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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의 한국문화답사 - 아라시야마(嵐山)Ⅱ

가쓰라가와 상류에 제방 쌓아서 水田 확대
고대 일본인 한번도 경험못한 경이적 기술
중국 사천의 도강언과 같은 토목공법 적용
큰 수로 작게 나누는 방법 정맥 원리와 비슷

  • 웹출고시간2015.10.26 18:31:28
  • 최종수정2015.11.30 18:50:26

하타씨 가문의 우지데라(氏寺)인 하치오카데라(蜂岡寺)

헤이안 수립 이전의 교토를 지배한 호족은 하타(秦)씨였다. 하타씨 세력의 강대함은 교토시 중경구에 위치한 헤이안창생관(平安京創生館)에 그려져 있는 하치오카데라(蜂岡寺) 조감도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하치오카데라는 헤이안 설립 이전의 사찰로 하타씨 가문의 우지데라(氏寺)로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이다. 헤이안창생관에 그려져 있는 하치오카데라의 조감도를 보면, 흡사 나라에 있는 호류지(法隆寺)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장대하다. 이 하치오카데라를 후에 장소를 조금 바꿔 건설한 것이 지금의 교류지(廣隆寺)이다.

이 거대한 사찰을 건립한 하타노 가와카쓰(秦河勝)를 비롯한 하타씨 일족들은 아라시야마(嵐山)일대의 가쓰라가와(桂川)에서 물을 끌어들여 하타씨의 대종가의 본거지인 우즈마사(太秦) 일대의 수전을 개발하였다. 신라에서 온 하타씨들은 우즈마사 일대에 논을 만들기 위해 가쓰라가와 상류에 제방을 쌓기 시작하였다. 하타씨에게 있어서 가쓰라가와 상류에 제방을 쌓고 댐을 만드는 기술은 고국에서 익히 해보았던 토목공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대 교토에 살았던 일본들에게 있어서는 한 번도 경험하거나 본적도 없었던 경이적인 기술이었다.

동아시아에서 강의 물줄기를 변경하는 대규모 댐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철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부터였다. 그 시기는 중국으로 말하자면 전국시대, 한국은 삼한시대, 일본은 고분시대에 해당한다. 즉 동아시아 3국은 각 500년 정도의 시간 차이로 대규모수리관개시설의 보급되었다.

중국 사천의 민강(岷江)의 도강언(都江堰)

고대일본은 철을 자체 생산하지 못하고 가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대규모수리관개시설의 보급은 도래인에 의해 철과 말이 수입되고 새로운 신기술이 일본열도에 들어온 고분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하타씨가 고대일본의 교토에서 진행한 대규모 수리관개사업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하였던 것이었을까? 중국 사천의 민강(岷江)에 남아있는 도강언(都江堰)은 강의 물줄기를 다스리는 고대의 토목기술을 내용을 잘 보여준다.

가쓰라강 상류의 수리관개시설. 하타씨가 건설했을 당시의 형식과 다를 바 없다.

도강언은 민강을 둘로 나누는 인공 섬을 강의 중간에 만들어 물줄기의 일부를 성도평원(成都平原)으로 보내는 방식의 수리시설이었다. 하타씨 일족들이 아라시야마의 가쓰라가와에서 물을 끌어들여 우즈마사 일대의 수전을 개발한 방식도 기본적으로 중국 사천의 민강에서 만든 도강언의 건설방식과 유사하다. 즉 홍수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강의 물줄기의 일부를 분리하여 그 물을 우즈마사 일대로 끌어들여 그 일대를 수전으로 개발하는 방식이었다.

현재 아라시야마의 가쓰라가와의 상류에는 가쓰라가와의 물줄기의 일부를 끌어들이는 시설이 있다. 그것은 콘크리트로 만든 것이지만 기본적인 형태와 형식은 하타씨가 가쓰라가와에서 물을 끌어들여 우즈마사 일대에 보급했을 때 만든 것과 동일하다.

가쓰라강에서 끌어들인 물이 우주마사 일대로 흐르고 있다.

교토에 살면서 누에신사와 헤비즈카(蛇塚)를 찾아 우즈마사 일대를 걸어본 적이 있었다. 우즈마사 일대의 작은 하천에서 하타씨가 남긴 수로의 흔적을 상상해보았다. 지금 흐르고 있는 우즈마사 동네의 하천 제방은 모두 콘크리트로 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하타씨가 건설했을 당시의 물줄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곳곳에 크고 작은 수로가 눈에 띈다.

골목길의 작은 수로는 다시 물줄기가 나뉘어져 더 작은 수로를 형성한다. 이 작은 수로는 우리 몸에 흐르는 가는 정맥의 혈관과 같다. 정맥의 작은 혈관을 통하여 흐르는 피를 통하여 신체가 유지되듯이 하타씨는 가쓰라강의 상류에 댐을 만들고 교토 분지 전체에 혈관처럼 가는 수로를 만들어 교토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었다.

물론 지금 우즈마사 일대에 보이는 수로는 모두 콘크리트로 물줄기를 나누고 있지만, 이 역시 기본적인 형태와 형식은 하타씨가 가쓰라가와에서 물을 끌어들여 우즈마사 일대에 보급했을 때 만든 것과 동일하다. 우즈마사는 교토에서도 아주 낙후된 지역이기 때문에 오히려 헤이안시대의 수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하타씨는 이처럼 대규모 개간사업을 통하여 습지를 옥토로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넓은 농지를 확보하면서 5세기말 교토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하타씨는 가야계 신라 도래인 집단으로, 야마토노 아야(東漢)씨와 더불어 도래계 씨족의 최대세력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하타씨의 조상이 중국 시황제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교토의 주택가의 논에서 추수를 마친 후 볏짚을 말리고 있다.

이것은 도래계씨족인 아야(漢)씨가 후한의 영제의 자손이라는 계보가 만들어진 것처럼 한씨와 아울러 강대한 씨족을 자랑했던 하타(秦)씨의 조상도 중국 시황제로 분식(粉飾)된 것이었다. 백제계의 한씨나 신라계의 진씨의 조상이 일본에 도래하고 씨족집단을 형성한 것이 5세기 후반이었고 진(秦)의 이름으로 그 조상의 계보를 중국의 진시황제에게서 구한 것이 6세기 전반이었다.

그런데, 진의 시황제는 기원전 221년, 중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기원전 210년에 서거하고 기원전 206년 3대의 자영 때에 멸망하였다. 그렇다면 진이 멸망하고 시황제의 자손이 한반도에 와서 정주하고 거의 700년 후에 하타씨가 조선반도에서 일본열도로 도래했다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물론 완전히 근거가 없다.

신라의 '신(新)'과 진시황의 '진(秦)'은 일본어로 모두 '신'으로 발음된다. 신라계 하타씨의 조선(祖先)이 중국에서 시작하는 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고구려ㆍ백제ㆍ신라는 번국이고, 당제국은 인국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음을 의미한다. 하타씨는 신라계 도래인이었고 고대 교토를 만든 최고의 공로자였다.

/ 임병덕(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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