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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정태희

충주 노은에서 출생… 류자명 밑에서 수학
충주 3·1운동후 상해 망명, 임정 중추활동
'좌익'으로 분류되나 '우익'과도 깊은 교류
국내 잠입하다 신의주에서 피체 5년 옥고

  • 웹출고시간2015.08.09 17:29:43
  • 최종수정2015.08.09 17:29:43

정태희

[충북일보] 정태희(鄭泰熙, 1898∼1951)는 충주 출신으로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임시의정원 의원직에 임명된 이래 약 13년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부 간사, 참사(參事) 등 주요직임을 수행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유일당운동에 참여하여 민족협동전선을 이끌기도 하였다. 1933년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일경에 피체되기까지, 정태희는 임시정부 요인으로서 좌우 진영을 넘나들며 조국의 독립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독립운동가였다.

충주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의 길로

정태희는 1898년 충주시 노은면 문성리에서 부친 정낙중(鄭樂中)과 원주 원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온양이고, 호는 계운(桂雲)·백양(白洋)을 사용하였다. 그는 충주간이농업학교를 다니며 신학문을 접하였는데, 당시 이 학교에는 후에 독립운동가로 저명한 류자명이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는 류자명의 가르침을 받으며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1919년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간 3·1운동은 충북지역에서도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충주지역에서 3·1운동 시위에 참가한 인원이 3천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당시 류자명도 충주간이농업학교 제자들과 만세시위를 계획하다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는 일경을 피해 상경한 후 정태희의 삼촌 정낙윤(鄭樂倫) 집에 머물렀고, 그해 6월 상하이로 망명할 때 정태희의 사촌 정석희(鄭奭熙)로부터 여비를 받았다고 한다. 류자명이 회고록에서 정태희와 정석희가 자신의 학생이었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정태희도 류자명과 더불어 충주 3·1운동 계획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촬영. 넷째줄 우측 6번째가 정태희

ⓒ 대한민국2년1월1일
정낙윤 역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로 노은면 출신이다. 정낙윤은 3·1운동 이후 이병철·조용주·연병호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로 자금을 보내기 위해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일제에 발각되자 상하이로 망명한 후 임정의 해사부(海事部) 참사로서 활동하였다. 따라서 정태희의 독립운동 참여에는 삼촌 정낙윤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태희는 3·1운동 이후 상경하였고, 평양에서 애국지사들과 교유하였으며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정에서 중추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19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대한국민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는 이해 8월 평양에서 기독교 장로인 박승명과 박인관·정덕생 등 기독교인들이 임정을 지원하기 위한 조직으로 만든 단체였다. 이 단체는 오로지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 아래 기독교회를 통해 전국적인 조직을 세워 민족역량을 결집하고자 했다. 특히 청년대원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청년단을 별도로 운영하고, 『독립신문』의 배포와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황해도와 충청도까지 단원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젊은 일꾼

정태희는 1919년 11월 말 대한국민회와 대한독립청년단이 일본경찰에 발각되자, 일경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정에 참여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임정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혈기왕성한 정태희는 자주독립의 열망이 가득한 상하이의 임정에서 젊은 일꾼으로 독립운동가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1920년 임시의정원 시절, 그의 활동내용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1921년 7월 임정 재무부 참사로 임명되는 것으로 보아, 주로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임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외교후원회 제6회 간사회에서 간사로 선출되었다. 외교후원회는 1921년 10월 워싱턴에서 열릴 예정인 태평양회의에 임정 대표가 참석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임정은 태평양회의에서 조선 독립의 승인을 호소하려고 하였으나, 열강은 임정이 회의에 참석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따라서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또한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정태희와 조동호(사진)의 신의주법원 재판 보도기사

