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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그 물길 위의 인문학 - 안석경과 삽교만록

안석경, 박지원에 앞서 '대두' 등 18편 한문단편 창작
18세기 남한강변에 형성된 신흥 도회적인 분위기 바탕
어문가들 "소설적인 문체에 생활적인 문장 감각" 호평
충주의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에는 거의 안 알려져

  • 웹출고시간2015.10.05 19:08:34
  • 최종수정2015.10.05 19:08:34
산속의 봄술이 익었다기에

가랑비 맞고 이웃에 가서 취하였네.

두건 젖혀 쓰고 느지막이 돌아오니

개울에 비친 꽃들이 쓸쓸하네.
- <'삽교만영', 삽교집>
[충북일보] 안석경(安錫儆·1718-1774)은 전회 소개한 안중관과 고령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자는 숙화(叔華), 호는 삽교(·橋)이다. 그는 부친 안중관과 함께 충주 가흥촌에서 살다가 1740년 원주의 흥원(興原)으로 이주하였다.

충주 가흥과 원주 흥원은 행정구역으로는 상당히 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그리 멀지 않은 상류와 하류이다. 그리고 흥원은 남한강과 그 지천인 섬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충주로 치면 남한강과 달천에 해당한다.

남한강과 섬강은 안석경의 물길 교통로로 자주 이용됐다. 섬강은 남한강의 지천으로 강원도 횡성의 삽교로도 연결된다.

섬강은 정약용이 충주 하담과 남양주를 물길로 오르내릴 때마다 스쳐 지나갔던 곳으로, 강가의 풍광이 선계(仙界)처럼 다가왔다.

'섬강 나루에 해가 뉘엿뉘엿 저무니 / 여기저기 흐르는 물 석양빛이 일렁인다. / 멀리 있는 일엽편주 술 실은 배이런가 / 오리 쌍쌍 날아가는 데가 어부의 집이라네. / 봄 지난 버들이 언덕머리 아직도 푸르게 하고 / 꽃이 지는 물에 비쳐 바위 얼굴 때때로 붉어지네. /…/.'-<'범주하섬강구', 여유당전서 권2>

섬강은 상업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영·정조 연간의 문인 정범조(丁範祖·1723-1801)는 <섬강곡 3수>(해좌집)라는 시에서 '밝은 등불 켜고 나무 끝 사이로 지나가니 / 아마도 한양에서 오는 배겠지. / 금년에는 소금이 풍년이니 / 소금 값은 돈을 따지지도 않는구나.'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이 시는 섬강 하류에 남한강을 따라 실어 온 서해의 소금을 정제하는 공장이 있어 지금의 충북 북부와 강원도 지역으로 소금을 판매하는 상업 행위가 성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흥~흥원 수계의 이 같은 분위기는 안석경의 산문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흥원은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했다. 조선시대에는 흥원창이 위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 과거, 3번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

생전의 안석경은 한미해진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3번 과거에 도전했다. 그는 28살 늦은 나이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이후 서른을 넘겨 다시 도전했으나 고배를 마셨고, 재도전을 위해 원주 치악산 대승암(大乘菴)을 찾았다.

'아아, 세상의 즐거움 중에 이와 바꿀 것이 있겠는가. 이 산이 이미 깊고 험한데 이 암자는 높고 또 고요하여 옛책 읽기에 적당하다. 나로 하여금 항상 이곳에 살게 한다면 10년이라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지만….'-<'치악산 대승암을 유람한 기문', 삽교집>

그는 과운(科運)이 없었는지 또 낙방했고, 더 이상 출세를 위한 과거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이 무렵 부친이 돌아가자 원주 손곡이라는 곳으로 옮겼고, 1765년에는 이보다 더 깊은 산골인 강원도 횡성의 '삽교'라는 곳으로 이주했다. 그의 호 '삽교'는 이 산골마을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과거의 좌절을 연속적으로 맛본 안석경은 날이 갈수록 세상을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산속의 봄술이 익었다기에(山中春酒熟) / 가랑비 맞고 이웃에 가서 취하였네(徵雨醉隣家). / 두건 젖혀 쓰고 느지막이 돌아오니(岸·歸來晩) / 개울에 비친 꽃들이 쓸쓸하네(蕭蕭映澗花).'-<'삽교만영', 삽교집>

◇『삽교만록』에 18편의 한문단편

조선 후기가 되면 '한문단편(漢文短篇)'으로 지칭되는, 전환기적 사회 상황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서사 양식이 등장한다. 한문단편은 시정의 이야기를 옮겨놓은 형식으로, △조선 후기 사회상의 변화 △양반계층의 몰락과 신분갈등 △남녀의 욕정 △사회 규범의 혼란과 모순 등을 주로 다뤘다.

