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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황학수

서울서 낳지만 유년시절 제천을 고향으로 생각
상경해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합격 '1기 졸업'
만주 망명후 김좌진과 같은 무장투쟁노선 견지
26년만에 귀국… 정치뜻없고 제천 돌아와 영면

  • 웹출고시간2015.09.13 17:56:04
  • 최종수정2015.09.13 17:56:04
[충북일보] 황학수(黃學秀, 1879~1953)는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만주의 독립군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한평생을 무장투쟁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해산 될 때까지 대한제국 군인으로 복무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로군정서, 신민부, 한국독립군 등 여러 단체에서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 군인의 길로 들어서다

황학수는 1879년 서울 화동에서 부친 황두연(黃斗淵)과 모친 홍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이고, 자는 필옥(弼玉), 호는 몽호(夢乎), 이명으로는 이국현(李國賢)을 사용하였다. 그는 서울 출신이었지만 자신이 어려서 성장한 제천을 고향으로 여겼다. 제천과의 연고로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광복 후에도 여생을 제천에서 보냈다.

그는 갑신정변 직후 모친 홍씨와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 삼화동으로 내려와 다 시 상경할 때까지 10여 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1895년 부모를 여읜 황학수는 서울로 올라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합격하여 1900년 1월 제1기로 졸업하였다. 군인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황학수가 어린시절 기거한 어상천면 삼화동 집터

황학수는 대한제국 육군참위로 임명되었고, 친위대와 시위대를 오가며 복무하였다. 1905년 육군연성학교 교관으로 발령났고, 곧이어 안동진위대 대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안동진위대에서 복무하면서 두 가지 방침을 세웠다고 한다. 하나는 자신의 관할지역 내의 의병을 자진해산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의병들을 사살하기보다는 생포하여 석방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후일 독립운동의 길로 나서는 그의 사상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러나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그는 유년을 보냈던 제천으로 내려왔다. 그는 1908년 11월 20일 지방 유지들과 함께 부명학교(溥明學校)를 설립하였고,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제천에서 생활하였다.

◇ 독립운동의 길로 나서다

그의 삶에서 육군무관학교 동기생이었던 김학소(金學韶)와의 인연은 인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김학소로부터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 소식을 접하고,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의주를 거쳐 만주로 망명하였고, 이미 만주로 건너간 김학소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던 황학수는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향했다. 그가 상하이에 도착한 일자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19년 11월 3일 국무총리 및 총장들의 취임식이 있던 자리였다. 내빈으로 참석한 그는 그해 11월 17일 군무부 참사에 임명되었다. 황학수는 군무부 직속으로 설립된 육군무관학교에서 교관을 맡아 군사간부를 양성하였고, 무관학교가 운영난으로 중도에 폐교되자 다시 만주로 향하였다.

1940년 시안한국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사진 맨 앞열 왼쪽에서 네번째가 총사령 대리 황학수)

그는 만주로 향하던 중, 지린성 화전현에 거주하고 있던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을 만났다. 서간도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이상룡은 황학수에게 서로군정서의 재건을 함께 하자고 하며, 군사조직의 총책임자인 참모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를 받아들인 황학수는 관할지역의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군사로 편입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그는 약 3년여 간 서로군정서의 군사조직을 재건하는 일에 힘썼다.

◇ 만주의 항일운동을 이끌다

1924년 서로군정서를 떠난 황학수는 다시 김학소를 찾아 나섰고, 1926년 본부를 이도하자에 둔 신민부에서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학소를 만나게 된다. 황학수는 신민부의 참모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군구를 확대해 나갔다. 특히 그는 1927년 중국 측과의 교섭을 통해 돈화지역을 개척하였는데, 이는 신민부의 세력 범위가 동만지역까지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신민부는 1927년 2월 김학소를 비롯한 간부 12명이 일제에게 붙잡히면서 타격을 받게 되고,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한 지도부의 의견이 '민정파'와 '군정파'로 나뉘게 되었다. 황학수는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주장했던 김좌진과 함께 군정파에 속하여 활동했고, 이 해 7월의 임시총회에서 군정파를 중심으로 신민부가 재정비되었다.

