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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9.05.16 13:56:11
  • 최종수정2019.05.16 13:56:11
[충북일보]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걱정이 앞선다.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천식을 앓고 계신다. 고령의 나이에 면역력까지 떨어지신 아버지가 환절기의 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폐렴에 걸리셨다. 천식환자가 폐렴에 걸리면 염증이 기도를 막아서 위험하다. 아버지가 입원을 하셨다. 병이 다 나을 때까지 아침, 저녁으로 항생제를 맞으면서 병원생활을 하셔야 할 텐데 힘든 날들을 잘 견뎌주실지 걱정이다.

일요일 아침, 병원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주섬주섬 짐을 싸고 계셨다. 퇴원할 때가 아직 먼 것 같은데 짐은 왜 싸고 계시는 걸까. 어안이 벙벙했다. 간호사에게 물으니 항생제 부작용으로 내성균이 생겼단다. 다른 환자들에게 전염될 수 있어 일인병실로 옮겨야 한단다. 말이 좋아 일인병실이지 사실상 격리수용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짐정리를 마치고 병실을 옮길 준비를 서두르고 계셨다. 병실을 옮기니 적막하고 고요했다. 힘이 부치셨던 걸까.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병원 조리보조원이 밥을 가지고 오셨다. 벌써 점심때가 된 모양이다. 아버지가 밥을 덜어 내게로 건네며 같이 먹자고 하신다.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먹자니 내성균이 걱정이고 안 먹자니 아버지가 서운해 하실 것만 같았다. 그래, 먹자. 아버지와 둘이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들이 언제 또 있을까. "병원 밥도 맛있네요.", "그래, 많이 먹어라." 아버지가 내 밥술에 생선토막 하나를 얹어주신다. 나이 먹은 자식도 부모님 앞에서는 어린애라더니….

식곤증 때문인가. 아버지가 곤하게 잠이 드셨다. 잠시 동안 이지만 종일 병실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시기가 얼마나 힘드실까. 옛날 내가 어렸을 적 몸이 아파 식은땀을 흘리면 아버지는 나를 업고 한달음에 동네 병원을 찾았었다. 그리고 병실에 누워있는 자식의 머리맡을 오랫동안 지키셨다. "어서 일어나거라. 사내는 밥을 많이 먹어야 건강해지는 거여." 나중에야 알았다. 아버지의 이 말씀이 자식을 사랑하는 표현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어깨가 참 넓었는데 지금 내 곁에 누워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왜 이리 초라한가. 가는 세월 탓이련만 지나간 시간의 추억들을 더듬어 보면 가슴 속으로 시린 바람이 분다.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 속을 많이 썩이는 자식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그날도 친구와 싸우고 교무실로 불려갔다. 선생님께서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하셨다. 학교 다닐 때 나는 부모님 모셔오라는 말이 제일 싫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하나. 한참을 망설이다 어렵게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이 내일 학교로 오시래요." 아버지는 한숨만 길게 쉬고 계셨다. 다음날 오후 아버지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그리고 선생님께 "제가 자식을 잘못 가르친 탓"이라며 머리 숙여 사죄를 드렸다. 교실 밖으로 나가서도 아버지는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하셨다. 유리창 너머로 한참동안 내 모습을 바라보고 계셨다. 얼마나 곤욕스러우셨을까.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아버지의 그때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살아오면서 아버지는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으셨다. 대학을 갈 때도, 진로를 선택할 때도 그랬다. 관심이 없는 줄만 알았다. 군대를 제대하고 첫 직장에 출근 하던 날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다. "얘야, 고생했다." 그때 알았다. 남 몰래 아버지도 큰자식 잘되기를 가슴 졸이며 빌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가 내 삶을 강요하지 않았던 것은 세상 순리대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어서 그러셨다는 것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았다.

언제 일어나셨는지 아버지가 환하게 웃고 계신다. 찾아오는 사람 없는 병실은 한적하고 쓸쓸하다. 휠체어를 빌려 아버지를 모시고 공원을 찾았다. 정원에는 노란 산수유와 철늦은 동백꽃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저 꽃이 지기 전에 아버지 손을 잡고 병원 문을 나설 수 있어야 할텐데….

몇 바퀴를 돌았을까. 아버지가 독백처럼 말씀하신다. "착하게 살거라.", "술 조금만 마셔라.", "애미한테 잘해라." 늘 듣던 이야긴데 유언처럼 들려오는 아버지의 저 말씀이 오늘따라 내 가슴을 파고든다. 아버지는 병상에서도 자식을 걱정하고 계시는데 나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 아버지는 늘 자식들을 기다리며 사셨는데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를 자주 잊고 살았다. 저 말씀을 얼마나 더 들을 수 있을지. 어느덧 아버지의 축 늘어진 어깨너머로 쓸쓸히 저녁노을이 물들고 있다.

김규섭

푸른솔문학 신인상 수상

푸른솔문인협회 사무국장

청주시 문화예술과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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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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