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에는 백색 이미지가 자주 나타난다. 흰 변기로 대표되는 사물화 상상력과 눈사람으로 대표되는 여백의 상상력이 공존하는데, 둘 다 인간의 죽음과 무위를 암시하는 상상력으로 불교와 미술, 특히 초현실주의 화가나 시인들, 동양의 노장사상과 연관된다. 그가 태어나 자라고 생활한 강원도라는 지리적 공간의 영향도 클 것이다. 오래전 시인은 태백산맥 기슭의 강원도 정선군 사북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 적이 있다. 당시 탄광촌이었던 사북은 그의 초기 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북은 시인에게 원시적 상상력을 제공하는 근원적 공간, 사색과 성찰을 낳는 유폐의 공간이다. 대자연의 광대한 산맥과 눈보라는 인간 존재의 미미함을 되돌아보게 하며, 탄광촌에서 살아가는 탄부들과 가족들의 모습은 삶의 폐허와 허무를 깊게 사유하도록 한다. 나아가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외적 조건들, 즉 국가나 사회가 행하는 폭압을 비판적으로 주목하게 한다. 사북에서의 이런 고통체험과 비판의식이 밀도 높게 집약된 것이 첫 시집 『대설주의보』(1983)다. 「대설주의보」는 이 시집에 수록된 표제작이다.
눈보라가 거대한 해일처럼 휘몰아치는 흰 산들과 골짜기를 따라 숯덩이처럼 날아가는 작은 굴뚝새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긴장감 높은 시적 묘사와 소재들의 적절한 공간 배치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눈보라가 백색의 계엄령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겨울 산의 골짜기가 먹고 먹히는 살생의 공간, 학살의 공간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 시는 대자연의 위엄과 장관을 회화적으로 그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1980년 신군부의 계엄령 선포, 무자비한 무력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주검들을 연상시킨다. 굶주린 솔개의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지키
대설주의보 - 최승호(崔勝鎬 1954∼ )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르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