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문화와 대중문화

2024.03.25 16:43:01

김은정

세명대 교양대학 부교수

19세기 말 미국에서 서커스로 큰돈을 벌게 된 남자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그토록 염원하던 대저택으로 입성한다. 성공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프릭쇼', 이른바 괴짜들의 묘기 대행진과 같은 그의 서커스는 대중에게는 큰 사랑을 받았지만 상류층에게는 노골적인 무시와 경멸을 당했다. 상류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쇼를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고민 끝에 당시 유럽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으던 스웨덴 출신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를 영입하고 새로운 공연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실존 인물 P.T 바넘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위대한 쇼맨>의 내용이다.

서구사회 상류층 귀족 문화를 근간으로 한 '고급문화'와 노동자계급에서부터 발생된 '대중문화' 간 경계를 나누고 서열화하는 구분은 언뜻 자연스러운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1850년 이전에는 예술과 엔터테인먼트, 즉 고급문화와 대중문화가 거의 구분되지 않고 공연되었다. 사회학자 폴 디마지오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이 본격화되고 제도화된 것은 불과 19세기 미국 보스턴에서부터였다고 한다.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미국 보스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에 위치하던 보스턴의 엘리트 집단은 남북전쟁 이후 탄생한 신흥 부자와 이민 세력으로 인해 자신들이 유지해오던 권력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불안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문화의 제도화'를 고안해냈다.

19세기 보스턴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문화를 자랑했다. 당시에는 학생들이 작곡한 대중음악과 유럽의 작곡가가 작곡한 곡들이 한 무대에서 공연되었고 클래식 음악이 대중가수에 의해 공연되기도 했다. 1840년대에는 복권을 통해 그림을 팔거나 화가들의 그림이 중국으로부터 온 진기한 물건과 함께 전시되기도 했다. 곡예사가 찰스 디킨즈의 한 구절을 낭송했고, 서커스에는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노래하는 셰익스피어식 광대가 인기를 끌었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혹은 문화와 예술 간 서열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19세기 보스턴의 엘리트 그룹은 어떤 방식으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을 제도화시켰을까· 먼저 이들은 기업화를 통해 엘리트 집단이 통제하고 운영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든다. 대표적으로 당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기존 다른 오케스트라와 달리 공연 프로그램에 대중적 취향을 가진 음악들은 절대 포함시키지 않았고 철저한 훈련으로 다른 오케스트라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다음으로, 예술과 엔터테인먼트 사이에 높은 경계를 만들었다. 이를테면 예술이 공연되거나 전시되는 공간에는 엔터테인먼트 즉 대중문화가 함께 놓일 수 없는 규칙을 만드는 방식이다. 결국 현대사회의 대중이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인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은 다분히 의도를 가진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다시 바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를 공연에 끌어들인 후 바넘은 상류사회에서도 인정을 얻게 되었을까? 제니 린드와 함께 미국을 순회하며 공연한 바넘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상스러운' 쇼라는 상류층으로부터의 멸시에서 멀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제니 린드의 명성을 오염시켰다는 비난만 더해졌다. 상류사회로부터의 인정과 진입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간 경계에 대한 길고 긴 논의를 통해 합의된 내용의 핵심은 결국 이들 문화 간 질적인 차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어떤 고정관념에 의해 예술을 이상화하고 대중문화로부터의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게 되는 경향을 보인다. 아침에 일어나 라디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다양한 음악을 듣는다. 클래식, 랩, 포크송까지...듣는 이는 각자의 아름다움을 가진 소리들로 그저 행복한데 이들 간 높고 낮음을 정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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