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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고 한다. 올 겨울은 백석의 이 시를 백 번도 넘게 읽는다. 아니 이백 번도 넘게 읽었겠다.

북관의 사투리와 옛말로 읽는 백석의 시는 나를 압도한다. 말상을 하고, 범상을 하고, 족제비상을 한 영감들이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린다. 그 영감들이 눈부신 북관의 석양빛 속으로 사나운 짐승처럼 사라져가는 광경만으로도 난 불끈 힘줄이 솟는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도 백번이 넘게 읽었겠지만 다시 읊조리게 된다. 저녁 무렵 쌀랑쌀랑 싸락눈이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 어느 먼 산 바위 옆에서 홀로 하얀 눈을 맞을 갈매나무를 생각하다 보면 나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백석과 함께 겨울밤을 지난다. 백석의 단 몇 편의 시만으로도 며칠 밤을 꼬박 새울 수 있을 것만 같다. 백석의 시를 읽다보면 내 모국어가 자랑스럽다. 몇 개의 낱말만으로도 풍성해지는 언어의 성찬, 투박하면서도 정감 있는 우리 토속어들의 향연에 난 절로 들뜬다.

그 중에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단연 나를 사로잡는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인데, 깊은 산골 오두막집에서 더는 바랄 것이 없을 테다.

아무런 수사가 없이도 울림이 깊고, 어떠한 조탁도 없이 투명하고 청정하며, 푹푹 내리는 눈만으로도 애잔한 사랑을 이리도 절절하게 그려내다니.

난 이 한 편의 시만으로도 백석에게 매료되었다. 예전에도 백석의 시를 접해보았을 것이나 지금 이 시에 빠져든 것은 왜일까. 아마도 내가 이 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난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것을 비워냈기 때문이리라.

백석의 시로 인해 산문만 쓰는 나는, 시 쓰는 사람들이 질투난다.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쳐 단 한 줄의 정제된 말을 건져내는 사람들, 시의 운율이 일상의 선율로, 생의 기율로 이어지는 구도와도 같은 행위들, 난 진실로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더 많이 모으고, 더 높이 쌓는 것이 아닌 더 많이 버리고, 더 낮아지는 것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시, 그런 시를 쓰는 사람들, 그런 시의 삶을 사는 이들이 부럽다.

흰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눈이 내리는 깊은 산골로 흰 당나귀를 타고 가는 백석과 나타샤의 모습으로, 온통 흰 색뿐인 세상, 순백의 도화지에 놓인 산골 오막살이의 풍경으로 한 해를 시작하면 좋겠다.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는 믿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것, 지칭되지 못하고, 포착할 수 없고, 환원 불가능한 세상의 타자들로 매양 안타까울지라도, 언젠가 내게 고조곤히 와서 이야기하는 나타샤를 기다리듯이, 난 세상을 향해 정 깊은 믿음만으로 새해를 열고 싶다.

백석이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푹푹 내리듯, 내가 사랑하니 포근한 바람이 불고, 내가 사랑하니 봄꽃이 흐드러질 것이고, 내가 사랑하니 내 생애도 빛이 날 테고, 내가 사랑해야 나를 견뎌낼 것이니, 나는 사랑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새해에는 그리 할 것이다.

한 해의 끝과 첫날을 온전히 백석의 시로 채운다. 나는 눈이 펄펄 내리는 허허벌판의 적경(寂境)으로 간다.

쌀랑쌀랑 소리를 내며 눈을 맞는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며 난 푹푹 눈 내리는 겨울을 지난다. 좋아서 응앙응앙 울어댈 흰 당나귀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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