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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한국문화답사 - 오사카박물관과 나니와 궁적(2)

신라, 당과 왜를 연결하는 중계 무역으로 엄청난 富
5세기 열도에 고상창고 집중 등장… 신라교역 결과
'좌파리 가반'의 제2 신라 문서도 양국 교류의 증거
야마토 정권, 부여 백마강전투 패배이후 내륙 천도

  • 웹출고시간2015.09.23 18:51:05
  • 최종수정2015.09.30 14:09:03

에도시대를 재현한 근현대 전시실로 지붕에 테라스를 만들어 빨래를 널고 있다.

[충북일보]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중세와 근현대 전시실이 나타난다. 기획전시실을 지나 앞마당에 이르면 고상창고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건물 주변에는 원형표시가 일정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 원형표시가 이 일대에서 발굴한 고상창고건물을 표시한다. 이곳에서는 5세기 후반에 대형창고가 16채 이상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 시기에 서일본의 대부분 지역의 물산과 한반도로부터 수입한 교역품은 나니와즈(難波津)에 집중되고 있었고 이곳에는 많은 저장시설(창고)이 줄지어 건립되고 있었다. 고상창고에서 육교를 건너면 나니와궁 유적이 드러난다.

7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대동난을 거쳐 탄생한 일본 율령국가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초한 '천황중심'의 세계관과 함께 천황과 그 관(官)이 대외관계를 독점하는 체제를 확립하였다. 규슈 북부에는 대외관계를 담당하는 다자이후(大宰府)를 설치하고 이 곳에 왕래하는 외국인을 외교사절인 '번객(藩客)'과 스스로의 의지로 천황의 '백성'이 되고자하는 '귀화인(歸化人)'으로 분류하였다. '번객' 혹은 '귀화'는 '중화사상'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그러나 당의 율령과 일본의 율령에는 대외교역관리부분에 있어서 큰 차이가 보이는데, 그 차이는 스스로 가진 고도의 문명을 국제사회에 분배하는 것에서 권위를 얻는 '중심의 왕권(중국 당왕조)'과 외래문명을 우선적으로 몸에 익히고 도래인(渡來人)이 가져온 재화ㆍ문화를 국내 제 세력에게 분배하는 것에 의해서 권위를 얻는 '주변의 왕권(왜왕권)'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었다. 백제 멸망 후 탄생하는 일본 율령국가의 교류는 신라와 발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최근에 다자이후에서는 다량의 목간이 발굴되었고 그와 함께 신라에서 수입한 놋그릇과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규슈의 다자이후가 주로 신라로부터의 문물수입과 교역의 창구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본 율령국가가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초한 '천황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게 된 것은 지금의 아베정권처럼 국제정세에 대한 그들의 허세와 오판을 반영한 것이었다.

에도시대의 상가거리를 재현한 모습이다. 근현대 전시실

진궁황후의 삼한정벌론과 만세일계의 천황관이라는 황당한 세계관이 근대에 이르러 동아시아를 파탄으로 내몬 침략전쟁의 사상적 원형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실은 신라나 발해도 중국의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일본을 야만국으로 보는 자국중심의 세계관을 가졌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본 천황은 국내적으로 당을 '번국'으로 규정하였지만, 일본의 지배층은 당조의 우월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실제 7세기 후반 율령국가 성립기에 일본열도의 왕권에 직접 문화적인 영향을 준 것은 신라나 한반도로부터 이주한 도래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7세기 일본 율령국가는 신라나 발해보다도 문명의 중심에서 벗어난 변두리 국가이었다.

복원된 고상창고 건물(좌)과 고상창고의 내부 목조 골격의 모습

고상창고 건물을 본 다음 육교를 건너면 나니와궁 유적이 나타난다. 북쪽 중앙의 태극전 자리에 올라 주변을 보면 귀족ㆍ관인의 정무공간인 조당원(朝堂院) 구역 가장자리에는 전기 나니와궁의 회랑인 붉은 색 통로, 그 안쪽에는 후기 나니와궁의 통로인 파란색 통로가 지나간다. 태극전은 7세기말 천황권이 확립된 후기 나니와시대에 천황의 주관 아래 각종 국가의례를 거행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었다.

7ㆍ8세기 신라는 왜ㆍ일본에 대해 신라 특산물만이 아니라 불구(佛具)ㆍ금속기물ㆍ고급견직물 등을 당에서 수입해서 판매하는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다. 신라는 당ㆍ일본을 대상으로 광대한 교역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특히 왜ㆍ일본에 대해서는 자국의 선진성을 과시하고 있었다. 예컨대, 정창원에서 공개된 '좌파리 가반', 즉 청주에서 제작된 신라의 '4첩 청동사발'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니와와 도성. 붉은 선이 당시의 도로로 추청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는 이러한 신라에 대해 '부자나라', '금은의 나라'라고 표기하였다. 이는 신라가 당ㆍ일본과의 중계무역을 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니와궁은 신라의 물품이 들어오고 사신을 맞이할 수 있는 아스카의 관문으로 번영하였지만, 열린 공간인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생활하기 불편하고, 더욱 주작대로를 포함한 도성을 건설하기에도 바다를 면하고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여러 학설이 있긴 하지만, 천황권이 확립된 후기나니와 시대에는 대체로 주작대로를 포함한 직사각형의 거대한 도성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나니와는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던 7세기에 왜정권이 이에 적극 개입할 수 있는 위치에 세워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아시아국제정세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더욱 663년 백촌강(白村江)에서 당과 신라의 연합군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한 후 야마토정권은 당과 신라의 연합군의 보복을 우려하게 되면서 더 이상 바다를 면한 항시(港市)를 수도로 정하기는 어려워진다.

이후 야마토정권은 당과 신라의 군대의 공격을 대비, 쓰시마와 이키(壹岐), 북큐슈에 변경수비대, 봉화대와 평지성인 미즈키(水城)를 축조하고 쓰시마에서 기나이 왕도에 이르는 국방상의 요새에 조선식 산성을 쌓게 된다. 653년 나니와에서 다시 아스카로 천도를 하고, 667년에는 좁고 사방이 막힌 오우미(近江)의 오오쯔(大津)에 오오쯔궁을 건설한 것도 당시의 긴박한 국제정세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오쯔 역시 비와호(琵琶湖)에 막힌 공간으로 도성을 건설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결국 전통적인 권위가 강한 아스카로 다시 천도를 하게 된다. 8세기 후반 이후 항구로서의 기능이 요도가와 수계(水系)·야마토 수계의 토사의 퇴적으로 인한 지형변화와 함께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나니와궁 배치도. 붉은선과 파란선은 전기 나니와궁과 후기 나니와궁의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요도가와(淀川)와 간자키가와(神崎川)을 통하는 운하의 굴삭이 이뤄지면서 세토내해를 항해하는 배는 나니와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요도가와에서 수로를 통하여 헤이안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 결과 나니와즈(難波津)는 헤이안시대에 들어와 국제물류센터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지형적 변화로 인하여 오사카박물관의 나니와궁적에서 1,300년 전 이곳이 신라의 물품이 들어오고 사신을 맞이하는 번성한 국제무역항이었다는 생각을 떠올리기 어렵다. 다만 이곳에 전시된 신라토기가 말없이 화려했던 옛 시절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 임병덕(충북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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