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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홍진

서울에서 태어나 충주에서 첫 법조인 생활 시작
상해 임시정부 수립 사실 모르고 한성정부 수립
망명후 농장 직접 경영하며서 독립군 양성 도모
전선통일운동 담당 등 민족역량 결집에 큰 공헌

  • 웹출고시간2015.08.30 15:18:29
  • 최종수정2015.08.31 14:46:49

홍진

[충북일보] 홍진(洪震, 1877~1946)은 대한제국의 검사와 변호사를 지낸 법조인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3.1운동 시기 한성정부의 수립을 주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기여했으며, 상하이로 망명한 후에는 임시정부의 국무령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또 민족유일당운동과 전선통일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여 대일투쟁을 위한 민족역량의 결집에 공헌했다.

◇ 대한제국의 검사, 한성정부 수립을 주도하다

홍진의 본명은 홍면희(洪冕憙), 호는 만오(晩悟), 본관은 홍산으로 1877년 8월 27일(음력) 아버지 홍재식(洪在植)과 어머니 청주 한씨의 삼형제 중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진의 출생지를 놓고는 충북 충주나 영동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이는 홍진이 검사로서 최초 부임한 곳이 충주였다는 것, 또 그의 본적이 충북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로서 홍진의 부모와 형제들이 그곳에 살았던 것과 관련이 있다.

홍진은 27세 되던 1903년부터 법관양성소에서 약 1년 6개월간 수학한 뒤 법관양성소 박사와 한성재판소 및 평리원의 주사를 지냈다. 1906년 시험을 통해 검사가 된 그는 그해 12월 충북 충주에 소재한 충청북도재판소에 부임했지만, 1년 6개월 만인 1908년 5월 사직했다. 그의 사직은 법부로부터 받은 견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견책 사유는 죄수 석방에 착오가 많다는 것이었는데, 이를 두고 그가 의병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직 후 그는 1909년 7월부터 평양에서 형사소송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국회도서관 1층에 조성된 홍진 임시의정원 의장 기념 전시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홍진은 운동을 좀 더 조직적으로 이끌고자 이규갑 등과 정부 수립에 착수했다. 3월 17일, 검사 한성오(韓聖五)의 집에서 기독교와 유교계 인물들과 만나 정부 이름을 한성정부로 확정했고, 4월 2일에는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한성정부의 수립을 결정했다. 이때 한남수(韓南洙)로부터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이미 수립되었을지도 모르니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에 홍진은 한성정부 수립을 정식으로 공포하기에 앞서 한남수를 상하이에 보내 알아보게 하는 한편, 자신도 4월 15일 이규갑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후 국내에서는 4월 23일 한성정부의 수립이 공포되었다.

◇ 통합 임시정부 수립에 일조하고 국무령이 되다

상하이에 도착한 홍진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상하이에 이미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고, 4월 22일에 개최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논의가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밀정 누명을 뒤집어쓰고, 5월 6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조사까지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홍진이 자신의 망명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일제 경찰로 있던 황옥(黃鈺)을 미리 상하이에 파견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주도했던 한성정부 덕분에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4월 15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측의 요청으로 임시정부가 통합되었는데, 이때 한성정부의 법통성을 중심으로 통합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의 위상도 회복될 수 있었다.

홍진은 1921년 5월 6일에 의정원 제3대 의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의정원 정비와 11월에 예정된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활동 지원에 몰두했다. 특히 태평양회의에서는 한국의 독립문제가 다뤄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그는 한국 측 대표를 회의에 참석시키기 위해 자금을 모집하고 미주 동포들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43년 3월 11일, 김구주석이 홍진의장에게 보낸 공문

이는 임시정부의 활동방향을 놓고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 임시정부 폐지론까지 등장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 그는 1922년 7월 안창호·김구·조소앙 등 11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1923년 4월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까지 등장하자 임시정부의 혼란상에 극도의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그는 1924년 4월 법무총장직을 사임하고 난징 근처 전장(鎭江)에서 약 2년간 은둔에 들어갔다.

홍진이 다시 임시정부로 돌아온 것은 1926년이었다. 그 사이 임시정부에서는 대통령제의 폐해를 보완하고자 국무령과 국무원으로 조직된 국무회의를 통해 정부를 운영하는 국무령제를 도입했는데, 이상룡에 이어 그가 국무령 후보로 지목되었다. 그해 7월 7일, 그는 임시의정원에서 국무령에 선출되었다.

