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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옥

구연동화 강사·수필가

 알람 소리에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가로등 불빛으로 하얗게 날아드는 눈송이의 율동이 나비의 날갯짓인 양 나부낀다. 윙윙 찬바람에 울던 마른 가지는 순백의 꽃을 달고 어둠 속에서 하얗게 웃고 있겠지. 이 차오르는 감정은 무엇이고 그 밑바닥으로 흐르는 그리움은 또 무엇인가. 까맣게 잊고 살아온 삶의 조각들을 불러내는 첫눈은 그냥 눈이 아니라 추억이고 낭만인가 보다.

 성탄절에 첫눈이 내리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던 순수의 계절이 있었다. 그 해에도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며 가가호호를 방문하는데 기적처럼 첫눈이 내렸다. 어디로부터 내려오는 걸까. 수천수만의 군무가 펼쳐졌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캐럴에 맞춰 왈츠를 추는가 하면 경쾌한 리듬을 타며 트위스트도 유감없이 보여주면서 꽁꽁 얼어붙은 대지를 포근하게 덮어줬다. 마지막 집에서 준비한 뜨끈한 만둣국으로 몸을 녹이고 나와 보니 함박눈이 진눈깨비로 변했다. 그때 우산 하나가 다가왔다. 혼자 쓰기에도 넉넉지 않은 작은 비닐우산이다. 둘이 함께 쓰자니 한쪽 어깨는 다 젖었지만, 차갑지가 않았다. 포개진 다른 쪽 어깨가 포근하고 따뜻해서 일게다.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그 후론 그가 건넨 말 한마디, 작은 몸놀림도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다. 양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까지도 나를 설레게 했다.

 연말이라 통금이 해제된 거리는 눈사람 인파가 줄을 이었다. 나도 그 대열에 껴서 영화관으로 빨려들었다. 상영되는 영화는 워런 비티와 나탈리 우드를 주인공으로 한 '초원의 빛'이었다. 개봉하면 둘이 함께 오리라 별렀는데 혼자서 왔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가 흐른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다시 안 돌려 진다해도 서러워 말지어다.'

 두어 구절 간략하게 소개된 것뿐인데 순간 느닷없이 영혼의 마디마디가 아파지더니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애틋함과 미련이 교차하는 두 주인공은 눈물이 가득 고여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것 같지만, 쿨 한 척 웃으며 손을 흔든다. 피차 응어리진 상처를 속으로만 아파하는 절제된 표현, 성숙한 끝맺음이 긴 여운으로 남았다. 김소월이나 김영랑 시문학에 정신세계를 의지하던 가난한 맨발의 청춘은 미국에서 날아온 명화에서 의식의 전환을 경험했다. 사랑의 아픔에 흐느적거리던 내 젊음을 청순가련의 늪에서 건져 올려 줬다.

 '나는 이제 그대를 잊을 수 있겠습니다. 한때는 그렇게도 밝았던 광채가 내 곁에서 사라지고 그 시절을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슬퍼하지 않으렵니다.' 독백처럼 중얼거리며 영화관을 나서니 하얀 눈꽃이 함박꽃처럼 피었다. 꽃의 영광이 사라져 간 자리에 환희를 피우며 오묘한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문소리에 잠에서 깨듯 추억에서 깨어나 서둘러 성경 가방을 들고 나서면서 괜스레 민망해 호들갑을 떨었다.

 "여보 눈이 와요. 첫눈이 온다고요."

 긴 세월 지치지도 않고 반복되는 내 감탄사에 얼마쯤은 장단을 맞춰 줄만도 하건만, 예나 지금이나 피식 웃기만 하는 옆 지기다. 아마도, '이 물색없는 여자야! 그 다리를 하고서도 눈이 반가우냐.'며 어이없어 쓴웃음을 흘리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두 팔을 벌리고 눈송이를 받는 내 머리 위에 우산이 펼쳐졌다.

 "감기 들면 어쩌려고."

 적당히 둔감하고 현실적인 그이는 어떤 경우에도 커다란 우산이 돼 다가온다. 그가 옆에 버티고 있어 오늘까지 감성을 토해내며 철부지로 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락사락 첫눈이 내린다. 물기 마른 겨울나무에 하얀 눈꽃을 피우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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