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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제천 청풍초등학교

1909년 8월 사립 영명학교로 개교… 류영기씨 예산 64만5천원으로 설립
1970년 청풍면 읍리 202에 신축했으나 충주댐 수몰로 1984년 자리 이전
마을 축제 같은 '운동회'… "민족 역사 많이 기억해 주길"

  • 웹출고시간2015.09.10 20:10:55
  • 최종수정2015.09.14 17:39:35
[충북일보] "꽃보다 아름다운 단풍이 수채화를 그리고 물안개 피어오르는 청풍호가 내려다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둥지를 튼 청풍초등학교.

청풍초등학교 전경

현재의 청풍초등학교(교장 윤영희)를 가장 잘 설명하는 수식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청풍군은 본래 고구려의 사열이현인데 신라가 청풍으로 고쳐서 내제군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그대로 따라 현종 9년에 충주 내에 붙이었다가 감무를 두었는데 충숙왕에 고을 사람중 청공이 왕사가 되었으므로 지군사로 승격시켰다고 돼 있다.

청풍은 예로부터 유황과 효행, 양잠업이 발달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청풍과 명성왕후

한때 조선조 17대 임금인 현종의 비였던 명성왕후 김씨가 청풍출신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청풍면 도화리 마을자랑비에는 명성왕후가 어렸을 때 어사 박문수를 만났는데 신분을 묻기 위해 밥그릇 중앙에 세 개를 놓자 박문수가 생선을 네토막 내어 답을 하면서 어사라는 신분을 밝혔다는 설화가 알려져 있다.

# 청풍의 근대학교

1909년 8월 사립 영명학교로 개교한 청풍초는 류영기씨가 경비예산 64만5천원으로 설립했다. 교장에는 정건, 교사 2명이 36명의 학생에게 보통과와 일어, 실업과가 설치돼 운영됐다. 개교는 이듬해 10월 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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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무도대회 우승사진

영명학교는 청풍관아의 향장청 10칸과 곽사 4칸을 교실로 사용, 금남루를 교문으로 사용했다.

1912년 5월 청풍공립보통학교 인사, 1941년 청풍초등학교로 변경했다.

한벽루 앞에 양철지붕 일자집에 전체 8칸으로 1,2,3학년 교실은 좌측에 가운데는 교장실과 교무실, 우측에는 4,5,6학년 교실이 있었다.

교실앞의 청풍부 관청터는 한벽루 앞까지 운동장을 만들고 일제가 심은 벚나무가 꽉차게 한벽루 뒤로 강안까지 둘러있었다. 1970년 12월24일 청풍면 읍리 202번지에 신축했으나 충주댐 수몰로 1984년 8월16일 현재의 자리인 청풍면 물태리 144-3으로 이전했다.

# 청풍의 대홍수

1972년 8월19일 청풍을 비롯한 남한강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려 큰 홍수가 발생했다. 17일 태풍 배티의 영향으로 청풍의 상류지역인 단양에 217㎜, 18일 98㎜, 19일 32㎜, 20일 87㎜ 등 4일간 434㎜의 폭우가 쏟아졌다. 더욱이 더 상류인 영월지방에 내린 폭우까지 합쳐 단양과 제천지역은 남한강 상류의 범람으로 10개 마을이 침수돼 3천여명의 이재민이 9일간 고립된채 수마와 싸워 정부에서는 당시 15일분의 식량을 공수하기도 했다.

# 청풍초의 졸업생

1946학년도 통신표

청풍초의 역사는 100년이 넘지만 졸업생 명단은 1941년 3월 28회부터 있다. 당시 졸업생은 63명이었고 31회는 70명, 8.15 해방이듬해인 1946년 3월의 졸업생인 33회는 69명의 명단만이 남아있다.

청풍초는 금산분교와 안암분교, 양평분교 등 3개의 분교가 있었다. 지금은 청풍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통합운영되고 있다.

# 일제의 만행

전국의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일제들은 1940년대부터 학생들에게 각 가정에 있는 놋그릇 등 심지어는 농기구까지 학교로 가져오게하고 일본인을 욕하는 학생이나 부모가 있으면 학교에 와서 선생들에게 일러바치도록 교육을 하기도 했다.

일제의 만행은 다른 학교에서 자행된 것과 마찬가지로 악질 일본인 교사가 있었는가 하면 한국인에게 관대한 교사도 있었다.

