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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그 물길 위의 인문학 - 안중관과 회와집

잔반이 돼 30대 가흥 낙향, '밀와'라는 집 짓고 정착
가끔 시간나면 배편으로 이동, 소태 청룡사 등 방문
회와집, 스쳐가는 것이 아닌 가흥이 배경이 된 詩文
이인좌난 때 제천 피신, 다시는 가흥으로 못돌아와

  • 웹출고시간2015.09.21 18:30:12
  • 최종수정2015.09.21 18:30:12
[충북일보] 육상 교통로가 발달하기 전의 남한강은 한반도 내륙의 주요 물길이었고, 그 주변에는 풍광이 수려한 곳이 많았다. 따라서 고려-조선시대 뭇 시인과 묵객들은 남한강을 노래했고, 또 그림을 적잖이 남겼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작품들은 남한강을 소강(遡江·거슬러 올라가기)과 하강(下江)을 하며 남긴 문화적 결과물이다. 따라서 일종의 '스쳐가면서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박중관의 가흥촌 집은 사각선 안 어디인가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조선 숙종-영조 연간을 산 안중관(安重觀·1683-1752)이라는 인물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한강가인 충주목 가흥촌(可興村)에서 정착 생활을 하며 다수의 문학작품을 남겼고, 후손들이 이를 '회와집'(悔窩集)으로 편찬했다. 책은 8권으로 구성돼 있고 1904년에 발간됐다.

특히 그의 작품 가운데는 △가흥촌에 손수 세운 집의 이름 △현지 농민들과 어울리며 농부로 살아가는 모습 △청룡사 등 충주지역 사찰 방문 등의 이야기가 등장, 지역 친밀도를 높이고 있다.

◇ 부친 때부터 가문 급격히 기울어

그는 본관이 순흥(順興). 자는 국빈(國賓)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안후(安土+后·1636-1710)는 노론계 인물로, 숙종의 신임을 받아 당상관인 우승지(정3품)까지 올랐으나 모함하는 사람이 많아 관료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승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 쫓겨나다시피 여주·삼척·양양·곡산부사를 역임하는 등 외직(지방직)을 떠돌다가 일생을 마쳤다. 이때부터 안중관의 가문은 한미(寒微)한 길을 걷게 됐다.

안중관이 노론계임에도 불구하고 충주목 가흥촌으로 낙향, 몰락한 양반인 잔반(殘班)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의 나이 35살 때인 숙종 44년(1718) 다음편에 소개할 아들 석경(錫儆)이 충주 가흥에서 출생하였다.

조선시대 고지도인 '동여도' 이다. 가흥촌이 물길 교통이 좋은 남한강변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가흥에 완전 정착한 것은 3년 후인 1721년(경종 1) 쯤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는 가흥으로 떠나기전인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이렇게 읊었다.

'근래 기이한 기운 다 빠져나간 것 알기에 / 동전 수백 개 들여 작은 언덕 하나 샀노라. / 천지는 이 늙은이를 곤궁하게 하지 않으리니 / 산림은 아름다운 유람을 할 수 있게 해주네. /…/ 10년 세월 어린 눈으로 오늘밤 작별하니 / 마음껏 술에 취해 지은 시를 읊어대노라.'-<회와집, '봄밤에 회포를 적다'(春夜書懷)>

인용문의 '동전 수백개를 들였다'는 표현은 재산의 상당 부분을 투자했다는 것을, '작은 언덕'은 바로 남한강가 가흥촌을 의미하고 있다.

◇ 절친 우세준 때문에 가흥으로 낙향

안중관이 왜 충주 가흥촌을 새로운 정착지로 택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다른 문집을 보면 절친한 벗 우세준(禹世準)이라는 인물이 가흥에 살고 있었고, 이주 후의 두 사람은 개울 하나를 마주하고 살면서 매일 왕래했다. 잔반이자 향반(鄕班)이 된 안중관은 농군과 어울리며 농부로 살아갔다.

그는 '벼 베는 것을 보면서'(看刈稻)라는 시에서 '서산 언덕에 벼를 베려고 / 농부가 새벽에 창을 두르리네. / 소 타고 오래 된 둑을 따라 가니 / 지는 달빛에 가을 강이 보이네. / 밥은 바가지에 담아 내어가고 / 막걸리는 풀로 옹기를 덮었네. / 농가는 한 해 내내 괴로운 법 / 닭과 개도 한 번 배불리 먹였으면.'라고 읊었다.

그는 벼 베러 가는 이웃을 따라 소를 타고 강둑으로 갔다. 이때 지는 달빛이 남한강 수면에 비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닭과 개도 한 번 배불리 먹였으면'이라는 표현에서는 그의 다감다정한 성격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잔반이 되었지만 젊었을 때의 포부와 기개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自述'(스스로 술회하다)이라는 시에서 '천고의 정신 담긴 문집과 역사 섭렵하고 / 평소 대장부로 뛰어나다고 자부했네. / 천자가 다스리는 때를 꼭 만나지는 않는 법이니 / 땅에 떨어져 산수 가운데 편안히 거하네.'라고 낙향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의 나이 39세에 지은 시로, 자신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먼저 대장부로 뛰어났음을 자부하고 있고. 다음은 비록 낙향했지만 생활은 편안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 가흥 집단장을 한 후 가장 빼어난 시

그는 남한강가 가흥에 살고 있지만 국가의 부름이 있으면 벼슬길에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으나, 《승정원일기》에는 그가 1721년 세마(洗馬)를 시작으로, 영조대에 부솔(副率), 주부(主簿) 등 이런저런 벼슬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부 이후에는 벼슬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어 영조집권 초기에 다시 가흥으로 낙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초가를 사서 새로 단장을 했다. 이때 가흥의 풍광을 노래한 작품 가운데 가장 빼어난 시가 지어진다.

