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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4.06.19 16:30:11
  • 최종수정2014.07.10 15:39:14
ⓒ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청주는 한국 동양화의 대가 운보 김기창 화백이 생전에 작품 활동을 하던 고장으로 그의 사저와 미술관이 있는 곳으로 한국화단의 중요한 맥이 흐르는 곳이다.

그러나 대부분 운보의 제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활동을 하고 있을 뿐 운보의 직접 제자는 이곳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시절 제자로는 충주에 화실을 마련하고 활동하는 원로 여류화가 소원 문은희 선생이 있을 뿐이다.

그 뿐만 아니라 청주에서 활동하는 원로 동양화 화가도 거의 없다.

그 중 정규대학에서 전공과정을 마친 정통 한국화 화가로는 제일 먼저 홍병학 화백을 생각하게 된다. 홍 화백은 원래 충남 홍성군 은하면 대율리에서 태어났다. 그 곳은 부모님의 고향이기도 하고, 현재도 큰집이 그곳에 있으며 사촌형께서 종가를 잇고 있다.

ⓒ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그리고 홍성읍내 광천에서 초등학교와 중학을 다니고 광천상고를 졸업하였다. 학창시절 부친께서는 광천에서 포목상을 하며 비단 장사를 하였기 때문에 홍 화백의 학창시절 별명은 '비단장사 홍 서방'이었다. 부모님께서는 비단 장사를 하면서 홍 화백을 맏아들로 낳고 연이어 아들 다섯에 다시 아래로 딸 다섯 모두 11남매를 두었으니 부부 금실이 얼마나 좋았는지 짐작이 간다.

11남매의 맏이로 성장한 홍 화백의 이력이 매우 이채롭다. 홍 화백은 광천상고 재학시절 한 때 약학대학 진학의 꿈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소질을 보이던 미술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 중에 홍익대학을 다니는 고향 1년 선배의 권유로 홍대 동양화과를 진학하게 되는데 광천상고에서는 역대 처음으로 미대를 진학하게 된 것이라 한다.

ⓒ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1961년 입학 당시 동기로는 이경수(홍대 교수 정년), 변상봉(작고, 전 경남대 교수) 등이 있다. 대학시절 1학년 과정은 뜻밖에 서양화가 박석호 교수(충북 옥천 출신)의 지도를 받게 되고, 그러나 2학년부터 조복순 교수로부터 채색화를 배우고 청전 이상범 화백으로부터 사군자를 배운다.

특히 3, 4학년 과정은 천경자 교수로부터 인물화, 화조화 등 채색화를 배우지만 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스승의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다. 그 당시 고향에서 장사를 하던 부친도 자식 11명을 뒷바라지하느라 힘겹고 사업도 부진하게 되면서 홍 화백은 대학 생활 내내 궁핍한 생활을 피할 길이 없었다.

등록금은 대여 장학금으로 대체했지만 항상 쪼들리는 재료비 걱정을 하면서 졸업 후 중등학교 미술교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교직과목을 충실하게 이수한다.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 후 안양 근명중학교에 임용되어 미술교사를 시작한다. 일단 미술교사로 출발하게 되면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되고 당시로서는 화가로 활동하기에 최고의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다시 1년 후 서울 충암중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이곳에서 1968년부터 1980년까지 12년간 미술교사로 재직한다.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잠시 수원공업전문대학 디자인과에서 기초실기를 지도하였지만 1982년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에 한국화 전공 교수로 부임하면서 청주 사람이 되었다.

마침내 홍 화백의 화가로서의 큰 걸음은 청주에서 시작하게 된다. 대학에서 한국화 전공 제자를 충실하게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활동도 청주에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충북대학교 미술과 교수로 재직한 25년은 미술교육과에서 훌륭한 미술교사를 양성해야 된다는 책임뿐만 아니라 작가로서의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게 하는 중요한 시기가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동양화가 아닌 한국화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에 대한 의문과 자신의 작업의 향방에 대하여서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서히 대학시절 배운 채색기법을 털어내기 시작하며 동양화가 아닌 한국화가로의 변신하기로 결심한다.

기존 대부분의 채색화의 색채가 일본화 채색화 색상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모두 근대적 일본의 시각에서 발현된 채색이라고 홍 교수는 말한다.

