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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SNS 속 충북지역 항일 유적지

SNS서포터즈가 소개하는 항일의 기록

  • 웹출고시간2019.02.20 20:34:00
  • 최종수정2019.02.20 20:34:00
[충북일보] 충북은 90여명의 애국지사와 500여명의 독립 유공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3·1 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 신홍식,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선생 등 6인이 충북 출신이었다. 이들의 동상이 있는 청주 삼일공원 외에도 충주, 제천, 진천, 괴산 등 충북 곳곳에 항일 항쟁과 관련된 장소들이 남아있다. 의병장들의 유허지나 생가터, 제천의 자양영당처럼 복원·보존된 장소가 있는가 하면 충주 항일독립운동 역사관, 제천 의병전시관처럼 과거의 기록과 흔적들을 근거로 설립해 시민들에게 개방한 곳도 있다.

이처럼 역사가 담긴 장소들은 주변 명소들과 연계돼 충북의 가볼만한 곳이자 효과적인 배움터가 됐다. 항일의 역사가 담긴 이 장소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찾았다가도 묵직한 울림을 안고 돌아간다. 충북도내 SNS서포터즈들이 직접 발품팔아 소개하는 지역내 항일 유적 관련지들을 살펴본다.
◇청주 - 한봉수 의병장 유허지와 생가터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학평리 85-4번지에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의병활동으로 평생을 보낸 청암 한봉수 의병장(1884~1972) 유허지가 있다. 언제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시간을 내어 들렀다. 이곳은 대중교통으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고 차를 가져가거나 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좋다.

입구에는 동상이 서있다. 대청호 미술관 애국지사 일곱 분의 상이나 상당공원에서도 한봉수 의병장 동상을 본 적이 있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봉수 의병장은 1907년 일제의 군대 강제 해산 등 침략의 양상이 노골화되자 고향인 세교리를 기반으로 의병 봉기했다.

이후 그는 진천, 보은 등 충북 일원은 물론 경상도, 강원도 일대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했다. 일본인 자산가와 친일파 처단, 일본군과의 교전, 우편행랑 습격 등 30여 차례에 걸쳐 유격전을 벌이고 여러면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무적장군, 번개대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전의, 옥천, 평택, 여주, 횡성, 문경 등지에서 활약했는데 33번의 공격동안 1번 패한 전과를 거둔 명사수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바로 근처에 식당을 운영하시며 이곳을 찾는 분들에게 자원해서 이야기를 전해주시기도 하고 관리도 하고 계신다는 주민을 나중에 반갑게 만났다. 친절한 설명과 함께 한봉수 의병장이 가졌던 명사수의 힘이 현대의 청주인들에게도 흐르는 것 같다는 말씀을 건넸다. 사격선수로 활약하는 청주 출신 선수들이 떠오르는 시간. 저도 왠지 수긍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이곳에서 차로 11분, 7.2km 거리에는 청주종합사격장, 국궁장도 있어 가볼만 하다.
한봉수 의병장은 1910년 5월에는 일제에 잡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5년으로 감형되고 8월 경술국치 후 대사령으로 출옥했다. 이후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 전후로는 2월에 손병희를 만나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할 것을 부탁받았다. 이후 청주 서문장터에서 만세를 외쳤고 4월 1일 세교리 장터에서 내수공립보통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세교리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다시 붙잡혀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정부에서는 나라를 위해 살신성인하신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유허지에는 한봉수 의병장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묘소, 공적비, 한식 토담과 주차장 등이 있다. 이번 방문에서는 사당에 문이 닫혀있어 영정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사당에서는 매년 음력 4월 18일 한봉수 의병장 탄신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고 한다.

건물은 사당과 삼문으로 돼있다. 지붕은 한식전통기와 맞배지붕으로 화강석 기단석이며 삼문은 솟을 삼문이다.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묘소로 올라가본다. 원래 묘소의 위치는 이곳에서 13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2007년에 이곳으로 옮기고 사당을 조성해 추모하고 있다고 한다. 숙연해진 마음으로 잠시 머물다 내려왔다.

이곳은 1919년 4월 세교리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한봉수 의병장이 태어난 생가터가 있는 곳이다. 현재는 탈 무료전시, 카페, 공연 등이 함께 하는 청암탈출골이 위치하고 있다. 한봉수 의병장 유허지에서 2.1km 떨어진 곳으로 차로는 5분 거리다. 이곳과 같이 돌아봐도 좋겠다.

