약한 바람에도 어깨를 들썩이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은 꿈을 숨기지 않는다. 봄에는 새싹들의 숨소리와 기지개를 켜는 아우성으로 소란스런 숲이었다. 햇볕을 한 줌이라도 더 받아보려고 위로 솟구치고 옆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던 여름날엔 생존경쟁의 싸움터였다. 가을이 다가오자 초록의 제복을 벗고 각자 숨겨놓은 색깔을 맘껏 드러내며 생의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들 어스름한 정적에 동화되어 숨죽이고 있다. 성성하던 여름의 기상으로 한 번쯤 뻗대어보고 싶으련만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는 착한 모습들이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모습은 평화롭고 편안하다. 요양원에 계시면서 들를 때마다 전주에 있는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시던 장모님이 떠오른다. 서른아홉 살에 혼자되신 후 사남매를 길러내셨고, 그 사남매의 자식들까지 애지중지 돌보셨지만 지금은 딸과 사위만 겨우 알아보신다. 장모님의 화려했던 날은 언제쯤이었을까? 남편과 사남매의 도시락을 줄줄이 싸서 학교로 내보내던 그 시절이었을까. 혹시 교사 며느리 둔 죄로 어린 손자손녀들을 돌보며 '잠 한 번 실컷 자 보았으면…' 하시던 그 때가 아닐까? 늙은 부모를 모셔본 사람들은 암보다 치매가 더 무섭다고 한다. 젊은 날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아픈 마음이야 둘 다 마찬가지겠지만 긴 시간 곁을 돌보아야 하는 현실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장모님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기억을 다 지우고 두세 살 어린 시절로 돌아 가버리는 치매가 어쩌면 순리일 수도 있겠다 싶다. 처음에는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냐고 자식들을 원망하고 떼를 쓰셨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이제는 모든 잎들을 다 내려놓은 겨울나무처럼 편안해 지셨다. 눈길에 미끄러져 큰 수술을 해야 했던 허리와 대퇴골 부분도 그럭저럭 문제가 되지 않고, 식사도 곧잘 하셔서 얼굴이 뽀얘지셨다. 멍하게 계시다가 딸과 사위얼굴만 보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좋아하신다. 너무 일찍 돌아간 장인어른에게 보란 듯이 억척같은 삶을 이어오신 장모님은 요즘 당신의 편안한 뒷모습을 만들고 계신 것 같다. 만났다 헤어지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뚜렷한 잔상을 남긴다. 군에 있는 아들을 찾아가 면회한 뒤 부대로 돌아가는 뒷모습은 저절로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리다. 억지로라도 씩씩하게 보이려고 큰 소리로 경례를 갖다 붙이는 모습이 사진보다 더 뚜렷하게 가슴에 새겨진다. 나도 뒷모습 보이기를 꺼려했다. 특히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는 더욱 그랬다. 전투조종사라는 직업에 대해 늘 불안감을 감추고 계시던 부모님께 애처로운 모습으로 비추어질까봐 신경이 쓰였다. 혹시 마지막 뒷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스스로의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젊었을 때엔 대여섯 달에 한 번, 나이 들어서는 두어 달에 한 번씩 시골에 잠깐 내려갔다가 되돌아 올 때면 꼭 대문 안에서 작별인사를 드렸다. 골목어귀까지는 못 나오시게 했다. 그렇게 했어도 차를 몰고 골목길을 돌아 나올 때엔 힘없이 손짓하시던 어머니의 시선이 가슴에 남아 등이 시렸다. 어머니의 마지막 뒷모습을 뵌 지 삼년이 넘었다. 사람의 앞모습이 현재라면 뒷모습은 과거이자 삶 전체의 모습이기도 하다. 얼굴에 아무리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더라도 뒷모습에 드러나는 삶의 초라함과 허허로움은 숨길 수 없다. 나무들 하나하나의 모습이 앞모습이라면 숲의 모습은 뒷모습에 해당한다. 아름다운 숲은 늘 푸른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나무들이 계절에 따라 순응하는 숲 본래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커피의 계절이 돌아왔다. 사시사철 마시는 커피이지만 제철 과일처럼 커피 고유의 냄새와 맛이 진해지는 요즘이다. 푸석해진 머리카락과 텅 빈 가슴에 바람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멍해지는 증상이 나타나곤 하는데, 이럴 땐 커피가 약이다. 