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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일"

박한규 6·25 참전용사 인터뷰
강원 금화에서 벌어진 전투서 국군중 유일 생존
"60여년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참상에 괴로워"

  • 웹출고시간2017.06.22 18:57:11
  • 최종수정2017.06.22 20:20:26

22일 박한규(87·사진) 참전용사가 충북6·25참전용사전우회 사무실에서 당시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정종현기자
[충북일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잊힐 뿐이다."

어린 나이에 한국전쟁에 참전해 어느새 목발을 짚은 노병이 된 박한규(87·사진) 참전용사.

함께 싸운 전우들은 67년이라는 시간 동안 모두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가 한국전쟁에 참여한 사실은 목에 걸린 무공훈장만이 기억할 뿐이다.

박한규 참전용사의 기억 속에 전쟁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참상이었다.

당시 3사단 23연대 10중대 소속으로 강원도 금화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전한 박한규 중사.

그는 60여년이 지난 현재도 그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박 용사는 "당시 상부에서 경계근무 지시가 내려와 중대가 아닌 참호에서 근무를 섰다"며 "근데 중공군이 박격포 진지를 구축하고 중대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이 포격으로 경계근무를 서던 인원을 제외한 10중대 전원이 전멸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중공군이 진군해오는데 수를 셀 수 없었다. 가지고 있는 총알보다 많았다. 수류탄을 던지는데 얼마나 많이 던졌는지 안전핀을 뽑던 입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고 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 생존자는 박 참전용사 단 한 명이었다.

국군으로서 그의 마지막 전투는 1952년 10월께 북한강 상류에서 벌어졌다.

그는 "눈이 내렸는데 이번에도 엄청난 중공군이 몰려오더라. 연막탄으로 포격 위치를 표시하고 본부에 포격을 요청했다"며 "그때 무전했던 내용이 아직도 생생하다. '949고지 능선에 적군 출현'"이라고 말했다.

수백발의 포탄이 중공군을 사살했지만, 박 용사 역시 그 포에 맞게 됐다.

그는 "아군 포탄인지 적군 포탄인지 모를 정도로 수많은 포탄이 날아왔다"며 "결국 그 포를 맞고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명예제대하게 됐다"고 했다.

박한규 참전용사는 마지막으로 "그 많던 전우들이 모두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어. 지금도 골이 아파. 마지막 전투 때 맞은 포탄의 파편이 아직 머리에 있는 것 같아"라며 "다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잊어서는 안 돼"라고 눈을 감으며 말했다.

/ 강준식·정종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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