/ 청주시SNS서포터즈 김혜진
◇충주 - 항일독립운동 역사관

멀리 가지 않아도 독립투사들의 시간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충주 칠금동에 항일독립운동 역사관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 의미있는 시간을 만나보기 위해 충주 항일독립운동 역사관을 찾아갔다.

이 역사관은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 바쳐 희생한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님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 보존하고 제2의 독립운동 정신으로 민족정신 선양과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항일독립운동 역사관 리플렛 중 건립 취지 발췌)

지난 10월 5일 개관식이 있었지만 아직 홍보가 많이 되지 않은 까닭에 아는 이들과 찾는 이들이 많지 않다.
항일 독립운동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충주에서 꼭 가볼만한 곳으로 이 역사관을 추천한다. 주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620번지(칠금 11길 40)고, 세영 첼시빌 아파트 단지와 LX 한국 국토정보 공사 충주지사, 칠금금릉동 주민 센터가 있는 쪽 길에 있다.

1층 입구 광복회 사무실을 지나면 전시관이다.

충주 항일독립운동 역사관은 항일운동 당시의 역사적 자료 233점 등을 2,3,4층에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대한민국 탄생 역사적 법률적 근거와 독립운동 주요 연표, 3.1운동과 을미의병 전투, 충북 지역 6개 시군 독립운동사, 우리 고장 독립운동가(유공자)의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들과 그에 따른 증거 자료들을 통해 그동안 잘 몰랐던 일들을 충주 항일독립운동 역사관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충주, 제천, 음성, 괴산, 단양, 증평 등 우리 지역에서 일어났던 독립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충북 도민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질 것이다.

독립운동 당시 일제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독립 투사들의 모습, 독립에 대한 열망을 몸소 체험해보고 싶다면 그 마음을 나누고 싶은 이들과 함께 '충주 항일독립운동 역사관'에서 그 의미있는 시간들을 확인해보자.

/ 충주시SNS서포터즈 민한솔
◇제천 - 의병항쟁의 발상지, 제천 자양영당과 의병전시관

제천은 예로부터 의롭고 용맹한 선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외세의 침입에 항거하며 구국의 가치를 높인 의병항쟁의 발상지 제천의 자양영당과 의병전시관을 찾아봤다.

자양영당은 철도 충북선 공존역 바로 옆에 있다. 굽이치는 주포천과 함께 넓은 부지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어 운치가 물씬 풍긴다.
제천 자양영당 공원은 자양영당 본 건물과 중앙의 성재거택, 그리고 우측의 의병전시관으로 구성된다. 먼저 자양영당 건물은 목조기와집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앞에는 뒷마루가 있는 팔각집으로 돼있다. 습재 이소응과 화서학파 유림들에 의해 건립됐고 그 해 우암 송시열, 화서 이항로, 성재 유중교의 영정을 모셨다. 후에는 의암 유인석과 습재 이소응의 영정을 추봉하고 매년 후손과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지내고 있다고 한다.

자양영당은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하는 제천의병의 산실이다. 1895년 5월 유인석은 모친상을 마친 후 국가 변란에 처하여 취할 세 가지 일인 처변삼사를 제시했다.

'첫째는 의병을 일으키는 일이요.

둘째는 망명하여 조선의 정신을 수호하는 것이요.

셋째는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안승우 등 젊은 유생들은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국모의 원수를 갚고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경기도 지평에서 의병을 모아 제천 의병소를 차렸다고 한다.

한쪽으로는 송원화동강목판각이 자리를 하고 있다. 이 곳은 조선 말기 성리학자 중앙 김평묵과 성재 유중교가 중국 송나라, 원나라 시대와 고려의 역사기록을 합쳐 '송원화동사합편강목'을 기록했는데 이를 찍어내기 위한 목판이 보관돼있었다고 한다. 이 공목에 나타난 유교적 위정척사사상은 후일 의병운동과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 됐으며 한국 근대정신사 확립에 영향을 끼쳤다.

자양영당 바로 옆에는 성재거택이 있다. 성재 유중교선생의 거택을 복원한 것으로 일부는 관리사무소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자리한 의병전시관은 제천지방 의병 뿐 아니라 전국에서 발발했던 의병의 활동에 대한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의병 인물들의 활동기나 관련 유물, 책자 등이 많이 전시돼있다.

