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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박기성

진천 출신으로 일본 유학중 항일운동 투신
류자명 도움으로 중국 군관학교 11기 입교
해방귀국 후 육군준장으로 예편 '평생군인'
독립기념관, 이달 중순 시어록비 건립키로

  • 웹출고시간2015.10.04 17:29:59
  • 최종수정2015.10.04 17:29:59

박기성

[충북일보] 박기성(朴基成, 1905∼1991)은 충북 진천 출신으로 일본 유학중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한 독립투사이다. 그는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고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 육군 장교로 준장까지 복무한 평생군인이었다. 예편 후에는 정치 등 다른 활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독립운동사를 올바로 정립하는 활동에 매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전념하였다.

댕기머리 소년, 신학문에 눈뜨다

그는 1905년 6월 1일 문백면 봉죽리(鳳竹里-석복, 갈마지)에서 박문용(朴汶容)과 연철희(延哲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죽산(竹山), 아명은 순성(順成), 호는 의당(毅堂)이다. 독립운동 시기에는 이수현(李守玄)·오양준(歐陽軍)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박기성 생가 마을 전경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갈마지

진천에서 자라던 그는 어린시절 외가가 있는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 행화정(杏花亭-울어바위)으로 이사하였다. 어려서는 부친께 천자문을 배우고, 15세까지는 서당을 다니며 한문공부를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4월 10일 도안면 광덕리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그도 참여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언젠가 천안 고모님 댁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탄 그는, 양복을 입은 천안소학교 선생으로부터 학교구경을 제안 받았다. 댕기머리에 바지저고리를 입고 처음 학교에 가본 그는 신학문에 대한 열망을 느끼게 되었고, 귀가 후 부친에게 그 뜻을 밝혔다. 허락을 받은 그는 바로 머리를 깎고 도안면 강습소에 등록하였고, 2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바로 일본유학을 결심하고, 셋째 외삼촌인 연동희에게 여비 40원을 얻었다. 그는 집에 알리지도 않은 채, 유학길에 올랐으니 이때가 1924년경의 일이다.

재일 아나키스트,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히다

중국군관학교 졸업 당시의 박기성(1937년)

조치원에서 일본중학교 재학생을 만나 '동경 유학생들이 압박을 많이 받는다'라는 말을 들은 그는 '내 힘으로 내 나라를 구하겠다'고 결심하고,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거쳐 4일 만에 도쿄에 도착하였다. 먼저 중학교를 알아보던 그는 심상소학교를 졸업해야만 입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요쓰야소학교(四谷小學校) 야간부 5·6학년을 이수하는 속성과에 등록하였다. 이 학교에는 후일 독립운동을 함께 하는 나월환(羅月煥)이 동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년 만에 소학교를 마친 그는 가이세이중학교(開城中學校) 야간부에 입학하였다.

1926년 6·10만세 이후 그는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원심창(元心昌)·한하연(韓何然) 등과 자주 만났다. 1927년 도쿄의 요요기 광장에서 예정된 3·1절 기념행사에 참여하려다 체포당해 우시꼬미(牛·) 경찰서에 갇힌 이후, 그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혔다.

1928년에는 정찬진(丁贊鎭)·홍영유(洪泳裕) 등과 함께 도쿄에서 재일한인아나키스트단체인 '자유청년연맹(自由靑年聯盟)'을 조직하고, 친일단체인 '상애회(相愛會)'에 맞서 싸웠다. 그는 회원들과 상애회의 친일파 거두였던 박춘금(朴春琴)을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의열투쟁 참여 후 중국군 장교로 거듭나다

박기성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홍영유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줄곧 감시를 당하며 대전역에 도착한 그들은 형사를 따돌리고 연산·강경 등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형사가 따라붙어, 결국 두 사람은 귀향하였다. 귀가 후 그는 잠깐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갔다가 이유 없이 체포되어 2개월 동안 종로경찰서에 갇히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지속적으로 순사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에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한 그는 땅문서를 저당 잡히고, 인천에 거주하던 나월환 누나의 도움을 받으며 망명 준비를 하였다. 도선증명서를 발급받으면 중국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인천경찰서를 찾아가 어렵게 증명서를 발급받고, 배편을 이용하여 칭따오를 거쳐 상하이로 갔다. 그의 중국 망명은 1931년 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향 친척의 도움으로 1931년 6월 다시 난징으로 이동한 그는 원심창의 연락을 받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당시 원심창·백정기(白貞基)·정화암(鄭華岩)·류자명(柳子明) 등 10여 명은 비좁은 방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지내며 그는 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9월경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재정비하고,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3월 17일 폭탄투척 계획을 실행하려던 '육삼정 의거' 현장