'계란만한 조그만 집 푸른 짚을 이고 나니 / 멀고 가까운 들판에는 눈길 가득한 봄풀들. / 맑은 강 끌어들이려 달빛 비치는 문을 열고 / 늘어선 산을 부르려 안개 속 나뭇가지 잘랐네. / 채소밭에 물 주려 뱀꽈리 큰 정원 소제하고 / 과실을 기르는데 새도 함께 둥지 짓게 하노라 / 처음에 큰 집 짓고자 한 일 어그러져 애석하니 / 한 뙤기 밭 경영하는 일이 되다 우습기만 하네.'-<회와집, '작은 집을 새로 사서 꾸미고 두보가 집을 짓고 나서 지은 시에 차운하다'>

청룡사, 월악산 등 충주 인근의 지명들이 '회화집' 안에 보인다. 안중관은 틈이 나면 이들 사찰을 자주 찾았다.

새로 지은 집은 문을 열면 남한강이 시야에 바로 들어왔고, 나뭇가지를 자른 결과 강 건너편 산(소태면 방향)이 열병식을 하듯 늘어서 있었다. 3연의 과일나무를 가꾸면서 새 둥지를 함께 마련한다고 한 데서 역시 그의 따스한 성격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4연의 큰 집을 짓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과 한 뙤기 정도의 밭경영은 그의 경제력이 넉넉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해 가을에 집이름을 '密窩'(밀와)라고 짓고 집단장을 마무리 했다. 밀와는 '숨어 있는 듯한 움집'이라는 뜻이다.

'몇 평 땅을 사서 가흥강 서남쪽에 살았다. 그 땅은 불룩 솟아 둥근 언덕이 되어 있고 그 안에 깊숙하고 가운데가 오목하였다. (…) 나는 늙고 병이 많아지자 세상에 대한 뜻이 사라져 이곳에 자취를 묻고 여생을 보내려 하였다. 이에 새로 집을 짓고 소나무와 사철나무를 두루 심어 울타리로 삼았다.'-<회와집, '새집과 마루와 정자에 이름을 붙인 기문'>

◇ 충주 가흥촌은 끝까지 잊지 못한 듯

그는 비록 작은 집이지만 남한강 풍광과 잘 어울리고 시야가 확보되도록 방과 정자 등을 세심하게 배치했다.

'햇빛이 잘 드는 동남쪽의 꽃나무 좌우에 방과 마루 한 칸씩을 만들었다. 또 마루 앞쪽을 가로지른 언덕이 동쪽으로 나와 강물을 마주하는 곳에 작은 정자를 놓아 시렁을 얹고 흰 풀을 덮어 서쪽으로 꺾여 흐르는 큰 강물과 강 오른편의 여러 산이 바라보이게 하였다. 그러자 산과 강이 가장 잘 보이게 되었다.'-<〃>

박중관은 남한강가 가흥촌에 '적연정'이라는 정자도 세웠으나 지금의 '가흥정'처럼 높고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글 후미에 그렇게 지은 집을 '밀와', 마루는 한겨울에도 내리쬐는 햇빛이 좋다는 뜻에서 '존양헌'(存陽軒), 정자는 세상을 등지고 있지만 산수와 더불어 홀로 앉아 종일 조용하다는 뜻에서 '적연정'(寂然亭)이라고 이름지었다고 서술했다.

그는 가끔 시간이 나면 남한강 배편으로 가흥촌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소태면 청룡사(靑龍寺)와 좀 더 깊은 산속의 응진암(應眞庵)을 찾았다. 그는 응진암을 찾아가는 모습을 '이곳은 무더위가 찾아오지 못한다. 시원한 밤람이 천천히 불어와 문득 번다한 흉금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강 너머에 여러 봉우리들이 멀고 가까운 곳에 숨었다 드러났다.'라고 적었다.

안중관이 45살 되는 해에 청주목 송면의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고, 그는 이를 피해 제천 '陶村'(도촌)이라는 곳으로 이주했다. 그가 한미한 잔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데리고 제천으로 피신한 것은 가문의 당색(黨色)이 노론인 반면 이인좌는 남인계열이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후 안중관은 다시는 충주 가흥촌을 찾아오지 못하고 홍천, 원주 섬강가, 제천 등을 전전한 끝에 영조 28년(1752) 69세로 서거했다. 그러나 '밀와에서 스스로 찬양하다'(密窩自讚)라는 시를 보면 그는 노년까지 충주 가흥을 잊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미련했도다! 수중에는 《춘추》의 큰 의리가 담긴 서적이 있었건만, 노둔하였도다! 부엌에는 주자의 《자치강목》이 가득 찼었건만, 개·돼지와 더불어 아첨꾼 노릇하기를 부끄러워하느니, 차라리 산과 못가에 처하면서 여위어 가리라.'-<회오집 권8>

이상에서 보듯 안중관은 지금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충주시의 충분한 인문지리적인 자산이 될 수 있다. 따라서 3백여년전 가흥촌 거주지 확인을 거쳐 표지석·시비가 포함된 문학소공원 건립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조혁연 대기자

안중관 연표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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