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웃긴 가게' 내부
ⓒ강병조기자
[충북일보] 낡은 모자 하나가 땅 위에 굴렀다. 굴곡 많은 태와 투박한 색이다. 사람들은 쉽게 지나쳐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모자는 바닥 이리저리 휩쓸렸다. 지켜보던 한 자매가 모자를 집어 들었다. 묻은 흙을 훌훌 털곤 손바닥에 올려 놓았다. 모자는 그제야 보아뱀이 됐다. 뱃속 코끼리를 넣은 어린왕자의 보아뱀. 자매는 외로운 세상에서 다시 동심(童心)을 꺼내 보였다.
청주 상당구 장난감 숍 '외롭고 웃긴 가게'는 도로변에 자리한 작은 점포다. 사장 겸 직원이 단둘 뿐이다. 그런데도 동화 속 화려한 궁전에 들어선 설렘이 있다. 그럴듯한 기업처럼 서로를 '실장', '팀장'이라 부르는 이형린(41), 이아린(32) 자매의 익살스러움 덕이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유리창과 점포 가득 들어찬 분홍빛 인테리어도 이들의 재미난 상상의 결과다.
동생 이아린 팀장
ⓒ강병조기자
"저희 가게에 오신 분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숍 이름이에요. 가수 이상은씨가 부른 노래 '외롭고 웃긴 가게'를 따서 붙였거든요. 노래는 약간 우울한 분위기지만 가게가 꼭 그렇진 않아요. 제목 그대로, 세상이 아무리 외롭고 힘들어도 장난감을 보며 잠깐 웃고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단 의미죠."
가게 곳곳 재미난 이름에 걸맞은 소품들이 널려있다. 옛 추억을 떠올릴만한 아기자기한 장난감부터, 자매가 직접 만든 그림 엽서, 일본과 미국 등 해외에서 건너온 이색 액세서리까지 다양하다. 개중에선 지역작가들이 자매에게 판매 위탁한 상품들이 돋보인다. 주로 10대 청소년들의 작품이다.
"청소년 작가들을 보며 놀랄 때가 많아요. 저희 어린시절엔 상상도 못할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직접 상품을 기획하고 제작할 뿐 아니라 수익까지 만들죠. 자기 표현에도 적극적인 모습이에요. 부모님들도 대부분 인정해주는 분위기고요. 청소년 작가들을 보면 옛 생각이 나면서 가끔은 부럽기도 해요."
일본, 미국 등 해외에서 수입해 판매 중인 장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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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청소년 작가들에게 애착이 간다는 자매였다. 두 사람은 아들 하나에 딸 다섯인 여섯 남매의 첫째와 다섯째다. 형린, 아린 자매는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 부모의 큰 노력이 없이도 둘다 미술에 탁월했다. 학창시절엔 교내 미술대회 수상이 이어졌다. 동생 아린씨는 재능을 살려 대학에선 산업 디자인을 전공했다.
하지만 자매에게도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형린씨는 학창시절 줄곧 미술을 이어오다 어느 순간 회의감이 들었다. 입시미술의 치열함에 질렸다. 붓을 내려 놓았다. 대신 펜을 잡고 문학에 새 뜻을 뒀다. 아린씨도 비슷했다. 대학에 진학하긴 했지만 그가 하고픈 것은 애니메이션 분야였다. 방황했다.
"미술과 잠시 떨어져 보습학원 교사, 인터넷 쇼핑몰 등 다양한 일을 했어요. 힘들진 않았지만 저희 마음속엔 아쉬움이 있었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재밌게 살 순 없을까'하는 질문이었죠. 각기 다른 삶을 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그 꿈을 이뤄 보기로 결심했죠."
위탁 판매하고 있는 지역작가들의 작품
ⓒ강병조기자
꿈을 품은 자매는 용감하고 신중했다. 가게를 차리기 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와 플리마켓에서 직접 디자인한 엽서를 시범 판매했다. 반응이 뜨거웠다. 자매는 확신했다. 사람들에게 '웃음'과 '여유'를 선물할 수 있단 희망이었다. 현실 문제도 스스로 해결해나갔다. 비용절감을 위해 도심 외곽을 택하고 손수 인테리어를 했다.
이들의 진심이 통했을까. 사람들은 잃어버린 동심을 쫓아 모여들었다. 개점 당시 가게에 들어서려는 줄이 길게 늘어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연스레 입소문이 났다. SNS에는 '이상하고 웃긴 가게', '특이하고 웃긴 가게' 등 이름짓기 놀이가 이어졌다. 동심에 젖은 시민들의 작은 보답이었다.
지난 3월에는 여섯남매 중 셋째인 이주미씨가 '외롭고 웃긴 제과점'을 차렸다. 작은 가게에서 시작된 긍정적인 에너지로 주변을 문화의 거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찌든 세상에서 잠시 웃을 수 있는 공간의 탄생. 듣고 보고도 믿지 못할, 그러나 한 번쯤 가보고픈 '외롭고 웃긴' 여정이다.
/ 강병조기자