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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광년(光年)을 생각했었다.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도는 빛의 속도로 1년 동안 가야 닿는 거리, 무한의 시간이었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무구한 시간을 생각할 때면 이 세상은 경이롭고 신비롭고 두려운 수수께끼였다.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한 과거와 미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난 그 속을 유영하는 찰나의 먼지, 난한없이 겸손해져야했다.

겸손해진다는 것은 삶에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며,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주적인 아득함을 우러르며 그 깊이를 경외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세상살이의 사소하고 시시한 탐욕과 미움과 어리석음과 상투성만으로 내 생애의 칸들을 채워가고 있었다. 남 겸손하지 않았다.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지 못했다.

이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란 또 얼마나 힘든 일인지, 더구나 선해지기란, 아름다워지기란, 충일한 삶을 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하여 난 왜소해졌다. 부끄러워졌다. 내 삶의 비대칭과 불균형과 불충분과 모호함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를 되돌아보았다. 내 삶의 치명적인 공허가 '내 삶의 안'이 아니라 '내 삶의 밖'에서 살아왔기 때문임을,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은 것이 원인임을 알았다.

책을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인터넷서점에서 실버에서 골드로, 급기야 플래티넘 회원으로 분류되어졌고, 책을 주문할 때마다 가끔씩 깜찍한 사은품을 받았다.

새벽 3시쯤에 일어나서 책 한권을 읽은 후에야 출근했다. 다시 어떤 책을 읽을지를 고심하다보면 마음이 설레었다. 나를 돌아보는 일이 절실해 질수록 서가에는 더 이상 책을 꽂을 수 없을 만큼 쌓여만 갔고, 수시로 책을 내다버렸고 남에게 선물했다.

활자를 더듬고 문장을 음미할 때 내게는 매번 작은 섬광이 일었다. 그것은 경탄, 황홀, 매혹, 낯섦, 충격, 당혹, 절망, 아픔, 연민, 슬픔, 기쁨의 불꽃이었다. 아니 그 모든 것이었다. 난 책을 읽을 때 가장 행복했다.

한 사람의 시를 읽을 때 그 시인이 되었고,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 또 한 사람의 삶을 살았다. 한 권의 철학책을 읽을 때 난 철학자가 되고 사상가가 되었고, 때론 과학자가 되기도 했다.

난 왜 읽고 또 읽는가. 생계를 꾸려야하는 현실에 책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가끔씩 회의적으로 멈칫거리기도 했지만 지난 10여 년간 난 한 순간도 멈추질 않고 책을 읽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하루에 한두 시간 이상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내 시력이 독서에 제동을 걸며 활자에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더 이상 무모한 독서를 하지 말라는 전언을 보냈다. 더 많은 책을 읽으려 하는 것조차 욕심임을 흐릿한 시력으로 경고했다. 이때부터 난 '빈자리의 미학' '여백의 미학'을 돌아보게 되었다.

무한 광대한 우주의 심원함과 생의 비밀을 깨우치고, 완숙한 삶을 추구하려는 독서조차 사실은 더 많이 비우기 위해서, 더 넓은 여백을 만들기 위한 것임을, 생의 신비도 '해석의 빈자리'가 많을수록 더 풍부해진다는 사실을 문득 알게 되었다.

"육경은 모두 나를 위한 각주에 불과하다"는 남송의 육상산의 말처럼, 내가 읽은 모든 책은 내 삶의 주석이었다.

난 책을 통해서 비로소 '본래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제 제대로 겸손해졌고, 자연의 순리를 담담히 담아내는 마음의 밭, 텅 빈 심전(心田)을 가꾸는 것으로도 넉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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