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2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한국 독립유공자 된 세종시 부강초 출신 일본여성 '가네코'

국가보훈처, 17일 순국선열의 날 맞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부강에서 일본인 만행 목격…일본 왕 암살 혐의로 사형선고
세종시민들 "세종시나 교육청이 홍보·교육 자료로 활용해야"

  • 웹출고시간2018.11.18 16:13:29
  • 최종수정2018.11.18 16:13:29

우리나라 건국훈장(애국장)을 받는 일본인 여성 독립운동자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26·왼쪽). 오른쪽은 일제 강점기 당시 그녀와 함께 일본에서 반제국주의 활동을 한 조선인 박열(朴烈·1902∼74).

ⓒ 이규상 씨
[충북일보=세종] 일제 강점기 때 세종시 부강면(당시 충북 문의군 삼도면 부강리)에서 7년간 초·중학교를 다닌 뒤 일본에서 반제국주의 활동을 한 일본여성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26)가 우리나라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관련 기사 충북일보 2017년 7월 23일 보도>

가네코 후미코가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박열(왼쪽)과 함께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 이규상 씨
국가보훈처는 17일 "79회 순국선열의 날(17일)을 맞아 여성 32명을 포함한 총 128명의 독립유공자에게 건국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을 각각 추서(追敍·죽은 뒤에 훈장 따위를 주는 것)한다"고 밝혔다. 가네코는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우리나라 건국훈장(애국장)을 받는다.

지난해 6월 28일 개봉된 영화 '박열'로 널리 알려진 가네코의 생전 행적은 1931년 일본 춘추사(春秋社)에서 발간된 그녀의 옥중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에 잘 나타나 있다.

◇ 식민지 조선인들의 비참한 모습 수기에 묘사

수기에 따르면 가네코는 요코하마(橫濱)에서 태어났다.

경찰(형사) 출신인 아버지는 천황제를 신봉하는 권위주의자, 어머니는 하층 계급 출신이었다. 하지만 생활이 방탕했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따라서 가네코는 실제 부모가 있는데도 호적은 없는 무적자(無籍者)였다.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던 소녀는 1912년 할머니와 고모 부부가 살고 있던 조선 부강으로 갔다. 일본인만 다니던 6년 과정의 부강공립심상소학교(현 부강초등학교 전신) 4학년에 입학했으나, 할머니에게서 핍박을 많이 받아 자살까지 기도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그녀는 학교 성적도 우수했다.

가네코 후미코의 부강공립심상소학교·부강공립고등소학교 시절 학적부. 현재 부강초등학교에 남아 있다.

ⓒ 최준호기자
부강초등학교에 남아 있는 그녀의 학적부를 보면 도화(圖畵·그림 그리기)와 재봉(裁縫) 등 일부 과목만 '을(乙)'이고 대부분 최고 등급인 '갑(甲)'이다. 1917년 3월에는 2년 과정의 부강공립고등소학교(현재 중학교 과정)를 졸업했다.

가네코후미코가 자신의 옥중수기에서 묘사한 세종시 부강면 내 주요 지점.

ⓒ 네이버
감수성이 예민했던 일본인 소녀는 훗날 쓴 수기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정상(태산)에서는 부강 지역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헌병파견소(현 부강파출소)에서는 카키색 제복을 입은 헌병이 조선인을 마당으로 끌어 내 옷을 벗기고는 맨살이 드러난 엉덩이를 채찍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하나, 둘 헌병의 새된(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채찍을 맞고 있는 조선인의 울음섞인 소리도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다."

1910년 당시 부강 나루터 모습. 가네코 후미코는 1912년부터 19년까지 부강에 살았다.

ⓒ 이규상 씨

1940년대 부강파출소 모습. 1912년부터 19년까지 부강에 거주한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의 옥중수기에서 헌병파견소(현 부강파출소)에 끌려와 일본헌병에게 잔인하게 고문당하는 조선인의 비참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 이규상 씨
◇"부강초등학교에 가네코 기념비 세워야"

1919년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됐다.

22년에는 경북 문경 출신의 조선인 박열(朴烈·1902∼74)과 동거를 시작한 뒤 함께 아나키즘 단체(불령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왕(日王)을 암살하려 한 혐의로 26년 사형선고를 받은 가네코는 그 해 7월 23일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에서 끈으로 목을 매어 23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가네코 후미코가 다닌 부강공립심상소학교 터. 학교는 현 부강초등학교 건물과 출입구 사이에 있었다.

ⓒ 최준호기자
일본으로 가기 전 부강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도 직접 목격한 가네코는 훗날 박열과 함께 체포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조선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 중에서 일본인에 대한 반역적 정서만큼 제거하기 힘든 것은 없을 것입니다. 독립소요 광경을 목격한 다음 나 자신에서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서 용솟음쳤습니다."

가네코 후미코가 1912~19년 살았던 집(세종시 부강면 부강리 358 부강역 인근) 입구. 설명하는 사람은 부강 출신 향토사학자 이규상(58·전 청원군 부용면장)씨다.

ⓒ 최준호기자
부강 출신 향토사학자 이규상(58·전 청원군 부용면장)씨는 "가네코는 한국인도 되기 힘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만큼 모교인 부강초등학교에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선(38·주부·세종시 도담동)씨도 "정부가 독립유공자로 공인한 인물을 세종시나 세종교육청이 시민이나 학생들을 위한 홍보·교육 자료로 적극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종 / 최준호 기자 choijh5959@hanmail.net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