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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루전쟁의 교훈은 용맹한 군대도 우수한 무기가 있어야"

41. 일본군 무라타(村田)총을 개발하다
서구열강의 군사력 기초는 스나이더 등 신식 후장식 소총
1880년 일본이 개발한 무라타총은 당시 최고 수준의 소총
조선이 망한 1차 요인은 신식총을 만들 기술력이 없었기 때문

  • 웹출고시간2013.08.06 16:18:01
  • 최종수정2013.08.06 19:42:07
41. "일본군 무라타(村田)총을 개발하다"

■ 줄루전쟁과 무기

영국군이 1879년 1월 아프리카 남부의 줄루왕국을 침공한다. 줄루왕국의 케츠와요(Cetshwayo) 왕은 이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영국군 침공 병력은 적은 수가 아니었다. 정규군 6천6백명과 원주민 병사 8천명이 대포 17문과 캐틀링 기관총 1문 그리고 초기 로켓포 2문을 가지고 3개의 부대로 나누어 줄루왕국 나탈지역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줄루족 전사가 승리한 이산들와나(Isandhlwana) 전투기록화.

ⓒ 영국 기록화가 찰스 에드윈 플립(Charles Edwin Fripp, 1854·1906) 그림.
줄루 전사는 3만 5천명을 헤아렸다. 이중 2만여 전사가 이산들와나(Isandhlwana)에 있던 영국군 부대를 정면 공격했다. 이 전투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가 되었다. 영국군은 후장식인 신식 마티니 헨리소총으로 무장을 했고 원주민 병사는 전장식 머스캣 총을 들었다. 줄루 전사는 짧은 창과 방패를 들었다. 무기는 비교가 되지 않았으나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줄루 전사들은 대포를 쏘아도, 로켓을 쏘아도, 마티니 헨리소총으로 일제 사격을 해도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 밀려왔다. 단발 사격만 가능했던 소총은 대규모 전사가 일시에 공격할 때 속수무책일 수 있었다. 마침내 영국군 진영이 뚫렸고 줄루 전사들은 단숨에 휩쓸어버렸다. 제국주의열강의 대규모 침공군에 맞서 승리한 세계사적인 사례였다.

그 전투가 끝난 지 100주년이 된 1979년에 '줄루 돈(Zulu Dawn)'이라는 대작 영화가 개봉되었다. 피터 오툴과 버트 랭카스터가 나오는 이 영화를 보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 침략을 받았을 때 우리가 이처럼 용맹하게 싸운 적이 있었는가. 그렇다. 있었다. 1894년의 우금치전투이다. 동학농민군은 죽고 또 죽어도 고지에 있는 적을 공격하고 또 공격하면서 처절하게 쓰러졌다. 15년 뒤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제국주의 침략군은 어떻게 강한 군대가 되었을까. 무엇보다 우수한 무기를 가졌기 때문에 강했다. 고지에 있거나 방어벽을 갖추고 대응하게 되면 공격군이 아무리 많아도 막아낼 수 있었다. 줄루전쟁의 또 다른 전투에서 그것이 확인되었다.

■ 캄불라전투의 교훈

대패를 당한 후 즉각 후퇴했던 영국군은 철저히 준비를 한 뒤 2차 침공을 해왔다. 여러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줄루 전사의 희생은 컸으나 영국군 전사자도 속속 늘어났다. 영국군은 나탈주 캄불라에 목재 벌목과 가축 사육 그리고 야전병원을 군수기지 역할을 하는 요새를 운영했다. 줄루 전사들은 이 요새를 공격하기로 정했다.

1879년 3월 29일에 2만 여 줄루 전사가 기습하였다. 이산들와나에서 노획한 마티니 헨리소총도 가지고 있었다. 소수의 영국군은 급히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참호를 파고 돌과 식량포대로 일자형 보루를 만들었다. 마차들은 눕혀서 장애물로 삼았다. 주요 공격지점에는 각 방면에서 오는 적을 막도록 포병과 보병을 배치했다.

줄루 전사가 가까이 몰려오자 영국군은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선두 대열을 무너져도 줄루 전사는 방어선까지 접근했다. 그러자 영국군은 연이어 일제사격을 했고, 많은 줄루 전사가 쓰러졌다. 한 시간 반 뒤 후퇴를 했던 줄루 전사는 재정비해서 양면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영국군은 장애물 뒤에 숨어서 총을 쏘아댔다. 줄루 전사가 2천 명 가까이 쓰러지자 사기가 떨어져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군 전사자는 29명에 불과했다.

캄불라전투는 전기가 되었다. 이 전투의 교훈에 따라 영국군은 방어벽을 만들어 피해를 줄였고 줄루 전사는 일방적으로 희생되었다. 1964년에 캄불라전투는 '줄루(Zulu)'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한국에선 '줄루전쟁'이란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2만 5천 병력으로 2차 침공을 한 영국군은 케츠와요왕까지 사로잡았고, 줄루왕국은 사라지게 된다. 무기의 차이가 가져온 결과였다.

