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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연병호

형·조카·사위·외손녀 등 3대 5명도 독립 운동
상하이→북경→만주로 이동하며 가열찬 투쟁
상하이서 피체…국내 압송돼 징역 6년형 선고
63년 도안초등서 장례…초대 이범석총리 조사

  • 웹출고시간2015.08.16 15:07:20
  • 최종수정2015.08.16 15:07:20

연병호

[충북일보] 연병호(延秉昊, 1894~1963)는 증평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이후 1937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경에 체포되기까지 20여 년을 국내와 중국 관내, 만주 등지를 무대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발을 내딛으며,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신한독립당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형 연병환 역시 독립유공자이며, 형의 딸 연미당과 사위 엄항섭, 외손녀 엄기선 또한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적으로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곧 연병호는 3대에 걸쳐 5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가문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 형 병환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나서다

연병호는 1894년 11월 22일 괴산군 도안면 석곡리(현재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서 부친 연채우(延彩羽)와 전주 이씨 사이에서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곡산이고, 호는 원명(圓明)이다. 어린 시절 그의 가정 형편은 겨우 빈농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그의 선대가 도안면에 세거한 것은 15세기 후반부터이다. 연정은 부친이 죽은 후 어머니 상산 김씨의 친정인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로 내려와 살게 되었고, 이 후 안동 김씨와 결혼하면서 처가인 도안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현재 곡산 연씨가 도안면 내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 여러 곳 있다.

연병호는 형 병환(秉煥)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북간도 용정에서 중국 해관원으로 근무하던 병환은 용정에서 전개된 3·1운동을 지원했다가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병환은 세관에 근무했던 관계로 다른 사람의 몇 곱절되는 많은 봉급을 받았는데, 이를 독립운동에 지원하였던 것이다. 연병호는 고향 도안에서 중명학교(重明學校)를 마치고 형의 부름을 받아 1913년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중등과정의 창동학원(昌東學院)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나, 이듬해에 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병호 생가

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이후 연병호는 1916년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에 입학하여 1년 정도 수학하였다. 이 또한 이미 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형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그는 기독교청년회관에 재학하는 동안 안재홍·조용주 등과 교유하였는데, 이는 기독교를 배경으로 대한민국청년외교단 활동에 참여하게 되는 중요한 인적 기반이 되었다.

◇ 대한민국청년외교단 결성에 참여하다

연병호가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3·1운동 직후 국내에서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을 결성하면서였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청년들이 주체가 되어 '독립정신의 보급 및 선전과 아울러 세계 각국에 외교원을 파견하여 독립 실현을 보장받는 것'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연병호는 조용주·송세호·안재홍·이병철 등과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외교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외교활동을 주요 방략으로 삼았던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국내 비밀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배달청년당으로의 개편을 추진해 갔다. 그러나 이 해 11월말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발각되면서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연병호는 궐석재판을 통하여 징역 3년을 선고 받았으나, 이미 해외로 망명한 뒤였기에 옥고를 치르지는 않았다.

연병호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20.6.29

연병호는 1919년 말 안도현에 근거를 둔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에 합류하였다. 이 단체는 3·1운동 직후 의병 출신인 이규·강희 등이 구한국 군인들을 모아 조직한 대한정의단임시군정부(大韓正義團臨時軍政府)를 임시정부의 권고에 의해 명칭을 개칭한 것이었다. 연병호는 총재를 보좌하는 참모로서 심판과장으로 있었는데, 이때 병준(秉俊)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한편 일제의 한 조사에 의하면, 연병호가 안도현 내두산(內頭山)을 근거로 약 40명의 부하를 거느린 광복단독립산포대(光復團獨立山砲隊)의 수장으로 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그의 이름을 연병학(延秉學)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연령과 출신지가 일치함으로 동일인임이 분명하고, 그가 상하이로 가기 전에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상하이로 독립운동의 무대를 옮기다