ⓒ 동아일보 1934년 4월 17일
1923년 4월, 그는 임시의정원 제1과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임정 헌법의 개정안 마련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런데 몇 달 후인 12월, 그는 옥천 출신 독립운동가인 조동호와 함께 국내로 들어오다 일경에 잡히고 말았다. 당시 『동아일보』는 종로경찰서에서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과 함께 상하이에서 온 2명의 청년을 구인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당시 붙잡힌 인물 중 조동호가 증거불충분으로 곧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정태희는 2개월이 지난 1924년 2월 2일에서야 풀려났다. 일제는 정태희가 요주의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죄목도 없이 잡아들였던 것이었다. 당시 그가 어떤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함께 들어온 조동호가 국내에서 조선공산당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면 그가 임정계열의 민족주의자이면서 사회주의 이념까지도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일당운동으로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꿈꾸다

국내의 독립운동세력은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실패하면서 이념적인 분화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20년대 후반, 민족협동전선론이 형성되면서 독립운동계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민족유일당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1926년 7월 안창호는 단합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음 달 북경 좌파세력의 대표인 원세훈을 만나 좌우세력의 대동단결을 협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상하이에서는 임정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민족협동전선운동이 일어났다. 1927년 2월 임정은 대단결한 당에 최고 권력을 부여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였다. 1927년 정태희는 임시의정원 약헌(約憲) 기초위원으로 임정 내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선언 명단

ⓒ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1927년 3월 2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삼일당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상하이촉성회가 성립되었다. 당시 좌우를 대표하는 24명의 집행위원들은 유일한 대독립당을 촉성하고 한국독립에 필요한 모든 민족적 혁명 역량을 총집중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그를 포함한 상하이 청년들은 같은 달 26일 상하이한인청년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민족유일당 성립을 지지하였다.

그는 또 이해 12월 베이징·상하이·광둥·우한·난징의 한인청년회 연합체인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서 상하이지역 중앙집행위원에 임명되었다. 이 동맹은 중국관내 각 지역의 유기적인 연결을 위한 연합으로, 만주의 독립 세력까지 연계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동맹에서 위원장 후보에까지 오르는 등 주요 인물로 활동하였다. 1929년 1월에는 한국유일독립당 상하이촉성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좌우세력의 상호 마찰을 피하고 통일된 정당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중국관내 한인들의 유일당운동은 중국의 좌우합작이 결렬되고,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서 민족주의자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규정하면서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해 말 유일당운동의 전위적 청년단체인 중본한청동맹까지 결렬되었다. 결국 1929년 10월 26일 한국유일독립당 상하이촉성회는 자진 해체되었고, 그 자리에서 좌파계열과 일부 우파인사가 포함된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는 이 동맹의 선전부에서 활동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영향 아래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는 이미 좌익인사로 분류되어져 있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우파 인사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그는 1931년 12월까지도 임시의정원의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1932년 2월에는 난징과 상하이의 우파계열 단체인 한국혁명당의 총무를 지내기도 하였다.

'국제공산당사건(정태희사건)'으로 붙잡히다

1933년 8월 정태희는 국제공산당 집행위원이던 김단야로부터 지령을 받고 국내로 잡입하였다. 지령의 내용은 여운형에게 연락하여 조동호를 상하이로 불러들일 것과, 조선의 젊은 청년들을 공산당원으로 양성하기 위해 중국유학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는 국제공산당으로부터 교통비 4백원을 받았으며, 여운형의 도움으로 조동호가 안내한 영도사의 승방에 숨었다. 그는 1933년 11월 김단야에게 임무의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상하이로 돌아가던 중 신의주에서 평안북도 경찰부 이동경찰에게 피체되었다.

정태희 생가마을

ⓒ 충북 충주시 노은면 문성리
피체 이후 『동아일보』 등 각종 일간지에서는 이 사건을 '국제공산당사건'·'정태희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연일 보도하였고, 그가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직접지시를 받아 활동한 것이라 하여 세간의 주목을 크게 끌었다.

일제는 주요 인물인 정태희와 조동호 2명을 기소하였다. 이후 3차례의 공판 연기 끝에 1934년 4월 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정태희는 징역 5년, 조동호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항소를 하였으나 6월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0년 출옥 후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숨어 살다가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옥중 생활에서 건강을 해쳐 1951년 5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정부는 1963년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전상미(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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