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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시인

"꿈이 뭐에요?"라고 묻는 질문처럼 황당한 질문이 또 있을까.

나이 이순을 지나 꿈을 꾸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꿈이 무엇이었는지 까마득히 잊은 지 오래다. 단발머리 어린 소녀일 때도 나는 꿈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은 벌어먹고 사는 일이며, 아이를 교육하는 일에 지쳐 그런 것을 생각해볼 여유가 없다 해도 분명 그때는 꿈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느 날 좀이 반쯤은 먹은 중학교시절의 일기장 묶음을 찾았다. 누가 볼까싶어 깊이도 감춰두었던 것이다. 자물통이 달려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회색의 얇은 대학노트였다. 붓글씨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께서 먹으로 쓴 글씨는 천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고 하셨고 연필로 쓴 글씨도 변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주로 연필로 일기를 썼다. 그런데 마치 손으로 뭉개놓은 것처럼 뿌옇게 번져있었다. 역시 영원한 것은 없는 모양이다.

글씨는 번져있지만 한자 한자 꼭꼭 눌러쓴 글씨가 소녀처럼 예뻤다. 주로 친구와 하굣길에 어디를 돌아다닌 이야기가 전부였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이름도 적혀있었고 독후감도 열심히 썼던 것 같다. 나름 참으로 건전하고 얌전한 소녀였던 것 같다. 한참을 읽다가 중3무렵에 뜬금없이 나는 소설가가 되어야겠다는 말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얌전한 교복차림처럼 얌전한 소녀가 아니었단 말인가.

기억을 더듬어보니 최인호라는 소설가가 나오면서부터 그의 소설에 빠져서 살았던 것 같다. 그 무렵 신문에 별들의 고향이 연재되고 있었다. 얼굴을 붉히면서 경아가 나오는 소설을 읽고 또 읽었다. 언니는 어린애들은 그런 걸 보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봤는지도 모른다. 그 후로 나는 최인호 작가를 따라서 경아가 되었다가 깊고 푸른 밤의 제인이 되고 불새의 지은이가 되어 갔던 것 같다.

사춘기 소년들이 음란잡지에 빠져들듯 소녀들도 그랬다. 최인호 소설가는 지금의 아이돌처럼 나의 영웅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달콤한 문장을 쏟아낼 수 있는지 어떻게 저리 멋진 남자주인공을 그려낼 수가 있는지 오래도록 그는 나를 설레게 했다.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다니 천재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다. 차마 그에게 편지를 쓸 용기는 없어서 아름다운 문구와 우리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문장들을 베껴 쓰며 소설이란 것을 배웠다. 일기장 귀퉁이에 이런 글귀가 나와서 혼자 깔깔거리고 웃었다.

'나는 서울행 열차를 타야한다. 두려움에 앙다문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서울 그 넓은 세상만이 내가 숨을 쉬고 날아다닐 곳이다.'

그 시절 아마도 나는 가출을 꿈꾸기도 했었던 모양이다. 통속소설에 빠져있고 무단가출을 꿈꾸는 불량한 소녀이기도 했었다니.

나에게도 꿈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처럼 가슴이 뛰었다.

몇 년 전 최인호 작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에 통곡할 여유가 네겐 없었다. 잊힌 꿈처럼 그도 내게서 잊히고 있었다. 아직 변변한 소설을 쓴 적도 내놓은 적도 없지만 어쩌면 나도 소설가가 될지 모르겠다는 늙은 꿈 하나를 가져본다.

최인호의 마지막 산문집『인연』에서 '이토록 넓은 세상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 중에 나는 당신을 만났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남녀의 인연이란 그래서 눈부시게 두렵고 아름다운 기적이다.'라는 문장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세상의 인연은 두렵도록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다. 내 어린 날의 꿈 한 조각도 나와의 인연이 닿은 소중한 나였을 것이다. 그것이 조금 불량하였다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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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