한편, 1927년 초부터 만주지역은 유일당운동의 기운이 나타났고, 1928년에 들어서 본격화되었다. 3부 통합회의를 통해 통합을 모색하던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의 단체들은 결국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두 세력으로 분리되었다. 황학수는 1928년 12월 참의부와 정의부의 여러 인사들과 함께 군정부의 과도적 임시기관인 혁신의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혁신의회에서도 군사위원장을 맡아 신민부가 관할하던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듬해 5월 혁신의회가 해체되자 황학수는 서란현 노흑정자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그는 북만주 일대의 독립운동을 위해 생육사(生育社)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생육사는 황학수를 비롯하여 홍진, 지청천, 김좌진 등이 조직하여 한인들의 토지소유를 위한 활동을 전개한 단체였다. 이로써 북만주의 독립운동이 활기를 띄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1930년 한국독립당이 창당되기에 이르렀다.

◇ 한국독립군의 부사령관이 되다

1940년 시안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맨 앞열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황학수)

황학수는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세력들을 결집한 한국독립당의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남만주의 조선혁명당과 함께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한국독립당 창당 직후, 황학수는 당군으로 편성된 한국독립군에서 활동하며 주로 군구를 설치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일을 맡았다.

한국독립군은 일본군과 만주국 군대를 대상으로 중국군과 연합하여 전투를 펼쳤고, 1932년 쌍성보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제2차 쌍성보전투에서 타격을 입고 당과 군을 동만지역으로 옮길 것을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크게 주목된 인물이 황학수였다. 그가 신민부에서 활동하며 개척한 곳이 동만지역이었고, 이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기에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으로 선출된 황학수는 계속해서 중국군과의 연합을 시도하였고, 마침내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과의 연합이 실현되었다. 이후, 한국독립군은 경박호전투, 사도하자전투, 동경성전투에서 잇단 승전을 거두었다. 황학수는 한국독립군의 각 군구로 이동하여 병력을 모집해 나갔다.

그가 이러한 활동을 해나가고 있을 때 한국독립군이 중국군에게 무장해제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총사령관 지청천마저 체포된 이 사건은 후에 오해가 풀리면서 독립군이 모두 석방되었지만 한국독립군과 한국독립당이 해체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한국독립당의 당군으로 편성되어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군이 2년여 만에 사실상 해체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 한국광복군 총사령 대리가 되다

'광복'에 발표한 황학수의 글(한국광복군의 성립과 중국항전)

한국독립군의 주력이 중국 관내로 이동했지만, 초모활동을 하고 있던 황학수는 군구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함께 이동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만주에서의 활동을 정리한 후에 홀로 임시정부를 찾아 나섰고, 1938년 일시 후난성 창사로 이동해 있던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중일전쟁의 상황 속에서 군무부 내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전시체제를 갖추고자 하였다.

황학수는 1938년 7월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군사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업무를 전담하였다. 1939년 5월 임시정부는 일본군을 피해 쓰촨성 치장에 도착하였고,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추진하기 위해 중국과 협상에 나섰다. 이때 중요한 것이 병력의 확보였다. 황학수는 군사특파단의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산시성 시안으로 가서 초모활동에 나섰다. 그 노력으로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한국광복군은 총사령부를 시안에 두기로 결정하였고, 황학수가 총사령 대리를 맡아 시안총사령부를 통솔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처음 3개 지대로 편성되었으나 김원봉계열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에 편입하며 확대 편성하였다. 전지공작대의 편입은 광복군의 병력을 크게 증강시켰고 이는 황학수의 영향이 컸다. 그는 당시 전지공작대가 운영하고 있던 한국청년훈련반의 교관으로 있었고, 이러한 인연으로 전지공작대의 편입에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황학수는 지대 편성 이후 초모활동과 함께 광복군의 기관지 《광복》에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지속적인 대일항전을 위하여 초모활동을 계속해 나가던 시안총사령부는 중국군사위원회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아 총사령부를 충칭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해체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충칭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건물

2015년 8월 15일 현재

황학수도 1942년 10월 충칭으로 이동하였고, 시안에는 제2지대만을 남겨 두었다. 충칭으로 돌아온 그는 임시정부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여 국무위원과 생계부장으로 선임되었고,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동하였다. 광복을 맞이하자 국무위원이던 그는 임시정부 인사들과 제2진으로 환국하였다. 이때가 1945년 12월 1일이었으니 그가 1919년 망명한 이래 26년만의 일이었다. 귀국 후 황학수는 임시정부와 함께 활동하였지만 별로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기에 자신이 성장하였던 제천으로 내려와 살았다.

한평생을 군인으로 살았던 그는 1953년 3월 12일 제천시 금성면 중전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오는 9월 17일이면 황학수가 주도했던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지 75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현재 중국 충칭시 정부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을 해체하고 복원을 진행 중에 있다.

/ 윤장수(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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