입구에는 '민족혼의 메아리'라는 의병 모습이 표현된 부조가 있다. 이 부조는 영국 데일리 메일 신문사의 맥켄지 기자가 1907년 한국을 방문하면서 찍은 의병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상부의 '의 (義)'자는 의병장 의암 유인석의 친필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전시관은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규모가 크고 깔끔하다. 제천의병사 연표부터 출범과 활약, 시련 및 의병전쟁 등의 흐름으로 전시된다.

제천의병사 연표가 눈에 띈다. 의병운동이 일어난 배경을 살펴보면 1875년 일본군함 운요호의 강화해협 불법침입으로 발생한 한일 간의 포격사건인 운양호 사건(운요호사건)이다. 강화도 조약, 을미사변 등 당시 일련의 주요 사건들과 깊게 연관돼있다.

한쪽으로는 남산전투를 형상화한 코너도 있다. 남산전투는 을미의병 당시 제천의병이 제천에서 벌인 최후의 전투로, 제천의병을 이끌었던 중군장 안승우는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 400여명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 몇 번을 물리쳤지만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에 화승총이 제 몫을 못하게 되자 결국 패하여 물러서고 말았다고 한다.

제천의병의 활약도를 나타낸 그림도 있다. 1896년 원주 안창에서 출범한 지평의병에서 충주성 점령 후 다시 제천으로 환군할때까지 약 4개월 간의 제천의병의 활약도를 광섬유로 표현한 것이다.

제천의병은 제천일대를 장악해 충주성을 점령하고 멀리 천안, 상주, 태봉 등 주변의 일본 병참기지를 수시로 공격하여 그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박물관 내부 정중앙으로는 제천의병의 유품들이 따로 전시가 돼있다.

휘암 이주승 선생이 의병활동을 할 당시 사용했던 칼과 칼집부터, 화승으로 발사하여 점화하며 탄환을 발사하는 소총의 일종인 화승총도 볼 수 있다. 의암 유인석 선생의 심의가 눈에 띈다. 선생이 평상복으로 입었던 이 옷은 심의 1점, 머리에 쓰는 복건 1점, 허리띠 역할을 하는 대대 1점으로 구성된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전국을 격동시켰던 항일의병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을 받아 대다수 의병장이 전사하고 의병부대는 해산됐으며 살아남은 의병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로 이주했다. 1910년 국치를 전후한 시기에는 여러 의병세력이 이 곳에 모여 1920년대 독립군의 모태가 됐다고 한다.

전시관을 나와 보니 앞쪽으로 제천의병기념탑이 보인다.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바친 제천의병의 숭고한 의병정신을 기리고 오늘날의 시민정신으로 승화시켜 정신교육의 도장으로 삼고자 건립 했다고 한다. 이 분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충북도 SNS서포터즈 변서준
◇ 진천 - 조명희문학관

충북 진천 여행으로 진천 출신의 유명한 조명희 선생의 흔적을 찾아 떠나본다. 조명희 선생은 항일작가이면서 근대 민족 민중문학의 선구자이며 한국 근현대 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옛 소련으로의 망명이라는 정치적 이력 때문에 금기시 되다 그의 문학과 삶을 재평가 받아 재조명 됐다.

진천 포석 조명희 선생의 문학관 바로 앞으로는 웅장한 조명희 선생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동상은 문학관 건립과 동시에 선생의 고향 후학인 정창훈님이 조각 하고, 선생의 조블라디미르 차남과 조파웰 손자의 제작비로 세워지게 됐다.
이 문학관은 매주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을 제외하고 10시부터 17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전시실인 1층과 문학창작실인 2층, 세미나실인 3층으로 구성된다.

문학관은 한국의 문학 연혁과 포석 조명희 선생의 문학에 대한 설명으로 이뤄진다. 2015년 5월에 개관 해서 내부가 깔끔하고 시원하다. 그러고 보니 포석 조명희 문학관은 건물도 무척 아름다워서 제1회 생거진천 건축상까지 받았다고 한다.

조명희 선생은 1894년 진천읍 벽암리에서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고,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19년에는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라 가난한 유학생활을 하며 식민지 시대의 저항의 길을 찾았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민족 민중 항일작가이자 근현대문학의 선구자가 됐다.

한편 문학관은 조명희 선생에 대한 내용뿐만아니라 우리나라 문학의 역사에 대해서도 짧게 설명을 해 놓았다. 갑오개혁과 을미사변을 거쳐 1896년에는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경부철도 개통과 안중근 의사의 의거 후인 1904년에는 만세보를 창간했다.

