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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현관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눈에 척 들어오는 여덟 장 메주. 그 새 마른 건 굴려 놓고 덜 마른 것은 모로 세워 뒀다. 메주를 만들어 거실에 둔 것이 오늘로 벌써 아흐레. 밤중에 화장실 가려고 나올 때도 보면 정담이나 나누듯 소담스럽다. 둥글둥글, 복덩어리나 되는 것처럼. 이제 한 이틀 더 말렸다가 차곡차곡 재워 띄운 뒤 된장을 담그면 일 년은 걱정 없다. 부자가 따로 없다.

 올해는 어찌어찌하다가 메주를 쑤는 게 늦었다. 김장을 끝내고 11월 그믐께가 되니 손이 곱아들 정도로 춥다. 하루에 끝내자니 햇살이 퍼질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고 새벽부터 서두르는데 어찌나 추운지 성냥도 그어지지 않는다. 간신히 불을 붙인 뒤 한 솥 가득 물을 붓고는 장작을 집어넣었다. 워낙 추워서 콩을 씻기 전에 불부터 지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잠시 후 얼었던 손끝이 펴지고 훈기가 돌면서 일하기가 수월했다.

 간신히 불을 붙인 뒤 콩을 씻어 헹구고 나자 먼동이 튼다. 다시 또 남은 콩을 씻어 작은 솥에 이듬으로 안쳤다. 금방 설설 끓기 시작하면서 날도 완전히 밝았다. 일차 끓기는 했지만 온종일 쑬 요량으로 아침밥을 준비한 뒤 다시 불을 지폈다.

 몇 시간이고 뜸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연달아 장작을 넣는다. 훨훨 타는 불길이 무척이나 훈훈한데 메주 물은 금방 걸쭉해져서 뜸이 들기도 전에 자칫 타버린다. 꺼지지 않을 만치 넣고는 틈틈이 청소와 빨래를 끝냈다. 그렇게 장작을 넣고 일변 물을 붓다 보니 노루꼬리보다 짧은 겨울 해는 금방 뉘엿뉘엿해졌다.

 다 저녁때 솥을 열었다. 노릇노릇 잘 익은 콩이 푸짐하다. 뜸은 잘 들었어도 밟기는 아직 이르다. 뭉그러지도록 삶지 않으면 금방 갈라진다. 눋지 않도록 불은 꺼 뒀으나 남은 온기로도 뜸은 든다. 그 동안 쳇바퀴와 자루 등을 준비했다. 이어서 콩을 자루에 담아 밟은 뒤 쳇바퀴에 넣고 이듬으로 밟아 모서리까지 빤빤히 다듬는다. 그렇게 불그름 잘 익은 콩이 12장 메주로 연방 태어났던 것.

 나 어릴 적에도 메주 쑤는 날은 새벽부터 분주스러웠다. 어머니도 나처럼 새벽에 나오면 불부터 지피셨으니까. 초벌 때기가 끝나면 아침밥을 짓기 위해 부엌에 들어가시고 아버지가 대신 장작을 넣으면서 메줏물이 넘지 않게 지켜보곤 하셨다. 종일 삶은 뒤 메주를 만들기 시작하면 곁에서 '콩 짜가리'를 주워 먹곤 했는데 지금은 그럴 겨를도 없이 만드는 데만 급급해 있다. 그로부터 50년은 넘은 세월에, 어머니 역시 전수받은 걸 생각하면 100년은 충분한 시간이었고 그 정도로 오래 전부터 친숙했었다.

 저녁연기를 따라가노라면 그 새 나와 깜박이던 초저녁별들. 하필 추운 겨울에 쑤는, 참 번거로운 일이었으되 훨훨 타는 잉걸불을 보면 추위도 일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나 또한 먹지 않아도 배부른 거라면 잘 쑨 메주를 보는 기분이었거늘. 사 먹는 된장과는 딴판으로 구수한 맛도 그렇고 갓 태어난 메주를 거실에 말려둘 때의 통통한 아기가 목욕을 끝내고 방바닥에서 뒹구는 것 같은 정경도 탐스럽다. 메주를 쑤는 것은 하루뿐이고 말리는 것 또한 대엿새 남짓이라도 봄 마중물처럼 푼푼한 정경이었는데….

 된장이 많을 때는 한 해쯤 건너뛰어도 좋으련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동동거리시더니. 지금은 내가 더 몸을 달구고 마음을 졸인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아기자기 예쁜 구석은 약에 쓰려도 없건만 어린 나조차도 메주를 보면 든든해지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머니는 한 해라도 건너뛰면 사단이나 날듯 노심초사였을까. 어지간히 말랐을 때 촘촘 엮은 지푸라기 틈으로 드러난 콩도 못내 따습더니 어언 사십년이 흘렀다. 까마득 어린 시절 메주를 쑤던 날의 풍경이 열두 장 메주에 아련히 클로즈업된다. 훌쩍, 아주 오랜 세월 강을 건너뛰기나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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