이후 연병호는 상하이로 가서 1922년 2월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 문제로 혼란하자 여러 번 사임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그 해 4월 십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모여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결성하였다. 세계한인동맹회는 당시 상하이 한인단체로서 결성 직후의 회원이 5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연병호는 세계한인동맹회에 참여하여 주무를 맡았으며, 그의 집(프랑스 조계 군영로 2호)을 통신소로 활용하였다. 또한 6월에 유호청년회(留滬靑年會)가 조직되었는데, 그는 윤자영·이규정 등과 9인 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그가 비교적 일찍이 상하이 독립운동 세력 중 인정받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해 7월, 연병호가 이끄는 세계한인동맹회를 비롯하여 각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였다. 시사책진회의 주요 안건은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를 포함하여 임시정부의 개편 방향과 임시의정원의 처리 여부 등이었다. 이때 그는 34명의 서명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시사책진회에서도 해결 방도를 찾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7월 28일 조소앙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

◇ 다시 베이징과 만주로 무대를 옮겨

독립신문에 실린 연병호의 기고문

1920. 3.30

연병호는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겨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갔다. 이 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 탄핵안을 가결하고, 2대 대통령으로 박은식을 선출하였다. 그러자 연병호는 1925년 5월, 이천민·박숭병과 함께 이승만 탄핵에 대한 부당함과 대통령 선출 방식을 지적하는 『교정서(矯正書)』를 발표하였다. 당시 그의 동지인 이천민(본명 이세영)은 의병 출신으로,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을 지낸 독립군의 지도자였다. 박숭병은 임시정부 초기에 군무부 위원으로 활동한 인사였다.

1925년 말 연병호는 만주로 넘어가 신민부에 참여했다. 그의 역할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국제공산당으로부터 군자금을 지원받는 것이었다. 이때 그는 중국 군벌 펑위샹(馮玉祥)의 책사로 활동하던 이흔(李俒)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국제공산당과 직접 교섭한 결과 5만원이라는 거액의 지원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26년 2월 연병호는 1차로 받아온 3천원을 신민부에 교부하여 동녕현에 소재한 군사강습소의 운영자금으로 사용했다. 이후 신민부와 관련한 그의 행적은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운동을 주도하다

도안초등학교 교정에서 치러진 연병호 장례식

1963.2.3

연병호는 1929년 무렵 난징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는 신익희·윤기섭 등과 함께 정당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국혁명당은 진보적 민주정당을 표방한 독립운동단체의 단결과 독립의식 고취를 당면 목표로 삼았다. 그는 독립운동 정당의 통합에도 열정을 기울였다. 1932년에는 한국광복동지회,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독립당 등과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추진해 나갔다. 1933년 2월에는 재만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으로 통합 발전시켜 나갔다. 신한독립당은 당수에 홍진, 상무위원에는 김상덕·신익희 등을 선임하였고, 연병호는 선전위원장을 맡았다. 신한독립당에서 그는 상무위원과 집행위원을 겸하다가, 제2차 중앙위원회에서 상무위원을 사퇴하였다. 이후 집행위원을 수행하는 한편 정무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3년 9월, 그는 충청도의원 자격으로 다시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다. 1934년 1월 초에 열린 제26회 회의에서는 차리석·윤기섭·조소앙 등 기존 의원을 비롯하여, 최동오 등과 함께 선출되어 임시의정원을 운영해 나갔다. 이 무렵 그는 신한독립당을 통해 당시 전개되던 대당 조직운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대당 조직운동이란 독립운동 정당이 각기 분립하고 있던 것을 하나로 통합해 민족대당(民族大黨)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에 1935년 7월 신한독립당을 포함해 5개 정당과 단체가 통일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당하기에 이르렀으나, 이념의 차이와 파벌이 형성되면서 통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7년 초 일제 밀정인 상해거류조선인회(上海居留朝鮮人會) 회장 이갑녕이 저격되는 일이 일어났다. 일제는 대대적으로 사건에 관련된 한인 체포에 나섰고, 그는 이 사건 연루자로 1937년 1월 7일 상하이에서 체포되었다. 일제는 그를 국내로 압송해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하였고, 그는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 고향 증평에 조성되는 '연병호항일역사공원'

생가 인근에 조성 중인 연병호항일역사공원 조감도

해방 후 그는 제헌국회와 제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가다 1963년 1월 26일 고향 자택에서 서거했다. 그의 장례는 2월 3일 고향 도안의 도안초등학교 교정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장례식에는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가 참석하여 조사(弔辭)를 낭독하였고,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를 애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려 서거 직후인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현재 증평군은 연병호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6년 4월을 준공 예정으로 도안면 석곡리 생가 인근에 전시관을 포함하는 '연병호항일역사공원'을 조성 중에 있다.

/ 최소라(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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