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을 지운 후 그는 자아로 시선을 돌려 존재의 바닥 깊은 곳까지 파고들면서 전위적 인식실험을 감행한다. 우리 현대시의 인식론적 결핍과 부재를 뼈아프게 자각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까지 이런 전위적 인식실험이 심도 있게 이뤄졌던 사례는 이상과 김춘수 정도였다. 이상(李箱)이 격렬하고 과격한 심리적 세계를 지향했다면, 김춘수(金春洙)는 온건하고 차분한 존재론적인 세계를 지향했다. 두 선배 시인의 작업을 승계하고 심층적으로 탐구하면서 이승훈은 놀랍고도 아름다운 초현실의 시들을 건져 올린다. 고독과 폐허, 의식의 날카로운 촉수들이 묻어난 아픈 시들을 낳는다.
무의식과 욕망에 대한 시적 탐구와 해부는 언어로 이루어진다. 이 기록과정에서 시를 쓰는 이승훈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고 성찰하는 또 하나의 이승훈이 나타난다. 따라서 자아에 대한 탐구는 필연적으로 자아의 분열, 너의 소멸과 부재로 이어지고 언어에 대한 근원적 회의로 이어진다. 자아와 대상 사이에 놓인 언어에 대한 탐구는 이승훈 시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자아에 대한 탐색이 언어 자체에 대한 메타의식을 낳고, 의미를 배제시킨 시니피앙 유희를 낳기 때문이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그의 시세계는 또다시 변화한다. 대상과 자아의 소멸 이후 언어마저도 지워진 세계, 시를 쓰는 행위 자체만 남는 불이(不二)의 세계로 접어든다. 불교의 선(禪) 세계와 접촉하면서 언어가 자아와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도구적 방편일 뿐 실체가 될 수는 없다는 뼈아픈 자각에 다다른다. 그 결과 시와 일상의 경계는 무너지고, 예술과 삶의 경계는 지워지고, 시와 삶의 형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대승적 초월, 자유분방한 포월(包越)의 세계가 펼쳐진다.
/함기석 시인
너를 본 순간 이승훈(李昇薰, 1942년~ )
물고기가 튀고
장미가 피고
너를 본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를 본 순간
그 동안 살아온 인생이
갑자기 걸레였고
갑자기 시커먼 밤이었고
너는 하이얀 대낮이었다
너를 본 순간
나는 술을 마셨고
나는 깊은 밤에 토했다
뼈져린 외롬 같은 것
너를 본 순간
나를 찾아온 건
하이얀 피
쏟아지는 태양
어려운 아름다움
아무도 밟지 않은
고요한 공기
피로의 물거품을 뚫고
솟아오르던
빛으로 가득한 빵
너를 본 순간
나는 거대한
녹색의 방에 뒹굴고
태양의 가시에 찔리고
침묵의 혀에 싸였다
너를 본 순간
허나 너는 이미
거기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