따끈한 커피 한 잔에 생기가 되살아나고 꽉 막혔던 생각의 꼭지가 열린다. 일조량이 줄고 기온이 내려가면 몸속 어딘가에서 커피의 달착지근한 카페인을 부른다. 사실 나는 커피마니아도 아니고 커피에 대한 지식수준도 일천한 편이다. 그런데도 오늘 아침 갑자기 커피가 그리워졌다. 언젠가 어깨너머로 본 커피 내리는 법이 생각나 직접 따라해 보기로 했다. 볶은 커피콩을 사다가 작은 절구통에 넣고 콩콩 찧어 가루로 만들었다. 그리고 머그잔 위에 받침대와 거름종이를 놓고 커피가루를 조심스럽게 얹은 뒤 준비해둔 뜨거운 물을 조금 따랐다. 커피가루가 물을 머금어 살짝 부풀어 오를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물을 졸졸 따랐다. 연갈색의 액체가 똑똑 떨어지면서 머그잔에 그득하게 고였다. 고소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주변으로 퍼져 나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문득 커피 향에서 고향 냄새가 느껴졌다. 초겨울 아침 부엌아궁이에서 사르르 타들어가던 갈참나뭇잎 냄새 같기도 하고, 저녁 무렵 얕은 담을 넘어 고샅길을 따라 퍼져 나가던 밥 짓는 냄새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세상의 모든 정겨운 냄새는 어릴 적 고향집과 엄마 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커피가 코를 자극한 다음 입속 혀에 감기는 순간 친구가 생각났다. 10여 년째 산행과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시시한 이야기로 초등학생처럼 깔깔거리다가 얼큰한 걸음걸이가 되어 헤어지는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이 이 커피를 맛보면 뭐라고 말할까· 틀림없이 제대로 된 커피 맛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 중 한 친구는 어느 나라 무슨 종류 커피냐, 어떻게 뭘 알고 내린 것이냐고 물을 것이고, 또 한 친구는 왜 이걸 만들게 되었느냐고 의미를 따지고 들 것이다.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은 바늘 같아서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에서는 뜨끔하다. 그래서 친구들의 말은 정겨우면서도 삽싸레하다. 끝부분에선 살짝 띄워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먹을 만하네, 한 잔 더 줘." 늘 그런 식이어서 앞의 말들은 다 흘려버리고 마지막 말만 커피 여운처럼 남아 우정으로 쌓인다. 때론 별것 아닌 걸로 서운해지기도 하지만 그게 정을 쌓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커피 종류별로 다른 섬세한 맛의 차이를 잘 모른다. 더구나 덧얹어지는 첨가물에 따라 달라지는 커피차의 이름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저 기본 스타일의 커피를 주로 마신다. 내가 느끼는 커피 맛이란 커피를 마실 때 주변 공기의 맛이고,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 주고받는 눈길의 맛이고, 동반되는 음악의 맛이라고 믿는다. 오늘 아침 내가 내린 커피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던 이유도 여러 가지 수고를 한 후에 얻은 커피여서 그렇다. 어쩌면 스스로 맛있다고 믿고 싶어서 그렇게 맛있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커피 맛이 각기 다른 고유의 성분이나 만드는 방법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실증은 많다. 높은 산 정상에 올라 한 숨을 돌린 뒤, 지고 간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부어 만든 한 잔의 믹스커피 맛은 그 어떤 종류의 커피보다 맛있다. 종이컵으로 먹는데도 목구멍이 감동한다. 찻집에서 마시는 일급 바리스타의 실력과 최고급 커피콩의 맛이 무색해진다. 태풍의 한가운데, 맑게 뚫려 조용한 그곳을 태풍의 눈이라고 하듯이 지금 즈음이 가을의 눈에 해당되는가 보다. 하늘은 투명하고 바람이 부드러우며 곡식과 과일을 여물게 할 햇볕은 향기롭다. 엊그제까지 햇빛을 피하거나 등지며 산책길을 걸었는데 이젠 해를 마주하고 바라보는 풍경이 더 정겹다. 앞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노부부의 머리카락과 어깨 위에 내려앉은 햇볕 속에 자연의 포근한 정이 담겨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방죽에 앉아 저물어 가는 들녘을 바라보며 나이 든 아들 장가보낼 걱정을 했다. 어디선가 커피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