실학자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한문단편을 개척한 인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양반전>, <호질>, <허생> 등의 작품을 통해 당시의 위정자·지식인 등 상류층을 통열히 비판하고 각성을 촉구했다. 그 바탕에는 이용후생(利用厚生) 사상이 깔려 있었다.

흥원창 표지석 옆의 정자에는 조선시대 문인화가 정수영(鄭遂榮·1743-1831)의 그림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이 걸려 있다. 흥원창 부분만을 확대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박지원과 동시대, 혹은 조금 앞서 한문 단편을 남긴 인물이 있다. 바로 안석경이다. 그의 문집 《삽교만록》에는 인간성 긍정, 치부, 신분갈등 등이 주제가 된 <대두>(大豆), <주판>(州販,) <강경>(江景), <영남한사>(嶺南寒士) 등 18편의 한문단편이 실려 있다.

이들 작품은 그가 산골 삽교에 은거하고 있으면서 과거 보고 들은, 가흥·흥원 등 남한강변의 도회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붓 가는 대로 창작한 것들 이다. 특히 그 공간적인 무대가 남한강이어서 지역적인 관심을 더욱 끌고 있다. 작품 '대두'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흥 땅의 황희숙이라는 사람이 젊어서 서울에서 내려온 어떤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은 콩을 사서 황희숙에 맡기며 자신이 올 때까지 절대 팔지 말라고 당부했다. 황희숙은 그 약속을 지키려 하나, 흉년이 들자 동네 사람들이 돈을 주고 콩을 사갔다. 황희숙은 그 돈으로 땅을 구입했다. 그러나 그 노인이 끝내 나타나지 않으면서 황희숙은 큰 부자가 되었다.'

◇ 상업윤리를 강조하다

원주 법천사지는 섬강 흥원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안석경이 자주 찾던 곳의 하나이다. 사역내에 있는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 59호)

'주판'이라는 작품 역시 남한강을 단편의 공간적인 무대로 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信'의 개념은 두 가지로 인식됐다. 선비들은 막연히 정신적인 가치로 평가한 반면, 장사치들은 현실적인 윤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믿음이 있어야 거래를 한다'는 상업윤리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원주 법천 땅의 한 장사꾼이 쌀을 싣고 서울의 한 객주집에 들렸다. 흉년으로 굶주리고 있던 서울 객주는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객주는 10년 동안 거래하던 객주였다. 그러나 법천 장사꾼은 쌀 몇 되의 도움 요청에 대해 들은 척도 않고 다른 객주집으로 갔다. 돈은 이제 무엇보다 중요시되는 절대가치로 변해 있었다. 그 뒤 다시 옛 객주에게 다시 가보니 죽은 줄로 알았던 그 객주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부가가 돼 있었다. 원주 장사꾼은 부끄러움에 남한강에 다시는 배를 띄우지 못했다.'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삽교리의 안석경 묘비. 가운데 줄에 '삽교 안선생'이라고 쓰여 있다.

이상에서 보듯 안석경의 한문단편은 18-19세기 유통경제를 배경으로 형성된 남한강변 신흥 상업 도회지를 공간적인 무대로 하고 있다. 17세기까지 조선사회는 물물을 교환하는 자연경제가 지배하였으나 18세기 금속화폐[상평통보]의 유통으로 부의 축적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은 도시 뿐만 아니라 농촌에서도 가능한 것이됐다.

◇ 전통의 윤리·도덕관 비판

안석경은 《삽교만록》에서 고향 충주 가흥촌을 "가흥은 6-7백호가 동남쪽에 하나의 도회를 이뤘다. 배가 모이고 창고가 있는 바, 놀고 먹으면서 사리를 추구하는 무리배들이 많다. 경박한 싸움이 너무 잦다(可興六七百戶爲東南一都會, 而舟車所聚, 倉庫所在, 故多游食射利之輩, ·薄爭鬪之甚)."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18편의 한문단편을 통해 부의 합리적인 축적은 양반·지주계급만의 특권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인간 보편적인 행위임을 주창했다. 따라서 그가 "양반은 손에 돈을 만지지 않고 쌀값을 묻지 않는다", 혹은 "배고픔은 참고 가난은 말하지 않는다"는 전통의 윤리·도덕관을 비판한 것은 당연했다.

이명학은 안석경의 한문단편에 대해 '전통적인 문체와 다른 소설적인 문체를 구사하고 있고, 생활적인 언어감각으로 문장을 처리하고 있다.'라고 평론했다.

만년에 다시 충주 남한강변 가흥촌으로 돌아온 안석경은 1774년 조용히 생을 마쳤고, 지금은 후손들에 의해 다시 횡성군 둔내면 삽교로 돌아가 영면하고 있다. 그러나 충주 지역의 큰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고향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 조혁연 대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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