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14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웹출고시간2018.03.29 18:04:23
  • 최종수정2018.03.29 18:04:23

조혁연

충북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

전회에 신미대사가 세종대왕 한글창제 작업에 도움을 줬을 가능성에 대해 4가지 가운데 2가지를 언급했다. 하나는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됐던 시기에 세종대왕이 어떤 이유로 신미대사를 궁궐 안 침실 공간으로 불러들였고, 그리고 극진한 예를 갖췄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세종이 신미대사에게 내리려 했던 긴 시호이다. '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의 무려 26자 시호 가운데 '나라를 도왔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인 '우국이세'가 특히 문제가 됐다.

왜 세종대왕은 모든 대신이 백안시하는 한 승려에게 '나라를 도왔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시호를 내렸을까· 이 부분이 신미대사가 한글창제 작업을 도운 것에 대한 '대가적인 시호'가 아닌가라고 추정이 되는 대목이다. 결국 후임왕 문종은 '우국이세'는 삭제하고, 또 다른 극촌칭이었던 '혜각존자'는 '혜각종사'로 표현을 격하해야 했다.

신미대사가 한글창제 작업을 도왔을 가능성의 세 번째로 추정 근거는 그와 수양대군 세조가 '어떤 것'이 계기가 돼 인간적으로 무척 친했다는 점이다. 일부 어문전문가는 이때의 '어떤 것'을 한글창제 작업에 두 사람이 공동 참여했을 가능성을 꼽고 있다. '세종실록' 29년 6월 5일자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돼 있다.

"수온(守溫, 김수온 지칭)의 형이 출가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신미(信眉)라고 하였는데, 수양대군 이유(李·)와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심히 믿고 좋아하여, 신미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무릎꿇어 앞에서 절하여 예절을 다하여 공양하니 사림에서 모두 웃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한글창제 후 1년, 즉 세종이 우리고장 초정약수로 거둥하기 직전에서야 이를 알고 격한 상소를 했다. 이것은 세종이 골수 유학자이자 사대주의자들인 집현전 학자들에게는 한글창제 사실을 그 시점까지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런 상황에서 신미대사가 수양대군에게 이론적인 도움을 주면서 13살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인간적으로 가까워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세조실록'10년(서기 1464) 4월 21일자의 기록을 보면 세조의 어가는 세종대왕이 머물렀던 우리고장 초정약수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세조는 초정약수에 닷새간 머문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동행한 세자(후에 예종)가 아팠기 때문인지 사냥을 한 것 외에는 별로 한 것이 없다. 반면 속리산 거둥에서는 분명히 의도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것은 세조 남행의 주된 목적이 속리산 복천암 신미대사를 만나는데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세조실록' 10년 2월 28일자에는 이런 내용이 보인다.

"복천사에 쌀 3백석, 노비 30구, 전지(田地) 2백결을, 속리사에 쌀·콩 아울러 30석을 하사하고 신시에 행궁으로 돌아왔다."조선시대 1결은 약 3천평 가량으로 전지 2백결은 60만평에 해당한다. 이들 땅은 당시 세조가 하사한 '전지 60결'의 일부로 보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 그래서일까, 사내리(사하촌)서도 한참 먼 정이품송 근처에는 "세조가 이것을 끌고 가는데까지 너희 땅으로 삼아라"라는 전설이 서려있는 은구석(恩救石)이 존재하고 있다. 정이품송 전설도 이때 만들어졌다.

세종의 한글창제 작업을 도왔는지 여부를 떠나, 신미대사가 한글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였다. '예종실록' 1년(1469년) 6월 27일자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중 신미가, 임금이 중들에게 '금강경'과 '법화경'을 강(講)하여 시험해서, 능하지 못한 자는 모두 환속시키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언문으로 글을 써서 비밀히 아뢰기를(하략)."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