■ 신식소총이 없었던 조선군대

조선이 일본의 만만한 침략 대상이 된 것은 부국강병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강병에는 훈련된 군대와 무기가 필수이다. 근대 군대의 무장은 개인화기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군사력의 강약은 개인화기 곧 소총에 달려있다. 조선의 군사력이 약했던 것은 결국 신식소총을 갖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소총은 전장식에서 후장식으로 발달해왔다. 전장식(Muzzle loading)은 화승총과 같이 총구에 화약을 쏟아 넣어 다지고, 그 위에 탄환을 넣은 다음, 심지에 불을 붙여 화약을 터트려서 탄환을 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발사까지 절차도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며 사정거리도 짧을 수밖에 없었다.

후장식(Breech loading)은 격발장치가 있는 뒷부분에 탄알과 화약이 일체화가 된 총알을 장전한 다음 공이쇠로 강하게 화약을 쳐서 총알이 나가게 하는 방식이다. 전장식보다 빠르게 쏠 수 있고, 조준 사격을 할 수 있으며, 재장전도 쉬웠다. 물론 사정거리도 늘어난다. 총열에 강선을 만들면 총알이 회전하면서 안정된 탄도를 가지게 된다.

서구열강의 군대가 가진 신식총의 우수성은 일본에서 먼저 알아채고 보유하려고 힘을 썼다. 막부 시절 각 번은 갖가지 서구총을 사들여 무장을 했다. 그러나 내전을 겪으면서 병사들이 동일한 총을 가져야 같은 탄알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알게 되었다.

일본군은 일찍이 제식소총을 정하였다. 육군은 영국제 스나이더(Snider-Enfield)총을 제식화했고, 해군은 마티니 헨리(Martini-Henry)총을 제식화했다. 모두 영국에서 사들여온 것이다. 해군이 쓰던 마티니 헨리총은 분당 12발 사격이 가능했고 최대 사정거리가 1,700m, 유효 사정거리가 370m였다.

스나이더(Snider)소총.

육군의 스나이더총은 6초면 재발사가 가능하고 최대 사정거리는 1,150m, 유효 사정거리는 900m였다. 영국에서 사들인 이 소총으로 일본은 많은 전쟁을 했다. 보신(戊辰)전쟁, 세이난(西南)전쟁에서 썼고, 강화도사건을 일으킬 때 사용했으며 청일전쟁에선 후비부대의 기본화기가 되었다.

조선은 개항 이후에도 신식소총을 직접 사들여오지 못했다. 일본과 청의 무역상에 의뢰해서 총구의 크기가 다른 갖가지 총을 비싸게 사왔다. 문제는 제식소총의 중요성을 몰랐던 것이다. 알았어도 어쩔 수 없었다. 신식소총을 직접 만들 기술과 제작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 무라타(村田)총을 개발한 일본군

무라타총을 개발한 무라타 츠네요시(村田經芳, 1838~1921).

1880년 일본은 자국산 소총의 개발과 제작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화승총이 전래된 이후 300년이 지나 서구와 맞먹는 수준의 소총을 처음 만든 것이다. 개발자는 무라타 츠네요시(村田經芳, 1838~1921).

사격의 명수였던 무라타는 사쓰마번 출신으로 보신전쟁과 세이난전쟁에 참가해서 같은 군대가 여러 총을 사용하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당시 각기 영국제 스나이더소총, 프랑스제 미니에총(Minie rifle) 등 여러 총을 보유하고 전투를 했던 것이다. 일본군의 무기를 제식화하려면 직접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기에 관심이 많았던 육군의 원로 오야먀 이와오(大山巖)도 지원하였다.

육군은 총기 개량을 맡은 그를 1875년에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에 파견했다. 소총 개량과 사격기술 습득이 목적이었다. 귀국 후 육군오야마(戶山)학교 교관으로 연구를 계속해서 1880년에 처음 자국산 소총의 개발에 성공하였다. 최대 사정거리가 1,800m인 '13년식 무라타소총'이 그것이다.

무라타(村田)소총.

이 총은 프랑스에서 개발한 그라스(Gras)총과 네덜란드의 보몬(Baumont)총을 모델로 단순화한 형태였다. 즉시 육군의 제식소총이 되었고, 1885년에는 개량형인 '18년식 무라타소총'이 나왔다. 이 두 가지 소총을 가리켜 '메이지 13년 대일본제국 무라타소총'이라고 하였다.

무라타총은 대량생산을 시도했지만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청군과 직접 전투를 벌였던 1군과 2군 병사에게만 지급되었고, 2선에 있던 부대는 스나이더총을 그대로 쓰게 하였다. 혼성제9여단 등 5사단은 무라타총으로 무장하였고,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증파된 후비보병 제19대대는 스나이더소총을 가지고 왔다.

■ 전쟁을 준비해온 일본군

일본군은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함정과 대포를 사들였다. 그리고 무라타총을 양산해서 병사들에게 무장을 시켰다. 조선과 청국에 파견한 스파이들은 중요한 정보를 전해왔다. 이제 전쟁 개시만 남아 있었다.

이 때 조선에선 국왕 고종은 성격이 강한 왕비에게 국정을 의존하였고, 민비는 민씨 척족들이 요직을 독점하게 하였다. 실권자 민영준은 재물을 긁어들이기에 열중했고, 관직은 공공연히 매매가 되었다. 부패한 관리들이 농민 착취에 여념이 없는 위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농민들의 봉기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이 혼란에 빠지자 일본은 침략의 적기로 생각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집권자들의 가장 큰 현안은 조선침략이었다. 언제든 침략은 감행했을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핑계를 대기 위한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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