한쪽으로는 진천 벽암리 조명희 선생의 생가의 모습도 작게 재현해 놓았다. 원래 조부는 의정부 좌찬성, 부친은 인동부사와 중추원참의를 지냈으며 백부와 셋째 숙부는 이조판서, 둘째 숙부는 진주목사를 지낸 명문가였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조명희 선생이 소련 연해주 육성농민청년학교에서 수업 하며 제자들을 배출하는 장면도 꾸며져 놓았다. 포석 조명희 선생은 일제 탄압으로 어쩔수 없이 소련으로 망명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 곳에서도 한글교육과 함께 시와 소설 등 문학수업과 음악동화극, 아동극장, 연극동아리를 만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고려인문학을 이끌며 제자들을 육성했다.

조명희 선생이 남긴 시와 소설 등이 전시돼있다. 그의 소설들은 농민을 등장시켜 사회의 상황에 따라 가족이 해체되는 양상을 폭로하거나 민중들이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형상화하는 특징을 보인다고 한다.

포석 조명희 선생이 남긴 우리나라 최초의 전3막 희곡집으로 1923년 동양서원에서 발행했던

'김영일의 사'와 '적로'라는 필명으로 1924년 춘추각에서 발행한 우리 문학 최초의 미발표 창작시집이 전시돼있다.

한편 조명희 선생은 항일작가이었지만 일본 암파문고의 조선단편소설선과 김소운의 조선시집을 통해 일본어로 소개까지 됐다고 한다.

조명희 선생에 관한 짧은 영상을 보실 수 있는 공간과 함께 선생의 시도 감상할 수 있는 코너도 마련돼있다. 영상실에는 조명희 선생의 후손들에 대한 사진들도 전시 됐다.

먼 타지에서 힘겨운 세월을 보내며 문학에 이바지한 조명희 선생, 그리고 생활의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의 후손들 모습이다.

/ 충북도SNS서포터즈 변서준
◇괴산 - 홍범식고택

일완 홍범식은 1871년에 태어나 금산군수를 지냈고 1910년 순국한 인물로 '훗날에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죽을 지언정 친일하지 말라'는 유서를 남겼다.

홍범식의 아들 홍명희는 1919년 3월 19일 이곳 사랑채에서 충청북도 최초의 만세 시위를 계획해 3.1만세운동의 유적지이기도하다.

홍범식 고택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를 이어 내려오며 집에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다. 홍명희는 근대역사소설의 이정표가된 '임꺽정'을 집필했다. 벽초 홍명희 선생이 10년에 걸쳐 탄생시킨 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재현해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는 책이다.

찾아보니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해방 직후 북으로 가서 조선민주주의공화국 수립에 참여해 초대 부수상을 지냈던 인물과 동일인이었다.

홍범식 고택은 월북인사의 집이라 오랜기간 방치돼 허물어져 있었다. 소설 임꺽정이 정식 출간된 후 복웠됐다고 한다.
최근 홍명희의 최초 자필 한문 편지가 안동에서 발견됐다는 기사를 발견했는데 아버지인 홍범식이 초상을 치를 때 도움을 준 김지섭에게 감사하는 내용이 담겼다 한다. 자결한 아버지가 남긴 부채를 갚는 것과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 등이 있어 임꺽정을 집필하는 배경으로 추정하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한다.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된 홍범식고택은 약 1730년 경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직접 만나본 고택은 중부지방의 살림집을 대표하는 구조라고 한다. 지도를 보기 전에는 그 내부 구조가 제법 복잡하다. 집 안에서도 낮은 담벼락 너머로 겹겹이 보이는 풍경이 마치 미로같기도 하다. 동쪽의 안채, 서쪽의 사랑채를 놓고 광채, 대문채, 아랫사랑채, 김치광 등 제법 규모가 큰 고택이다.

안채는 ㄷ자로 생긴 포근한 구조로 광채를 지나 숨겨진듯한 문을 지나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광채와 함께 자리해 ㅁ자의 작은 마당이 있어 아늑하다. 사랑채는 홍범식이 3.1운동을 계획하던 역사적인 곳이다.

광과 주방등의 시설들과 문과 문이 겹치고 그 너머로 오밀조밀한 풍경이 이어지는 한국의 고택은 주변의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한국고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이런 곳에서 산다면 (양반으로, 노비 말고) 참 여유롭고 좋을텐데, 요즘 같으면 손보고 수리할 곳이 너무 많아 하루도 쉴날이 없겠다는 쓸모없는 걱정도 해본다.

괴산의 역사가 담긴 홍범식고택에서 짧은 역사공부를 마친다.

/ 괴산군SNS서포터즈 배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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