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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묵정밭에 꽃이 피었다. 노란 달맞이꽃과 연분홍 메꽃이 새초롬하게 곱다. 잡초투성이 땅도 눈길을 끌 때가 있나 싶어 무더위도 잠깐 잊었다. 애기똥풀로 뒤덮일 때는 유채꽃밭 이상으로 화려했었지. 허옇게 바랜 것처럼 피어 있던 망초꽃도 흡사 진초록 덤불 속의 안개꽃이다. 특별히 묵정밭 할 때는 어딘가 황폐한 이미지였건만 마치 고향 마을 뒷산의 해묵은 느티나무 소나무가 떠오르는 것 같던 그 기분.

묵정밭은 오래 버려두어 황폐해진 땅을 말한다. 줄여서 '묵밭'이라고도 하는데, 농사를 짓는 경우 거름은 좋아도 작물을 키우면서 점점 산성화된다. 논 같으면 추경秋耕이라 하여 가을갈이를 하면서까지 돌보는 대신 버려진 자식 같은 묵정밭은 풀만 잔뜩 올라왔다. 그 때문에 오히려 기름진 땅이 되었다고 했지만 한편 모질고 딱딱한 밭이라 노심초사 뿌리박을 동안 탐스럽게 자라 꽃들조차 이쁘게 피었을 것 같은 느낌. 그야말로 묵혀둔 밭이었는데……

술하고 친구가 오래 될수록 좋다는 건 흔한 얘기였으나 아무리 들어도 물리지는 않는 것 같다. 닳고 해져서 볼품없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더 정이 가고 끈끈해지는 것들.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그것들은 오래된 만치 묵은 정이 들었다는 의미였을까. 바이올린과 첼로 등의 악기도 오래되면 소리가 더 그윽해진다니 특별하다. 그 외에 들을수록 정이 가는 클래식 음악과 읽을수록 깊은 뜻이 우러나오는 고전문학 등 수없이 많다. 손때가 묻고 정이 들면서 어쩐지 더 예쁘고 정겹게 다가온다면 그만치 깊은 연륜과 정을 드러낸다.

가끔 묵혀 둔 추억의 잡동사니를 꺼내 볼 때가 있다. 너무 오래 되어 알아볼 수도 없이 퇴색해 버린 것도 있고 얼결에 미소를 짓게 되는 기억 또한 많다. 기쁘고 즐거웠던 일이 아름답게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생각하는 것조차 싫었던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이 아득히 그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 만치 소중하게 떠오르는 것 또한 해묵은 세월에 투영되면서 추억으로 바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묵은 동굴 바위틈에 핀 물망초가 거친 돌산에서 때로는 훨씬 더 선명한 이미지로 전달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게 곧 오래 전의 추억 때문이라면 묵은 것이야말로 향수적이다. 어려운 상황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 묵었다는 것은 지난 일이었으되 지나간 날은 또 수많은 오늘로 이루어졌다. 추억이 곧 삶의 묵정밭에 핀 꽃이라면 오랜 날 묵혀 둔 탓이다. 사는 게 힘들다고 본의 아니게 들쑤시거나 했다면 이따금 옛일을 회상하는 등의 추억에 잠기지는 못했을 터. 가끔 있는 그대로 묵혀야 할 게 많다는 것 또한 그 의미로 타당하다.

가령 더럽고 지저분한 것을 걸러내면서 자연 경관을 정화시키는 갯벌이 있고 울창한 숲은 또 허파의 기능을 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만들어낸다. 바다와 강 역시 가능하면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할 것들인데 최근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는 게 문제였으니 추억 또한 오래 묵은 중에도 소중히 간직할 동안 정서적으로 바뀌면서 윤택한 삶을 만든다. 추억을 생각할 때는 누구나 마음이 따스해지면서 힘겨운 삶을 견디게 되는 것이다. 묵기는 했지만 묵어서 약간 싫증이 날 때라야 갓 나온 게 더 신선하게 느껴지듯 말이다.

말은 또 묵었다고 하나 햇것의 근간이고 뿌리다. 햇것도 좋기는 하나 못지않게 소중할 수 있는 해묵은 것들. 우리들 어쩌다 이룬 꿈 역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소망 등이 밑거름으로 된 것일 수 있다. 튼실하게 자라도록 마음 속 깊이 뿌리박아 둔 것인데 우연히 싹이 트면서 꽃이 피고 열매까지 맺는 경우가 숱하게 많다. 어쩜 그래서 더 소중할 수 있는 여지를 보는 것 같다. 오늘 본 달맞이꽃과 메꽃이 별나게 화려한 것도 묵혀 둔 밭에서 핀 그 때문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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