◇ 민족유일당운동을 선포하다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은 비타협적 자주독립의 新運動 촉진, 모든 민족을 망라한 정당의 조직, 전세계 피압박민족과의 협동전선 조직 및 우방과의 제휴 등 삼대 정강을 발표하고 민족유일당운동을 선포했다. 1926년 12월 9일, 그는 국무령을 사임하고 민족유일당운동에 뛰어들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이후 그는 1927년 4월 11일 좌우익 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에 24인의 집행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고, 11월 9일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가 결성되자 5인의 상무집행위원 중 1인이 되어 활동을 개시했다.

관내촉성회연합회는 국내의 신간회를 주축으로 만주·노령·미주 등지에 촉성회를 설립하여 민족유일당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사전작업으로 12월에 홍진 등을 만주로 파견했고, 그 결과 1928년 5월 12일 화전현(樺甸縣)에서 18개 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의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이 회의는 민족유일당운동의 향배를 결정할 중요한 회합이었으나 참가단체 간 주도권과 향후 만들어질 유일당의 성격, 통합방식 등을 놓고 이견이 발생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참가단체는 정의부 중심의 '전민족유일당협의회'와 7개 좌익단체가 주축이 된 '전민족유일당촉성회'로 분열되었다. 홍진은 1928년 12월에 '촉성회파' 인사들과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부의장에 선출되었지만, 이듬해인 1929년 4월 1일 '협의회파'가 국민부를 결성하면서 유일당 운동은 일단락되었다.

◇ 전선통일운동으로 옮겨진 발걸음

1943년 3월, 중국 충칭에서 열린 자유한인대회에서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의 모습

유일당운동 실패 후, 만주에 남아 있던 그는 1929년 봄 이청천·황학수·김좌진 등과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했다. 농장을 경영하면서 한인들의 기반을 닦아 독립군을 양성코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1930년 1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되면서 민족주의세력이 결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결과 7월에 지린(吉林)에서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고, 그는 한국독립당 위원장직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독립운동가들은 만주를 떠나야만 했다. 홍진을 포함한 한국독립당 인사들은 1933년 11월 난징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그는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코자 한국혁명당과 합당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결성하였다.

이 무렵 중국 관내에서는 전선통일운동이 한창이었다.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이 주도한 제2차 대표대회가 있었고, 그는 신한독립당 대표로 참석하여 1935년 7월 5일 민족혁명당 창당을 이끌어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정당 통합으로서, 후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통해 항일투쟁에 기여하고자 했던 홍진의 집념은 전쟁 속에서도 굳건했다. 그는 1939년 5월에 쓰촨성 치장(·江)에 당도했는데, 이 무렵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사이에서 나온 통합 논의는 1940년 3월 24일 한국독립당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그는 이때도 중앙집행위원으로서 힘을 보탰다.

◇ 전무후무, 세 번째 의정원 의장에 취임하다

1942년 10월 25일, 임시의정원 제34회 의원 일동(앞줄 중앙의 김구 좌측이 홍진)

치장에 당도한 임시정부는 조직 정비에 착수했다. 홍진은 1939년 10월에 의정원 충청도 의원과 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고, 국무위원 겸 내무장에 선임되었다. 그의 의정원 활동은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1942년 10월, 제34차 임시의정원이 개최되면서 전과는 달리 좌익진영까지 참여하여 통일의회가 구성되었는데, 그는 여기에서도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세 번째 맞는 의장으로서의 직무 수행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다. 홍진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귀국했지만, 그들이 활동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1946년 1월 20일, 임시정부 진영을 중심으로 비상정치회의주비회가 개최되었다. 각계 혁명당파, 종교집단, 지방대표 등을 소집하여 국민대표대회를 열고, 이를 기반으로 정식 독립정부를 구성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1946년 2월 1일 각계인사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국민회의가 발족되어 홍진이 의장이 선출되었지만, 그는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심장천식으로 인한 건강악화가 문제였다. 결국 그는 1946년 9월 9일 향년 70세로 숨을 거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10년 5월 24일에는 국회도서관 정보 검색홀에 '홍진 임시의정원 의장 기념 전시실'을 조성하여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 이용철(독립기념관 연구원, 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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