이러한 생각으로 몇 해 새로운 작업을 거친 후 1983년 청주 청탑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우선 지금까지 진행해오던 작품의 형식에 한국 전통 형식을 결합시키기 위하여 '십장생도'와 '민화'에서 소재를 찾기도 하며 화조를 그리기도 하였다.

한국화의 주류는 역시 '산수화(山水畵)'라는 생각과 한편으로는 조선의 산수화는 그 뿌리가 중국이기 때문에 한국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한국화의 형식을 만들 수 없을까· 고민하게 된다.

홍 화백은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산수화에는 산과 물이 다 있으니 지자나 인자가 모두 좋아하지요. 산수화는 한국인의 정서에 잘 맞지요~"라고 말한다.

그는 중국풍(風)의 관념산수 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를 수용한다. 그러나 홍 화백의 산수화는 있는 그대로의 산수라기보다는 여러 장면을 재배치하고 압축해서 재현하는 창조적 풍경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풍경에 단청으로 색을 입힌 것이 소위 홍병학의 '단청(丹靑) 산수화'이다.

한국미술사에서 채색 산수화는 없다. 조선조 말 이왕가 박물관과 김은호와 이상범의 채색화를 볼 수 있으나 그것은 모두 주문받아서 제작한 모뉴멘탈화(畵) 이지 순수 창작 작품에서는 채색화가 없음을 말한다. 1984년부터 시작한 '채색 산수'만을 갖고 초대형 개인전을 열고 싶은데 아직 상품성과 인지도가 없어서 기획전을 개최하기가 싶지 않음을 말한다.

홍 화백은 충북대학교 교수를 정년퇴직한지 6년이 되었으나 대학에서 가르친 수많은 제자 중에서 특히 배진석, 이동우, 최재자, 임영수, 박필현, 김미희. 홍종철 등 현재 중등학교 교사이면서 좋은 작품 활동하는 작가라고 말한다.

그의 연륜을 감당하기에는 조금은 작은 운천동 화실에는 충북대, 서원대, 교원대, 교대 등 출신으로 퇴직 교사 몇 사람이 홍 화백의 화실 회원 작가로 틈틈이 참여하고 있었다.

홍 화백은 현재 운보미술관 관장의 사회적 직함을 갖고 있기에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물었더니 자신의 생각을 확실히 밝혔다. 처음에는 한국화 화단의 위기와 운보미술관의 위기와 외적 요인으로 관장 취임 제안을 고사했지만, 운보미술관을 대한민국의 미술관으로 생각하고 2009년부터 현재까지 4년째 직함을 갖게 되었음을 말한다.

재단의 외적 문제에는 일체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한국화 화단과 운보미술관을 부활할 수 있는 컨셉을 만드는 일에만 참여할 뿐이며 앞으로도 운보미술관이 운보 개념의 상징적 센터가 되는데 일조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홍 화백은 충남 홍성이 고향이지만 1982년 청주로 온 후 30여년을 이곳에서 후학을 키우고, '단청 산수화'라는 자신의 작품 형식을 탄생시켰기 때문에 청주 사람이라고 말한다. 홍 화백은 며칠 전 종이 2,000장을 사 놨는데 앞으로 10,000장의 작품을 그릴 생각이라 한다. "피카소는 평생에 4만 점이 넘는 작품을 하였는데 나도 최소한 만 점은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얼마 전 김흥수 화백께서 95세에 세상을 뜨셨는데 나는 100세까지 이곳에서 살 계획이라 말한다.

평소 성품이 인자하고 부지런한 홍 화백은 "TJB화첩기행"에 출연하면서 우리나라 금수강산을 스케치하는 행복감에 젖어 있다.

글/김재관(미술학박사, 쉐마미술관장)

사진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홍병학 화백 주요 약력

1942년 충남 홍성군 은하면 대율리에서 출생

1965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 졸업

1983~현재 청탑화랑, 국립청주박물관, 청주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대청호미술관 등에서
개인전 17회 개최

1982~2008년 충북대학교 미술과 교수 재직

~ 현재 충북도전 초대작가, 춘추회 창립 회원

2009~현재 운보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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