ⓒ 독립기념관 제공
1933년 2월 5일 그는 10여 명의 회원들과 프랑스 조계의 정원방(亭元坊) 2층에서 이른바 '육삼정 의거'를 논의하였다. '육삼정 의거'는 중국국민당 내의 친일분자 및 패잔 군벌 등을 매수하기 위해 주중공사 아리요시(有吉明)가 1933년 3월 17일 연회를 베풀기로 한 장소에 폭탄을 투척하여 폭살시키려던 계획이다.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모두 거사를 자원하였다. 다음날 제비뽑기에서 백정기가 거사자, 이강훈(李康勳)이 협동자로 지명되었다. 두 사람은 약속된 날 육삼정 건너에 있는 음식점에서 폭탄투척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일본인 아나키스트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이들은 나가사키(長崎) 지방재판소로 압송되어, 무기징역과 15년형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상하이를 떠나 난징으로 가서 중국포병학교에 입대하였다. 그리고 류자명의 도움으로 천광궈(陳光國, 중국군관학교 정치부주임 비서)의 보증을 얻어, 1934년 3월 중국군관학교 11기로 입교하였다. 1937년 군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후난성 창더(常德)에 있는 제1통신병단의 보충대 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상위(대위)로 진급하고 충칭(重慶)에 있는 훈련총감부 통신감실 참모로 복무하였다. 이때 류자명과 자주 만났고, 나월환·이하유와도 다시 연락이 되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한국광복군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다

박기성은 나월환과 함께 군사조직을 결성하기로 하고, 김구의 승낙을 얻어 1939년 11월 11일 충칭에서 30여 명의 대원으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였다. 대장은 나월환, 대원들 대부분은 무정부주의 계열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시안(西安)으로 이동하여 1940년 5월경부터 중국 제34집단군 후종난(胡宗南) 부대와 연계를 맺고,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복무중인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활동(招募活動)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는 몇 명의 대원들과 함께 타이항산(太行山)으로 가서 20여명을 모집하고, 시안으로 인솔해 오기도 하였다.

김구 등과 함께 찍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환송식(1939월 11월 17일, 두번째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기성)

ⓒ 독립기념관 제공
모집된 청년들은 시안에 설치된 '한국청년훈련반(韓國靑年訓練班)'에서 일정 기간 군사훈련을 받은 후 대원으로 편입되어, 1940년 말 100여명에 이르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창설되자, 전지공작대는 1941년 1월 1일 시안의 본부에서 편입식을 거행하고,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제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부터 친구였던 대장 나월환이 대원들과 마찰을 빚자, 그는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었지만 거절당하였다. 결국 나월환은 1942년 3·1절 기념행사 후 대원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당시 제2구대장이었던 그는 사후 처리를 위해 중국과 협의에 나서는 등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이후 충칭으로 돌아온 그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보참모부장으로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복무하였다.

여생을 독립운동사 정립과 한국광복군을 위해 살다

해방을 맞이하고 한인 교포들의 이주 문제로 이강(李剛)과 함께 잠시 타이완에 다녀온 그는 상하이에서 1945년 12월 28일 환국하였다. 귀국 후 1946년 육군사관학교 제3기 특별반으로 입교한 그는 3월 20일 최덕신(崔德信)·박시창(朴始昌) 등과 함께 대위로 임관하여 총사령부에 배치되었다가, 부산 제5연대 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2사단 5연대장, 대구 제1훈련소 부소장 등에 임명되었다. 이후 고등군사반 7기로 교육을 받고, 군산 신병보충대장을 거쳐 1952년 101사단장으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1960년까지 대령으로 근무하다가, 준장 진급 이후 전역하였다.

예편 후 그는 1969년 최초로 독립운동사를 집대성하기 위해 구성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 참여하였다. 또한 1985년부터 2년여 동안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5대)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역사적 정립을 통한 민족정기의 회복에 노력하였다.

아들 박용수(연세대 명예교수)는 "어린 시절 10여년 정도 3~4명의 광복군 동지들이 함께 살았고, 손님들이 자주 오셨다"고 회억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중국 군관학교 출신으로 장쩨스의 초대를 받아 3번이나 타이완을 방문하셨다"'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였다.

박기성의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201번

박기성은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1991년 2월 1일 사거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오는 10월 17일, 독립기념관에 그의 항일정신을 담은 시어록비가 제막될 예정이다. 이 비에는 그가 중국군관학교 시절 태평양전쟁에서의 일제 패전과 우리나라의 독립을 확신하며 남긴 "우리가 일치단결하여 강건한 독립정신으로 무장한다면 일본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어록이 새겨진다.

/ 조성진(독립기념관 연구원, 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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