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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선열들의 숨소리를 듣는다- ④ 증평 연병호 생가

청년외교단·독립혁명당서 해방운동 진행
환국준비위원회 발족·한독당 창당 등 활약

  • 웹출고시간2019.03.24 15:40:28
  • 최종수정2019.03.24 18:00:22

연병호 사진.

[충북일보=증평] 독립운동가 연병호(延秉昊) 생가는 증평군 도안면에 석곡리에 있다.

지난 2002년 1월 11일 충북도 기념물 122호로 지정된 연병호 생가는 1910년 정면 3칸, 측면 3칸의 초가집으로 건립됐다. 그후 지붕 등이 변형됐다가 지난 1986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1996년과 1998년 생가보수사업으로 영당과 삼문이 건립됐다.

연병호는 청안 중명학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맏형인 연병환이 1910년 경술국치에 통분해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이 계기가 돼 함께 망명했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귀국해 해방을 협의하고 같은 해 12월 29일 비밀조직인 청년외교단이 적발돼 대구감옥에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 7월 출감 후 재차 망명해 이름을 병준에서 병호로 개명하고 독립혁명당을 조직후 1937년 1월 7일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약 중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연병호 생가와 기념관이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 조성돼 있다.

ⓒ 김병학기자
해방을 맞아 국내에서 임시정부 환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해 영접부장으로 활동을 했고 1946년 7월 한독당 창당을 발기해 중앙위원 겸 훈련부장, 애국선열 사적조사위원장을 지냈다.

1948년 5월 10일 초대 국회의원선거에 괴산에서 입후보해 당선돼 제헌국회의원을 지냈고 1950년 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재선의원이 됐다.

증평군 석곡리에 복원된 독립운동가 연병호 생가.

ⓒ 김병학기자
1963년 1월 26일 70세의 일기로 타계해 사회장으로 장례 후 도안면 석곡리 선영에 안장됐다. 이후 1976년 10월 국립묘지 이범석묘 옆에 이장됐다.

현재는 증평에 생가와 함께 기념관이 건립돼 선생의 일대를 엿볼 수 있다.

증평 / 김병학기자

증평읍 석곡리에 조성된 연병호 기념관의 동상과 고인을 기리기 위해 세운 조형물.

ⓒ 김병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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