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2024.03.28 15:43:28

신현애

수필가·공인중개사

밤새 움츠렸던 도시의 어둠이 기지개를 켜고, 저마다의 하루를 분주하게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잘 있나 그냥 한번 걸어 보았다" 어머니께서도 별고 없으시다기에 몇 마디 말을 나누다 전화를 끊었다. 그 후 '그냥'이라는 단어가 지금까지 귓가에 여운으로 남아있는 것은 왜일까. '그냥'이라는 말 뒤에 숨어있는 의미를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의 어머니 나이를 훌쩍 지난 지금에 와서야 어머니의 마음을 톺아본다.

주일미사가 끝나고 집에 온 뒤에 핸드폰을 열어 보았더니 문자가 와 있었다. 일요일 아침이면 성당 가는 걸 익히 알고 있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의외로 "그냥 해 보았다"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아무래도 미심쩍어 이웃인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냥'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반색하며 맞아주는 그녀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두어 시간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여도 그녀가 문자를 한 이유를 말하지 않아 일어서려고 하는데, 갑자기 "10분만 더 있다가 나랑 같이 나가자"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보았다. 눈가로 스쳐 지나가는 외로움을... .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찰나'와 같은 시간처럼 짧았는데, 그녀가 끝내 말하지 못한 단어였다. 순간 "외롭구나" 낮은 말로 물었더니 곧 나온 대답이 "응" 이었다. 그녀의 그 말은 강렬하게 나를 붙들어 주저앉게 했다.

기쁨이나 슬픔은 표현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다고 했지만 외로움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 외로움은 무엇일까. 살다 보면 누구나 풀 나무에 맺힌 이슬처럼 깊은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고 했는데, 그녀는 외견상으로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은 공무원을 정년퇴직하고 재취업에 성공했다. 아침이면 말끔하게 차려입고 출근하는 남편을 기쁜 마음으로 배웅해야 하건만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다"라고 말했다.

휑한 가슴은 봄날에 흩날리는 꽃잎을 보아도 설렘이 없고, 문명을 따르기도 어려워 컴퓨터를 잘하는 젊은이의 기색을 살피게 되며 점차 자신감이 떨어진다고 했다. 강물처럼 흘러가 버린 지난날이 덧없이 느껴지고, 때로는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외로움이 몰려오기도 한다고 했다. 세월이 가져다준 이런 감정을 누구에게 낱낱이 말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크게 흥행을 거둔 영화 '국제시장'의 끝부분이다. 가족들은 거실에서 식사하며 웃고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한데, 자신의 방에서 혼자 외롭게 누워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잔영처럼 떠오른다. 가족이 있어도 혼자인 듯 느껴지는 외로움. 어느 작가는 외로움에 눈물을 뚝뚝 흘린 적이 있다고 했고, 정호승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했다. 지금 원심력과 구심력의 사이에 서 있는 그녀의 마음이 갈대와 같이 느껴졌다.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흔들리고 때로는 뿌리가 뽑혀 쓰러질 듯하다가도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이 계절, 그녀가 외로움을 잘 견뎌내고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50년 전, 그때 어머니의 '그냥'이란 말속에도 '이런 마음이 서려 있으셨구나' 하고 뒤늦은 회한에 젖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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