청풍초 운동장에 세워진 천년동안 영원하라는 비문

청풍초는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격사의 혼과 정신이다.

학교 입구에 서 있는 '개교 100년을 딛고 천년을 여는 청풍초'라는 비문이 청풍초의 역사를 입증해주고 있다.

# 청풍초의 운동회

1940년대 운동회

청풍초는 개교 100년이 넘었지만 운동회는 마을축제였다.

운동회는 대나무나 싸리까치로 1학년 생의 키를 넘게 공처럼 둥글게 만든후 종이를 발라 청.홍색을 칠해 백.적국으로 편을 갈라 2명이 하나씩 가지고 기점을 돌아오는 놀이인 주구주전 놀이를 즐겼다.

또 칠석날을 즐기는 칠석놀이는 50여명의 여자가 편을 갈라 원을 그려놓고 그 안에서 하는 놀이로 25명씩 나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앞사람의 어깨에 두손을 얹고 고개를 숙여 오작교를 만들었다. 견우와 직녀는 체격이 작은 학생을 선정해 학생들의 어깨위(오작교)를 걸어서 만나는 경기로 여자는 남복을 하고 경기에 임했다.

이외에도 도보라는 놀이와 북경쟁, 럭비, 걸교, 체조 등 다양한 경기를 치렀다.

윤영희 청풍초중학교 교장은 "청풍초가 현재 11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며 "청풍초는 조선시대까지 제천과 충주를 아우르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민족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청풍초를 도민들이 기억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병학.이형수기자

<인터뷰>청풍초 졸업생 이기환·노원필씨

인터뷰 하고 있는 노원필(좌)·이기환씨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너무 많이 괴롭히고 학대했습니다"

청풍초 졸업생인 이기환(86)씨는 일제에서 광복을 찾은 8월15일 초등학생이었다. 그러나 이 옹이 지켜본 일제의 만행은 지금도 잊지를 못한다.

이씨는 "일본인 교사들과 순경들이 한국인을 너무도 괴롭히는 모습을 봐왔습니다. 나보다 선배들은 매일 일본쪽을 바라보며 묵념을 올리기도 하고 천황 만세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옹은 "학교에서도 그랬지만 사회에서 공출을 할 때 쇠꼬챙이로 무른 땅을 쑤시며 곡식을 숨겨놓은 것을 찾아내 가져가지고 했고 우리 사람들을 폭행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교장과 교사중 일부는 일본인 이었다.

그는 "내가 학교 다닐때는 학생이 900~1천명 정도 있었다"라며 "금성면과 수산면 등지에서 학생들이 다니기도 했다"며 "간이 학교가 있었다. 간이학교에 다니던 2학년 학생들이 청풍초로 전학을 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초등학교때 군사훈련을 시켰다. 제식훈련도 하고 목총으로 훈련을 시켰다"며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하인보다 더 못하게 생각하고 부려먹었다"고 말했다.

"72년 대홍수가 아직도 머리에 남는다"

노원필(73) 옹은 1972년 여름 대홍수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노 옹은 "중학교 1학년때 6.25가 발발해 겨울 방학책을 타서 피난을 간 기억이 있다"라며 "부모님들과 함께 온 가족이 보은으로 피난을 갔다가 전쟁이 끝난후 돌아왔다"고 말했다.

1972년 대홍수때 많은 수재민이 발생해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이 아직도 머리에 남는다고 하는 노 옹의 회상은 당시의 상황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노씨가 말하는 청풍면의 전설에 대해 들어본다.

"수몰전에 청풍초 북서쪽으로 200m 지점의 강안에 신담마을이 있는데 신담은 새로운 담의 의미로 강둑처럼 담이 높이 쌓여있었다. 어느 날 도승 한분이 이 소문을 듣고 시주승으로 변복하고 연곡에 나타나 집 앞쪽으로 보이는 큰 개울을 막으면 더 큰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거짓 풍수를 알려주었다고 전한다. 큰 개울이란 현재의 금성면 상류쪽에서 흘러오는 속계라는 냇물로 당시 명성왕후의 친가가 번창 할 수 있었던 것은 집과 개울사이에 일사천리로 탁 트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믿고 친가에서는 강가에 높은 담을 쌓았고 이로 인해 가세가 기울었다고 전해진다"는 전설을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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