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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사람이 떠난 텅 빈 거리는 메마른 바람만 저 홀로 불었다. 빛바랜 흑백사진의 질감으로만 남은 거리, 사람의 냄새와 체온이 배어있는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고 싶은 거리, 강원도 철암의 거리는 치열한 실존을 버티던 사람들이 더는 보이지 않고 다만 풍경으로만 남아있다.

빨간색 기차, V-트레인을 타고 왔다. 중부내륙순환열차를 거쳐 경북의 최북단 봉화, 그 봉화의 최북단 분천역에서 이 협곡열차는 출발했다.

겨울이 시작하는 차창 밖으로 서서히 낙동강으로 내지르는 협곡이 깊어졌다. 계곡의 깊이만으로도 육중하게 흘렀을 여름의 물줄기가 가늠된다.

고속열차의 딱 10분의 1의 속도로 1시간 정도 달리는 열차, 중간에 양원이나, 승부역 등 두어 평 남짓한 간이역에 정차하는 기차는, 가 닿고 싶으나 갈 수 없는 아득한 순간, 쓸쓸하지만 따스한 미소를 짓게 하던 추억, 그 시간 속에서 가슴 저리게 하던 사람들을 그립게 한다.

탄광촌, 막장 인생들이 마지막으로 닿는 곳, 우리가 아는 막연한 지식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60년, 70년대만 해도 3만 명 이상의 인구가 북적이던 철암은 부나방처럼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검은 황금'을 캐기 위한 젊은이들이 매일 넘쳐 났고 돈은 흥청대었다.

대졸 초임이 5만원 하던 때 광부의 월급은 20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한 시대, 한 국가의 경제를 견인하던 석탄 산업은 이제 그 흔적만 전시되어 있다.

난 그 거리를 걸었다. 젊은 시절 지하 수백 미터 갱에서 석탄을 캐던 늙은 광부는 홀로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셨고 나도 순대국과 막걸리를 시켰다. 지금도 가동하고 있는 선탄장 앞에서 흑백사진을 찍고 난 후였다.

지나가는 풍경에서 삶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축복이다. 초로의 광부와 금방 친해진 내 동료 신과장은 그 어르신과 열띤 대화중이다. 난 그 친구의 그런 점이 좋다. 사람에게 다가갈 줄 알고, 연민과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친구이다.

내 고향 문경도 탄광촌이었다. 그곳에서 그나마 지식인으로 통하던 내 아버지는 사고로 다치거나 사망한 이들을 위해 가끔씩 안동에 있는 노동부 사무소를 다녀왔다.

그 날마다 아버지는 술을 한잔 드시고는 나를 불렀다. "얘야, 이 사람들이 비록 막장 인생 같지만 시를 쓰는 사람도 있고, 소설가도 있고, 대학 나온 사람들도 많단다. 그들은 겸손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골목 가득히 웃고 있는 저 아이들의 아버지들이다."

거의 50년이 되어가지만 그 말만은 또렷하게 기억되니 신기할 따름이다. 난 시를 쓰는 광부를 알지 못하지만 광부의 딸로 살아왔던 한 시인은 안다. 난 그 시인의 정제된 보석 같던 시어들을 좋아했다. 한 때는 그 시들을 아침마다 읊조리곤 했었다.

수 백 미터 지하 갱도에 유배당한 것처럼 암담했을 사람들, 점점 낮은 곳으로 내려가지만 더 높이 치솟고 싶던 사람들, 해맑게 웃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진창으로 빠지는 노동을 견뎌낸 사람들, 땅속의 캄캄한 시간을 빛으로 여겼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어디로 떠난 것일까.

이 세상의 경계마다 막장 아닌 삶이 어디 있으랴. 사람이 떠난 곳이 막장이며 사람의 온기를 잃은 곳이 막장인 것을.

행여 삶이 외롭거나 고달프다고 여겨질 때면 이곳의 간이역을 서성여보고 무채색의 철암에 가 볼일이다. 이곳을 떠난 광부의 딸은 지금도 보석 같은 시를 쓰고, 광부의 아들은 그의 아들을 위해 또 다른 무지개빛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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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