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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

 날씨가 가파르게 내리막이다. 엊그제, 천변(川邊) 둑길을 걷다가 무심코 비탈진 곳을 내려다보았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파랗던 풀잎이며 채소 잎들이 이상하다. 서리를 맞았는지 푸르던 모습은 어디가고 덤불도 줄기도 폭삭 내려앉았다. 식물의 한해살이가 그친 것이다.

 왠지 발걸음이 멈춰졌다. 그런데 저만치 시든 덤불 속에 한 아름이나 되는 호박이 반가운손님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덤불이 시들고 내려앉으면서 호박이 드러난 것이다. 왜 호박을 보지 못했지? 자주 지나는 둑길 이지만 평소엔 자세히 살피지 않아서 몰랐거나 또는 덤불에 가려 호박이 눈에 띄지 않아서일 테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그간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나서 세상에 나오지 않은 듯이 한 생을 완성한 셈이다.

 한 생을 완성한 모습에서 흉터와 주름이 없을 리 없다. 눈에 띄지 않았을 뿐 겉껍질에는 한 생이 지나간 흉터와 주름이 가득하다. 비바람에, 동그랗게 이슬을 쓰고 풀잎 위로 구르던 날도 있었을 터이다. 벌레에 쪼이고 혹은 무법자의 발길에 부딪혀 찔리고 썩고 긁힌 검은 흉터들이 지문처럼 새겨있다. 눈에 띄지 않았을 뿐 그도 한 생의 과정을 거쳐 온 것이다. 상처에는 수많은 흐름이 오갔을 것이고 빛과 공기를 뭉쳐 씨앗을 만들다 보니 주름도 생겼을 것이다.

 문득 늙은 호박이 숨어서 들었을 소리들이 궁금하다. 그 둑길을 오갔을 수많은 소리들을 떠 올려 본다. 우선 천둥 번개의 환란이 없지 않았을 테다. 생의 과정이었겠지만 그는 환란을 어떻게 잠재웠을까. 때로 들리는 새소리에 희망을 가졌을까. 둑길을 질러가던 차들의 경적 소리와 먼지는 그를 얼마나 불안에 떨게 했을까. 유래 없던 올 여름 폭염은 또 어떻게 버텼던가. 그것은 천둥번개의 환란보다 더 쓰라리게 생을 위협했을 텐데.

 수많은 이별과 만남과 슬픔과 미소가 흐르는 씨앗을 품은 호박이다. 그는 철저히 혼자다. 언뜻 보아도 어쩌다 떨어진 생명처럼 보인다. 그를 둘러싼 환경이 이를 설명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한해만 살다 죽는 존재가 아니라고 씨앗으로써 증명한다. 그에게 씨앗은 그 자신이며 미래며 생이며 전부라고 생각했나 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 종내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아무도 없을 것 같아 실례했던 인간의 구린내도 소리가 되고 소변 소리마저도 다 흉중에 품어 한 결실이 되지 않았던가. 구린내도 오래 품어 왔으니 그렇다면 구린내도 소리가 되고 한 줄기 소변도 시원하리라. 이 모두 스스로 소화한 것이다.

 스스로 말하고 듣는다는 것. 구린 내마져 소리가 되는 호박의 이 묵직한 울림. 그렇다면 나는 여태껏 어떤 소리에 귀 기울였을까. 듣고 싶은 소리만을 들으려 했던 적은 없었는지. 옳은 소리를 듣고도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외면했던 적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늙으면 목소리가 가랑비처럼 부드러워진다고 한다. 조용조용 내리는 가랑비는 주위의 소리와 함께 들린다. 나와 다른 소리들을 품고 잠재우기에 그러리라. 오랫동안 호박은 그렇게 젖어 든 소리들을 품어 안아 왔을 것이다. 이제 계절이 지나는 늙은 호박에선 소리는 없고 소리씨앗만 주름진 흉중에 품고 있다.

 요즘 들어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분분하다. 남의 소리를 품기는커녕 아예 들으려 하지를 않고 소리만 지른다. 그런데 정작 그 소리엔 논리도 상식도 없다. 스스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말 할 수 없으니 시류에만 떠다닌다. 이는 자신의 뚜렷한 삶의 지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얘기 아닐까. 듣지 않고 어찌 스스로 말할 수 있을까. 그날 나는 호박 하나 덩그러니 놓인 풍경에서 스스로 말하고 듣는 한 은일자(隱逸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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